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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터블 후일담 창작 단편 9. 내 딸이 격투신일 리가 없어

히아신스v 2024. 1. 20. 13:31

이번 팬픽은 자칭 타락천사 쿠로네코와 아야세 딸 치토세의 게임 대전을 그린 팬픽입니다.

시점은 제 3 자인 쿄스케의 시점에서 변함없이 진행됩니다. 또한 아야세 팬픽 시리즈이지만 이번 팬픽의 메인은 쿠로네코와 치토세이기 때문에 아야세는 5화처럼 비중이 매우 적거나 등장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원작과 다른 설정이 나오거나 조금 어색하더라도 팬픽이니 그러려니 하고 재밌게 봐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하늘은 높고, 기온은 조금 낮으며 정면으로 쐬어도 아무런 손색이 없을 만큼 선선하고 시원한 바람이 부는 가을날 아침.

나무들이 옷을 갈아입고 몸 색깔을 물들이는 이 계절, 인간들은 연인에 대한 애틋함과 그리움, 쓸쓸함, 외로움을 느낀다.

나 역시 얼마 전까지만 해도 그랬다.

하지만 지금의 나는 더 이상 연인에 대한 애틋함, 그리움, 쓸쓸함, 외로움 따위를 느끼지 않는다.

 

아빠, 오늘도 날씨가 정말 좋아요.”

그렇구나.”

 

이렇게 세상에 둘도 없는 소중한 가족이 있기 때문이다.

나는 아침이 되면 언제나 치토세와 함께 동네를 돌며 아침산책을 한다.

아침마다 늘 보는 거지만, 치토세는 정말 묘한 아이다.

치토세는 걸음마를 시작하고 말을 할 수 있게 된 다음부터 지금까지, 나와 아침산책 하는 일을 단 한 번도 거른 적이 없다.

게다가 아침잠도 없는 듯, 언제나 아침까지 꿈나라에서 푹 자고 있는 나를 깨우는 것도 자명종 시계가 아닌 치토세다.

 

치토세.”

, 아빠.”

아침마다 이렇게 일찍 일어나서 산책하는 거, 피곤하지 않니?”

~~혀요. 치토세는요, 아빠랑 같이 아침 산책하는 게 너무너무 좋아요. 그리고 이렇게 꾸준히 운동해주면 몸도 마음도 튼튼해지고 좋잖아요.”

 

몸집만 작지 이 정도면 어중간한 어른보다 더 어른스럽다.

확실히 치토세만한 나이 땐 만화에도 흔히 나오는 어린 아이 캐릭터처럼 순진무구했던 내 유전자는 아닐 거다.

아마, 엄마인 아야세 쪽 유전자겠지.

 

네가 씩씩하고 건강하게 잘 커 준다면 아빠는 더 바랄 게 없단다. 나중에 멋진 남자도 만나서 결혼도 하고...”

싫어요, 저 결혼 안 해요. 엄마아빠랑 오래오래 쭈욱~ 행복하게 살 거예요.”

하하하, 그래그래. 아빠도 네가 갑자기 없어지면 많이 허전할 거야.”

 

하는 말 한마디 한마디가 참 기특해 죽겠다.

이렇게 착하고 순수하고, 어른스럽고 천사 같은 아이가 내 딸이라니, 난 정말 복에 겨운 놈이란 생각이 든다.

아무리 바쁘게 일을 하고 녹초가 되어 귀가하거나 기분이 안 좋은 일이 있더라도 아야세와 치토세, 두 모녀가 방긋 웃는 얼굴을 보면 나도 모르게 절로 기분이 좋아진다.

막 태어난 치토세를 본 나는 이 아이를 깨끗하고 순수하게 키우겠노라 다짐했다.

하지만 굳이 내가 신경 쓸 필요는 없었다.

유전자가 우월한 건지 본능이 그런 건지는 몰라도, 치토세는 혼자서도 충분히 잘 성장해왔고 지금도 어른스럽게 잘 성장하고 있다.

하지만... 역시 누구나 100% 순진하게 성장할 수는 없는 모양이다.

설마 치토세한테 그런 일이 벌어질 줄 누가 알았으랴.

 

 

사건은 내 휴대폰으로 날아온 한 통의 문자메시지에서 시작되었다.

문자메시지가 날아오기 전까지 나와 치토세는 언제나 변함없는 평범한 아침식사를 하고 있었다.

위이이잉...

 

? 내 건가?”

 

진동이 단 한 번만 울린 걸 보니 전화는 아니다. 문자인가?

 

아빠, 누구에요? 누구 문자에요?”

잠깐만.”

 

보나마나 스팸 문자거나 광고 문자일 거라 생각한 나는 별 의심 없이 휴대폰 폴더를 열고 문자를 보낸 송신자가 누구인지 확인했다.

그렇지만...

 

쿠로네코?”

우와! 쿠로네코 아줌마에요?”

 

살다보니 별 일도 다 있구나.

그동안 연락을 안 하고 살다보니 완전히 잊고 있었는데, 송신자가 쿠로네코라는 사실이 단순한 스팸 문자나 광고 문자가 왔을 거라 생각한 나의 예상을 한 번에 뒤집었다.

 

연락도 안 하고 너무 섭섭하네. 설마 이 타락천사를 잊어버린 건 아니겠지?

하긴 뭐, 일 다니느라 바빠서 그런 거니 내가 이해해줘야지.

어쨌든 이번 가을 코미케에서 G스타 게임쇼가 개최될 예정이거든.

특별히 할 일 없으면 와서 구경해보도록 해.

, 그리고 치토세도 반드시 데려와 줘.

여름 코미케에서 받은 굴욕을 이번엔 꼭 갚고 말테니까.

 

그러고 보니 여름 코미케 때 그런 일이 있었다.

키리노의 권유로 다 같이 여름 코미케 구경을 간 우리 가족은 그곳에서 쿠로네코와 재회했다.

그런데 무슨 이유인지는 몰라도 아야세와 쿠로네코가 서로를 마주보고 으르렁거리며 싸웠고, 두 사람을 중재하려고 낀 키리노의 제안으로 졸지에 즉석 게임 대결이 펼쳐졌다.

게임 종목은 마스케라 아케이드 판.

거기서 쿠로네코는 아야세와 키리노를 가볍게 이기며 세계적인 아케이드 플레이어로서 건재함을 입증했다.

하지만 의외의 복병이 있었다. 어른들이 게임하는 걸 옆에서 멍하니 바라보고 있던 치토세가 호기심을 감추지 못하고 쿠로네코에게 게임 대결을 요청한 것이다.

게임 결과는 안 봐도 비디오라 생각했었던 나지만, 그 결과는 보기 좋게 뒤집혔다.

세계 랭킹 5위 안에 드는 아케이드 플레이어를, 게임이라고는 가끔씩 키리노와 시스칼립스 몇 번 잡아본 게 전부였던 치토세가 이겨버린 거다.

당시의 쿠로네코는 그냥 그러려니 하고 결과에 승복한 줄 알았는데...

역시 중2병 환자라도 뒤끝이 있는 걸 보니 여자는 여자구나.

 

그런 속셈이었냐... 네가 그러면 그렇지.”

아빠, 쿠로네코 아줌마가 뭐라고 하셨어요?”

, 가을 코미케에 와서 구경하라고. 가고 싶니?”

저 가고 싶어요!”

그래. 가자꾸나.”

 

그나마 아야세가 잠시 친정에 가고 없는 게 천만다행이다.

아야세가 이 문자를 처음부터 끝까지 봤다면, 난 그 자리에서 온 몸이 토막 났을 지도 모른다.

그런데 이번엔 무슨 게임으로 치토세와 대결하려고 하는 걸까?

 

 

어떤 계절이 오든 코미케 회장의 분위기는 변하지 않는다.

입구로부터 300m까지 늘어선 엄청난 인파의 무리들, 코미케 개장까지 기다리며 제자리에 앉아 만담을 나누는 오타쿠 무리들은 계절이 바뀌어도 변하지 않는 소나무처럼 한결같다.

그나마 가을이라 다행이다. 여름이었으면 용광로를 방불케 하는 찜통더위에 땀에 절어 찌뿌드드할 텐데, 가을은 덥지도 춥지도 않은데다 선선한 가을바람도 불기 때문에 기다리느라 지치지도 않는다.

 

여러분! 지금부터 가을 코미케를 개장합니다! 질서를 지켜 천천히 입장해주시기 바랍니다!”

 

코미케 안전요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안전요원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굳게 닫혀 있던 코미케 회장의 문이 열렸다.

문이 열리자 대규모의 인파가 모래시계에서 모래가 빠지는 것처럼 입구를 향해 몰려갔다.

 

하여튼 이 인파는 못 말리겠군. 치토세.”

 

나는 잠시 자리에 앉은 뒤 치토세를 목마 태우고 다시 일어났다.

태반이 남자고 성인인 이 인파의 물결에 어린 치토세가 휩쓸리기라도 하면 큰일이다.

나는 인파를 따라 코미케 회장으로 천천히 들어갔다.

단 한 치의 오차도 없이 한쪽으로 향하던 인파가 흩어지기 시작하자 나는 목마 태우고 있던 치토세를 내려놓았다.

 

치토세, 길 잃어버리면 안 되니까 절대 아빠 옆에서 떨어지지 마. 알았지?”

걱정 마세요, 아빠. 저는 뭐든 지 잘해요.”

그럼, 그래야 아빠 딸이지.”

 

치토세가 워낙 어른스러운 탓에, 길을 잃어버려서 엉엉 우는 모습은 도저히 상상이 안 된다.

울기는커녕 오히려 다른 사람들한테 길을 묻고 물어 스스로 찾아올 것만 같다.

 

그나저나, 쿠로네코가 어디 있으려나?”

 

여름 코미케 때 쿠로네코가 있던 애니부스는 2층 끝자락이었다.

하지만 시기가 달라진 만큼 전과 같은 위치에 있으라는 법은 없다.

나는 곧 휴대폰 폴더를 열고 쿠로네코에게 문자를 보냈다.

문자가 간지 얼마 안 돼 답장이 왔다.

 

“1층 맨 가운데의 철권 부스로 와라? 철권? 설마, 그거 말인가?”

 

철권(銕拳). 나도 어렸을 때 몇 번 해본 적이 있는 격투 게임이다.

내가 어렸을 때부터 지금까지 봤던 시리즈는 철권5 까지였는데...

처음 나온 당시에는 몇 안 되는 3D 격투게임 중 하나였다.

초기의 철권은 지금 보면 매우 우스꽝스럽게 보이는 폴리곤(Polygon) 덩어리였지만, 이 게임이 처음 나와 아케이드 오락실 등지에 배치될 당시에는 정말 혁신적인 게임이 아닐 수 없었다.

하지만 역시 초기라 그런 지, 게임 밸런스나 그래픽 면에서 많은 문제점을 보였다.

그리고 정확히 1년이 흘러 철권2가 나왔다.

철권2는 오리지널 철권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엄청난 발전을 보여주었고, 그 이후로 약 3년마다 철권3, 철권태그, 철권4, 철권5 등이 등장했다.

시리즈가 가면 갈수록 게임 자체도 어려워지고 마니아를 위한 게임으로 변모하는 듯싶지만, 그래도 여전히 많은 사람들이 즐겨하고 인지도도 높은 게임이다.

내가 이렇게 바쁘게 사는 동안에도 철권의 전통은 계속 이어져 지금까지 온 것이다.

수려한 그래픽과 우월한 게임성 덕에 어린 시절 상당히 좋아했던 게임인데, 그런 게임을 많은 시간이 흘러 다시 본다고 생각하니 나름대로 감회가 새롭다.

 

우리는 곧 쿠로네코가 말한 장소로 발걸음을 옮겼다.

역시 대인기 격투게임이라는 명성에 걸맞게, 게임에 등장하는 여러 캐릭터의 코스튬 플레이를 한 사람이나 캐릭터 인형 등이 주변에 많이 세워져있었다.

이만큼 눈에 띄는 덕분에 철권 부스는 매우 찾기가 쉬웠다.

 

선배! 치토세! 여기야 여기!”

 

누군가가 나와 치토세를 부르는 목소리가 들려온다.

우리가 목소리가 들려온 방향으로 고개를 돌려보니, 검은 빛이 감도는 고딕 로리타 차림에 붉은 컬러렌즈를 양쪽 눈에 끼고 전형적인 일본 미인의 미모를 갖춘 여성이 서 있었다.

이런 차림새를 다른 사람 앞에서 대놓고 할 수 있는 사람은 쿠로네코밖엔 없다.

 

오랜만이다, 쿠로네코.”

아줌마, 안녕하세요!”

, 그래. 안녕. 오랜만이구나.”

 

치토세의 인사를 받은 쿠로네코가 잠시 멈칫했다.

여름에 있었던 안 좋은 추억이 떠오른 건가?

 

비치녀 2... 가 아니라, 아야세는?”

잠깐 친정에 갔어.”

그래. 방해하는 사람이 없으니 천만다행이군 그래.”

 

아야세가 있다고 방해될 일이 있나?

 

저기 아줌마.”

? ?”

 

쿠로네코는 치토세가 자신을 부르자 자리에 무릎을 꿇고 앉아 치토세와 시선을 맞췄다.

 

그때 그 게임 있잖아요. 어디서 구할 수 있어요? 너무 재밌어서 다시 하고 싶어요.”

오늘 오면 내가 패키지 하나 챙겨주겠다고 전에 말 안 했었던가? 코미케 끝나면 줄게. 알았지?”

, 감사합니다.”

 

치토세와 대화하는 쿠로네코의 얼굴엔 의외로 온화한 미소가 드리워져있었다.

별 일이다. 쿠로네코 입장에서 보면 치토세는 원수일 텐데, 지금 그녀가 내게 보여주고 있는 미소는 아야세가 치토세를 대할 때 짓는 점잖은 엄마의 미소였다.

이 녀석, 의외로 엄마 같은 자상하고 다정한 면도 있는 모양이다.

 

선배.”

, ?”

 

한창 치토세와 대화하던 쿠로네코가 고개를 돌려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선배도 이왕 온 거, 한 번 대회에 출전해볼래?”

대회? 무슨 대회?”

철권 대회 말이야. 오늘은 옆 나라 한국에서 특별 게스트를 초대했대. 토너먼트에서 우승하면 그 사람과 직접 대결을 펼칠 기회가 주어진다더라.”

특별 게스트? 그것도 다른 나라에서? 철권이 그렇게 세계적으로 유명한 게임인가?”

선배도 참, 정보가 부족한 건 예나 지금이나 똑같구나? 철권이 세계적으로 유명한 건 게임 좀 해본 사람이라면 다 아는 사실이야.”

 

미안하다. 난 사실 게임 쪽엔 그다지 흥미가 없어서 말이지.

기껏해야 고등학교 3학년 때 동아리에 들어가서 몇 번 만져본 게 전부니까.

그나저나 옆 나라 한국에서 오는 특별 게스트라니, 얼마나 대단한 사람이면 철권 종주국 일본에서 다른 나라 사람을 초대하는 걸까? 괜스레 궁금해진다.

 

그래, 좋다. 오랜만에 한 번 해볼까?”

결정됐군. 그럼 같이 저기 관리요원들한테 가서 참가신청하자. 나도 온 지 얼마 안 돼서 아직 참가 신청을 안 했거든.”

 

우리 세 사람은 부스 구석에 자리를 잡고 앉아있는 관리요원들 앞에 갔다.

관리요원들도 철권 게임 내에 등장하는 캐릭터의 모습으로 분장하고 있었다.

 

어서 오세요. 무슨 일이신가요?”

 

검은 빛 트윈 테일에 중국 전통의상(치파오) 차림을 한 여성 요원이 자리에서 일어나 우리를 맞아주었다.

 

토너먼트 참가신청 하려고요. 그런데, 그 차림은?”

! 철권3부터 등장해 지금도 선풍적인 인기를 끌고 있는 권법소녀 링 샤오유랍니다!”

 

여성요원은 제 자리에서 일어난 다음 공중으로 훌쩍 뛰어올라 우리의 바로 눈앞에 마치 새를 연상시키는 자세를 잡으며 정확히 착지했다.

 

우와!”

... 대단하시네요.”

 

나와 치토세는 여성요원이 잡은 포즈를 보며 갖은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반면 쿠로네코는... 별 감흥이 없는 듯 무표정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자랑은 나중에 해도 되니까 빨리 신청서나 드려.”

 

여성요원의 옆자리에 앉아있던 남성요원이 점잖고 굵은 톤의 목소리로 말했다.

이 남성요원은 머리카락을 한 곳에 모아 세워놓은 독특한 머리스타일에 마치 오토바이 타는 것을 즐기는 폭주족과 같은 샛노란 점퍼차림을 하고 있었다.

 

, 하하하... , 죄송합니다. 여기 신청서에 이름을 써주세요.”

그건 어떤 캐릭터의 코스튬인가요?”

 

내가 물었다.

 

, 저 역시 철권3부터 등장해 많은 인기를 모으고 있는 캐릭터를 코스튬하고 있죠. 캐릭터의 이름은 카자마 진이라고 합니다.”

 

남성요원은 옆자리에 있는 여성요원보다 상당히 어른스러웠다.

하지만...

 

미시마의 피는 내 손으로 끊겠다!”

 

남성요원은 캐릭터 소개가 끝남과 동시에 자리에서 일어나 TV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가라데 경기에서 자주 나오는 격투자세를 잡았다.

 

우와! 아저씨 멋있어요!”

 

치토세야 어린애니까 멋있다 한다고 쳐도...

이번 포즈는 쿠로네코는 물론 나에게도 큰 감흥을 남기지 못했다.

 

뭐예요, 선배님도 저보고 뭐라고 할 자격 없으시네요 뭐.”

 

옆자리에 턱을 괴고 앉아있던 여성요원이 핀잔을 주었다.

 

, 시끄러! 어쨌든 여기 참가신청서에 게임 아이디를 적어주세요.”

 

남성 요원은 얼굴에 홍조를 띄우며 나와 쿠로네코에게 A4용지 한 장을 내밀었다.

 

게임 아이디? 무슨 온라인도 아니고, 철권에도 아이디가 있나요?”

. 철권도 인터넷 공식홈페이지에 자신의 아이디와 애용 캐릭터를 등록해 원하는 대로 커스터마이징 한 다음, 여기 이 캐릭터 카드를 사용해 오락실 아케이드 기기나 플레이스테이션 같은 가정용 게임기로도 다른 나라 유저들과 자유자재로 대전할 수 있답니다.”

, 그렇구나. 그런데 전 게임 아이디가 없는데요.”

그러시다면 그냥 성함을 적으시면 됩니다.”

 

나와 쿠로네코는 안내요원들의 안내에 따라 대회 참가신청서에 이름을 썼다.

 

아빠, 뭐하시는 거예요?”

대회 참가신청서에 이름 적고 있는 거야.”

아빠가 하면 나도 할 거예요.”

? 너도?”

 

무조건 하겠다고 해서 되는 게 아닌데.

이런 대회는 연령제한 같은 게 있지 않을까?

 

저기, 여기 제 딸도 대회에 나가고 싶다는데 괜찮나요?”

, 연령제한은 없습니다. 얼마든지 하실 수 있어요.”

 

요즘 게임 대회들은 참 개방적이구나.

철권처럼 현실적인 그래픽을 보여주는 격투게임 대회에 연령제한이 없다니.

나는 곧 내 이름 바로 아래에 치토세의 이름도 적어 넣었다.

 

성함을 다 적으셨으면 그 옆에 사용하시는 캐릭터 명도 써 주세요.”

주 캐릭터라. 하도 해본 지 오래 되서 어떤 캐릭터가 있는 지 다 잊어버렸는데...”

정 모르겠으면 릴리 로슈포르라고 써.”

? 릴리... 뭐라고?”

 

철권을 조금 했었던 나지만 철권5 이후로는 다른 시리즈들을 거의 접해본 적이 없었기 때문에 신 캐릭터의 이름 같은 걸 알 턱이 없다.

하지만 세계랭킹 5위 안에 드는 아케이드 플레이어인 쿠로네코라면 알만한 건 다 알겠지.

 

릴리 로슈포르. 철권5 DR부터 나오기 시작한 여자 캐릭터야. 초심자도 다루기 쉬운 캐릭터인데다 외모도 인형같이 예쁘게 생겨서 많은 사람들이 애용하는 캐릭터지. 난 별로 흥미 없지만... 그래도 선배 취향엔 딱 맞는 캐릭터가 아닐까?”

어머, 많이 아시네요? , 이분 말씀대로 릴리는 철권 캐릭터 중에서 유저 층이 두터운 캐릭터에요. 기술 커맨드도 대체적으로 쉬워서 초심자가 하기에도 어려움이 없죠.”

그래요? 뭐 어떤 캐릭터인지는 나중에 보기로 하고, 그럼 그걸로 하죠.”

 

인형 같은 외모에, 초심자가 하기도 쉬운 캐릭터라.

어떤 캐릭터인지 꽤 궁금한데?

 

쿠로네코 넌 뭐할 건데?”

후훗. 이 몸이 누구인지 벌써 잊은 거야? 이 타락천사님이 사용할 캐릭터는 단 하나 뿐이지.”

 

2병 말투로 내 질문에 대답하며 쿠로네코가 신청서에 쓴 캐릭터 이름은 데빌 진이었다.

 

데빌 진이라. 어쩐지 네 이미지에 잘 맞는 캐릭터일 것 같네. 그럼 치토세가 하기에 좋은 캐릭터는 없을까?”

엔젤. 치토세는 엔젤로 해.”

, 알았어요. 저는 엔젤로 할게요.”

 

질문이 다 끝나기도 전에 대답이 나오다니.

그리고 치토세. 넌 왜 아무 의문점도 안 가지고 하라는 대로 하는 거니?

그나저나, 엔젤이라고? 그건 천사라는 뜻인데, 설마 캐릭터 이름처럼 천사는 아니겠지?

어쨌든 엔젤이라고 하니 연애할 때의 나와 아야세가 생각났다.

그때의 나는 언제나 러블리 엔젤이라는 말을 달고 살았으니까.

러블리 엔젤이라는 칭호는 아야세에 이어 딸인 치토세가 물려받았다.

 

어머, 엔젤로 하시게요? 힘드실 텐데.”

?”

 

힘들다고? 대체 무슨 캐릭터라서 안내요원들이 힘들다고 하는 걸까?

 

힘들다니, 그게 무슨 말이죠?”

 

내가 안내요원에게 물었다.

 

엔젤은 대표 풍신류 캐릭터 데빌 진의 선조라고 할 수 있는 데빌 카즈야에서 모션을 빌려 만든 캐릭터랍니다. 하지만 데빌 카즈야와는 달리 여자 캐릭터라서 공격 거리가 짧고 콤보도 데빌 카즈야보다 부실하다는 단점이 있죠. 애초에 풍신류는 어중간한 고수가 아니면 다루기가 힘든데... 따님이 잘 하실 수 있을지 모르겠네요.”

 

무슨 말인지 잘은 모르겠지만, 대충 간추려 요약해보자면 쓰기 쉬운 캐릭터는 아니라는 소리 같다.

쿠로네코 녀석, 무슨 생각으로 치토세한테 그런 캐릭터를 권유했는지 속이 빤히 보인다. 게임에서 한 번 진 것 가지고 그렇게까지 복수심에 불타올라야 할 이유가 있는 건가?

 

저는 뭐든 지 잘할 수 있어요! 우리 아빠 딸이니까요!”

 

쿠로네코의 의도를 전혀 모르고 있는 치토세는 평소보다 더 자신감이 넘쳤다.

그나저나 치토세, 남들 앞에서 부끄럽게 딸이라는 걸 큰 목소리로 홍보하면 어떡하니?

 

캐릭터는 대회가 본격적으로 시작되면 바꿀 수 없는데... 어떡할래요? 엔젤로 할 거예요?”

 

여성요원이 치토세에게 물었다.

 

! 할 거예요!”

 

치토세는 두 주먹을 불끈 쥐며 큰 목소리로 말했다.

 

가능하면 이 분과 같은 데빌 진으로 하시길 권장하는데... , 정 하시겠다면 말리진 않을게요. 코우사카 치토세 양은 엔젤로 등록하겠습니다. 곧 예선전이 시작될 예정이니 대기실에 가서 번호 받고 대기해주세요.”

 

본인이 그렇게 하고자 하는데 말리지는 말자. 나도 릴리 로슈포르라는 캐릭터를 오늘 처음 알았으니 말이다.

나는 둘째 치고 치토세가 즐겁게 하루를 보낼 수 있다면 그걸로 충분하다.

또 본인이 그렇게 자신감 있게 말하는 걸 보니 저번 여름 코미케에서 보여줬던 그 엄청난 게임 실력이 단순한 우연이 아닐 지도 모른다.

대회가 본격적으로 관중들 앞에서 펼쳐지는 건 본선부터다.

 

 

태양이 하늘의 정중앙에 올라가며 정오가 되었다.

대회에 사용될 철권 시리즈는 철권 태그2 언리미티드.

철권 시리즈도 모르는 사이에 이렇게 많은 시리즈가 나와 있었다.

철권 태그2는 과거 먼저 나왔던 철권 태그와 마찬가지로 2 : 2 대전 게임이지만, 이 대회에서는 규칙을 바꿔 솔로모드로 하기로 되어 있었다.

가장 최신작이면서 올드 유저들도 배려해 누구나 할 수 있도록 한 대회 개최진의 선심이라고나 할까.

나는 애초부터 모르는 캐릭터를 썼기에 예선에서 금방 탈락해버렸다.

그래도 릴리 로슈포르라는 하나의 캐릭터를 알 수 있어서 나름대로 즐거웠다.

릴리 로슈포르라는 캐릭터는 과연 모든 남성 유저들의 사랑을 한 몸에 받을 만큼 예쁜 금발의 미소녀였다. 나라도 반할 수 있을 정도로 예쁜... 아니지. 이런 캐릭터라도 좋아하는 모습을 아야세한테 들키는 날엔 내 목숨이 저승으로 빨려 들어갈 지도 모르니 이만큼만 하자.

어쨌든 예상했던 대로 쿠로네코와 치토세는 가볍게 예선을 통과해 본선에 진출했다.

본격적으로 예선이 끝나고 본선 대회가 시작되는 모양인지, 철권 부스 내로 대회를 구경하기 위해 많은 인파가 모여들었다.

우리들은 구경하러 온 사람들의 시선을 피해 무대 뒤의 출전자 대기실에 모니터를 통해 바깥 상황을 지켜보며 옹기종기 모여 차례를 기다리고 있었다.

곧이어 사람들이 모두 자리를 찾아 관중석에 앉고 대회 진행자로 보이는 양복차림의 건장한 남성이 부스 내 중앙무대로 나왔다.

 

사나이에게는 피할 수 없는 순간이 있다. 하나의 하늘에 두 개의 태양은 존재할 수 없다! 외나무다리에서 만난 강자를 쓰러뜨리고 단 한 명의 최강자가 되어라! G스타 게임쇼 주관 철권버스터즈, 지금 그 화려한 막을 올립니다!!”

우와아아아!!”

 

진행자의 개회선언에 관중들의 환호성이 하늘 높이 터져 나왔다.

 

바쁘신 와중에도 철권의 최강자를 가리는 대회를 구경하러 오신 모든 여러분께 감사드립니다. 이번 대회에 출전하신 40명의 예선 출전자 중 예선을 거쳐 본선으로 올라와 우승하신 분은 이웃 나라 한국에서 특별히 방문해주신 철권신(銕拳神) 유저, KneeJr씨와의 특별 대전을 할 수 있는 권한이 주어집니다! 또한 G스타 게임쇼 철권 강자라는 타이틀과 칭호를 손에 얻게 되며 WCG 세계대회에 국가대표로 출전할 수 있는 권리도 얻게 됩니다!”

 

뭐 이런 게임 대회를 바쁜 와중에도 구경하러 오는 사람은 없겠지. 대부분은 마니아들일 게 불 보듯 뻔하다.

그나저나 이 대회에서 우승하는 사람은 철권신이라는 타이틀을 획득한 유저와의 특별대전에, WCG(World Cyber Games)라고 하는 세계대회에 국가대표로도 출전할 수 있다니, 철권이라는 게임이 그렇게까지 세계적인 게임인 줄은 꿈에도 몰랐다.

 

이어서 제 1 회전! 선수 입장이 있겠습니다! 홍코너, 카포에라 마스터의 모든 것을 보여주겠다! 에디 골도를 사용하는 Mist! 이에 맞서는 청코너, 전통 풍신 가라데의 진수를 느끼게 해주마! 미시마 진파치를 사용하는 파찌! 박수로 환영해주십시오!”

 

관중들의 환호성 섞인 박수와 함께 두 명의 유저가 무대 가운데로 천천히 입장했다.

무대 가운데에 아케이드 오락기가 있었고, 사방에는 사람들이 경기를 관람할 수 있도록 특별히 설치해 둔 모니터들이 많이 배치되어 있었다.

1회전이 시작되었다.

 

에디 골도 VS 미시마 진파치.

 

쿠로네코에게서 얻은 짧은 지식에 의하면 에디라는 캐릭터는 철권3부터 나온 캐릭터로, 카포에라 라고 하는 아프리카의 전통춤과 흡사한 독특한 격투스타일을 쓰는 캐릭터라고 한다. 초보자가 쓰려면 많은 테크닉이 필요하기 때문에 약간 난해한 감이 없지 않지만, 제대로 이해만 하면 충분히 강캐의 반열에 들 수 있다나.

이에 맞서는 진파치라는 캐릭터는 철권5의 보스로 처음 등장했던 캐릭터로, 철권 태그2에 사용 가능한 일반 캐릭터로 등장하면서 많이 약화되었다고 한다. 하지만 오랜 시간 연습해야 할 필요가 있는 풍신류 캐릭터 중에서는 가장 쓰기가 쉽다는 장점도 있단다.

게임이 시작되자, 두 캐릭터는 서로 멀찌감치 떨어져 간간히 간을 보며 기회를 엿보기 시작했다.

게임 시간이 10초 쯤 흐르자 진파치가 과감히 앞으로 뛰어나가 풍신류 스타일의 간판 기술인 풍신권을 맞추며 공중 콤보가 들어갔다.

체력이 반 이상 없어졌는데도 불구하고 에디 유저는 포기하지 않고 카포에라 특유의 발 기술로 진파치의 체력을 깎았다.

첫 경기부터 이렇게 긴장감이 어마어마할 줄이야.

대기실에서 모니터를 통해 지켜보는 출전자들이나, 관중석에서 경기를 지켜보는 관중들이나 긴장하기는 마찬가지다.

진파치에게 계속 얻어맞던 에디의 체력 게이지가 붉은 빛을 띄우기 시작했다.

이것은 레이지 모드로 철권6부터 추가된 시스템이다. 캐릭터의 체력이 20% 이하로 떨어지면 자동 발동하는 상태로, 캐릭터의 공격력이 기존보다 1.35배가량 올라가는 것이다.

이 레이지 모드가 게임 내에서 많은 변수로 작용한다. 원래 철권이라는 게임 자체가 역전의 묘미로 유명하지만, 말처럼 쉽게 역전이 나오지는 않는다.

하지만 이 레이지 모드의 도입 이후, 불리한 승부를 한 번에 뒤집어버리는 모습이 자주 연출된다고 한다.

에디가 레이지 모드 상태에서 연결한 회심의 공중 콤보 연결기가 들어갔다.

진파치 유저의 승리를 점치고 있던 모두의 예상은 보기 좋게 뒤집어져, 에디 유저의 승리로 끝이 났다.

 

에디 Mist의 역전승으로 게임 종료! 두 선수 모두 훌륭한 경기를 보여주었습니다! 두 선수에게 뜨거운 박수 부탁드립니다!”

 

진행자의 경기종료 선언과 함께 관중석에서 중앙 무대를 향해 박수갈채가 쏟아졌다.

 

이어서 제 2 회전! 선수 입장이 있겠습니다! 홍코너, 고무술의 진가를 확인시켜주겠다! 카자마 아스카를 사용하는 쥬신타! 이에 맞서는 청코너, 특이하게도 철권 대회 역사상 최연소 출전자입니다! 공식대회 출전은 이번이 처음이라고 하는군요. 엔젤을 사용하는 코우사카 치토세 양입니다! 박수로 환영해주십시오!”

 

치토세가 나갈 시간이 되었다.

 

잘하고 와라.”

걱정 마세요. 제가 누구에요? 아빠 딸이잖아요.”

꼭 나랑 결승에서 만나는 거야. 지면 절대로 용서 못 해. 알았지?”

알았어요. 그럼 다녀올게요.”

 

치토세는 곧 대기실을 나가 많은 사람들의 시선이 쏠려있는 무대 중앙으로 나갔다.

모니터를 통해서도 알 수 있었지만, 관중석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치토세를 보자 마치 믿을 수 없다는 듯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하긴, 믿을 수 없을 만도 하다. 초등학교 1학년 여자아이가 대회 출전이라니.

이 사실을 믿을 수 있는 건 나와 내 옆자리에 앉은 쿠로네코 뿐이다.

치토세는 자신의 소개가 끝나자 관중석을 향해 정중히 머리 숙여 인사했다.

그에 따라 관중석에서는 치토세를 향해 웅성거리는 목소리가 사라졌다.

곧이어 두 사람이 자리에 앉자 2회전이 시작되었다.

 

카자마 아스카 VS 엔젤

 

치토세가 상대할 유저의 캐릭터인 카자마 아스카는 철권5부터 등장한 캐릭터로, 카자마류 고무술이라는 무술을 사용하며 다양한 이지선다를 걸 수 있는 캐릭터다.

이에 맞서는 치토세의 엔젤은 철권2와 철권태그에 잠시 등장하고 안 나오다가 태그2에 와서 다시 부활한 오리지널 캐릭터로, 철권 시리즈의 전통적인 유파 풍신류 스타일을 사용하는 캐릭터다. 대회 시작 전에 안내요원들이 말한 것처럼, 풍신류이긴 하지만 여성 캐릭터이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공격거리가 짧고 콤보도 부실하다는 단점이 있다. 또한 엔젤과 똑같은 격투 타입인 데빌 진이나 데빌 카즈야가 사용할 수 있는 콤보도 못 쓴다. 하지만 여성 캐릭터라는 특성 상 적의 공격에 상대적으로 공중 콤보를 덜 맞는다는 장점도 있다나.

게임이 시작되자 아스카는 엔젤에게서 멀찌감치 떨어져 엔젤의 접근을 유도했다.

하지만 상대의 수를 완벽하게 읽은 치토세는 엔젤을 아스카 앞까지 접근시키지 않았다.

오히려 기다리다 지친 듯, 아스카가 도리어 엔젤을 향해 공중 콤보 연결기를 날렸다. 그러나 엔젤은 이것을 횡 스크롤 이동으로 교묘히 피한 뒤 풍신권을 무려 3방이나 날리며 공중 콤보를 날렸다.

대기실에서 이 모습을 지켜보는 나는 경악을 금치 못했다.

 

우와... 전에도 봤지만 정말 대단해. 분명 치토세는 철권을 해보는 게 이번이 처음일 텐데 어떻게 저런 고난이도 콤보를 쓸 수가 있지?”

풍신권을 3방이나 날리며, 그것도 여성 캐릭터에게 저만한 공중 콤보를 쓰다니... 과연 나를 이긴 게이머답군. 저 콤보는 프로들도 쓰기 어려운 콤보인데 말이야.”

정말로? 너도?”

나는 데빌 진이니까 그런대로 쉽게 쓸 수는 있어. 하지만 엔젤로는 어려운데... 제법이야. 하긴, 저렇게 나와 줘야 나도 상대하는 재미가 있지. 후훗...”

 

쿠로네코는 모니터를 보며 음흉한 미소를 지었다.

내 딸이긴 하지만 정말 치토세는 대단하다. 치토세의 엔젤은 아스카를 붙잡고 공중으로 던진 뒤 강력한 광선 공격을 날리며 게임을 마무리 지었다.

치토세가 가볍게 이겼다.

 

치토세 양의 완승으로 게임 종료! 최연소 출전자 치토세 양에게 뜨거운 박수 부탁드립니다! 그리고 아쉽게 진 쥬신타 선수에게도 따듯한 격려를 부탁드립니다!”

 

경기종료 선언과 동시에 두 사람을 향해 박수갈채가 쏟아졌다.

치토세는 박수를 받으면서도 관중석을 향해 정중히 고개 숙여 인사했다.

 

 

곧이어 철권 게임 내에서 비중 있고 인기가 많은 캐릭터를 사용하는 유저들의 대전이 차례차례 이어졌다.

어느 새 본선경기는 5회전까지 이르렀고, 이번엔 쿠로네코가 나갈 시간이 되었다.

 

이어지는 제 5 회전! 선수 입장이 있겠습니다. 홍코너, 전통 풍신류의 끝없는 잠재력을 보여주겠다! 카즈야를 사용하는 홀맨! 청코너, 내 앞길을 가로막는 모든 이들에게 타락천사의 무서움을 선물하겠다! 데빌 진을 사용하는 마츠도 블랙캣! 박수로 환영해주십시오!”

 

마츠도 블랙캣이라는 건 쿠로네코가 한창 아케이드 플레이어로 활동할 때 썼던 닉네임이다.

어쨌든 마츠도 블랙캣이라는 이 닉네임이 철권계에서도 유명하다는 걸 증명하듯, 쿠로네코가 중앙 무대에 모습을 드러내자 관중석에 있는 모든 사람들의 시선이 그녀에게 고정되었다.

두 유저가 자리에 앉자 게임이 시작되었다.

 

미시마 카즈야 VS 데빌 진

 

카즈야는 철권3을 제외한 모든 시리즈에서 등장한 오리지널 캐릭터로, 초기 주인공이자 풍신류를 사용하는 캐릭터 중 한 명이다. 철권 태그2에서는 게임 도중 악마로 변신할 수가 있는데, 이 형태를 데빌 카즈야라고 한다.

이에 맞서는 쿠로네코가 사용하는 데빌 진은 5편 히든 캐릭터로 처음 등장한 캐릭터로, 주인공인 카자마 진이 악마로 변한 형태라고 한다.

확실히 카즈야가 악마로 변신한 모습은 정말 전형적인 악마라는 느낌이 나지만, 진이 악마로 변신한 모습은 악마라기 보단 타락천사라고 하는 게 더 정확할 듯하다. 그 예로 등에 난 날개가 곧장 악마를 연상시킬 수 있는 박쥐 날개가 아닌 새의 날개와 유사하다. 게다가 캐릭터 자체도 상당 부분 인간의 모습이 많이 보인다.

자기 자신을 타락천사라고 칭하는 쿠로네코에게 잘 어울리는 캐릭터가 아닐 수 없다.

두 캐릭터의 기술 스타일은 상당 부분 비슷하기 때문에 사실상 판정 싸움이라고 보는 게 맞다.

물론 완전히 같은 건 아니기 때문에 자세히 들여다보면 기술면에서 많은 차이가 드러난다.

카즈야가 악마로 변신한 뒤 데빌 진에게 어퍼 두 방을 날렸다.

반면 데빌 진은 이를 간단히 회피하고 곧이어 풍신류의 간판 하단기라고 하는 나락 쓸기를 두 번 날렸다.(다른 캐릭터의 나락 쓸기는 맞으면 상대가 넘어지지만, 데빌 진의 나락 쓸기는 카운터 공격이 아니면 맞고 넘어지지 않는다.)

카즈야는 나락 쓸기를 맞기는 했지만, 곧이어 풍신권 2방으로 데빌 진을 띄워 공중 콤보를 날렸다. 그러나 너무 긴장한 탓인지 콤보 실수가 나오고, 이에 기회를 잡은 쿠로네코는 치토세처럼 풍신권 3방으로 상대를 띄워 공중 콤보를 맞혔다.

곧이어 쿠로네코의 데빌 진은 공중 콤보 중 상대를 붙잡아 바닥에 던져버린 뒤 광선 공격을 날렸다.

K.O. 쿠로네코가 이겼다.

 

데빌 진 마츠도 블랙캣 선수의 승리로 게임 종료! 과연 세계적인 아케이드 플레이어답습니다! 좋은 경기를 보여준 홀맨 선수에게도 뜨거운 박수 부탁드립니다!”

 

관중석에서 중앙무대를 향해 박수갈채가 쏟아졌다.

경기가 끝나고 쿠로네코가 대기실로 돌아왔다.

위풍당당하고 여유로운 모습은 그야말로 여왕 그 자체였다.

 

누가 세계적인 아케이드 플레이어 아니랄까봐. 정말 대단했어.”

겨우 이 정도로 놀라면 곤란해, 선배. 난 아직 내 진짜 실력의 20%도 채 쓰지 않았는걸.”

그래? 그럼 지난번에 치토세랑 했던 그 게임도 진짜 실력을 안 쓴 거였어?”

, 그건... 어쨌든 여긴 철권 대회장이니까 다른 게임 얘기는 가급적 꺼내지 말아줬으면 해.”

 

치토세와 게임한 일의 얘기만 꺼내면 천하의 쿠로네코라 할지라도 당황스런 모습을 감추지 못한다.

본인은 별로 신경 쓰지 않는다고 했지만, 내심 속으로는 뼈에 사무칠 만큼 깊게 담아두고 있는 모양이다.

 

 

곧이어 6회전부터 8회전까지 본선 경기를 거쳐 4명의 선수만 남았다.

그 중에는 -당연한 얘기지만- 쿠로네코와 치토세도 끼어 있었다.

운명의 장난인 듯, 쿠로네코와 치토세는 여기까지 오는 동안 단 한 번도 대전 상대로서 만나지 않았다.

 

치열한 본선을 거쳐 대회는 드디어 준결승전에 이르렀습니다! 준결승에 올라온 선수는 단 4! 이 중에서 살아남는 단 한 명만이 한국에서 우리나라까지 먼 길을 방문해주신 철권신 KneeJr 씨와 특별대전을 치르고 WCG에 국가대표로 출전할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됩니다!”

 

서로의 대전 상대를 정할 시간이다.

 

여기까지 올라온 4명의 출전자들은 이 작은 상자에서 제비를 뽑아 나온 번호에 따라 대전 상대가 지목됩니다. 홀수 번호를 뽑은 두 사람, 짝수 번호를 뽑은 두 사람이 대전하여 최후에 남는 2명이 결승전에 올라가게 됩니다.”

 

진행자가 관중석을 향해 제비가 들어 있는 작은 상자를 높이 들어 보이며 말했다.

곧이어 진행자는 출전자들에게 한 번씩 제비가 들어있는 상자를 내 밀었다.

번호가 정해졌다.

치토세는 1, 쿠로네코는 2번이었다.

여기서 이 두 사람이 다른 출전자들을 이기면 결승에서 맞붙는 것이다.

어째 대회가 쿠로네코 녀석이 바라는 대로 진행되고 있는 것 같다.

 

준결승 1회전, 엔젤의 치토세 양과 알리사의 CHANNELU 선수의 경기를 시작합니다!”

 

진행자의 외침과 동시에 치토세와 그 상대 선수가 자리에 앉았다.

그와 동시에 게임이 시작되었다.

상대 선수가 사용하는 캐릭터 알리사는 철권6 BR부터 등장한 캐릭터로, 무려 사이보그라고 한다. 그래서 온 몸에 전기톱이나 폭탄, 미사일에 부스터 등 별 희한한 무기와 특수 장비들이 내장되어 있다. 게임 상의 알리사는 이 특이한 장비들을 이용해 적과 싸운다.

알리사의 돌진 공격이 치토세의 엔젤에게 명중했다. 이에 치토세는 당황하지 않고 침착하게 엔젤을 일으키며 횡 스크롤을 했다.

두 캐릭터는 잠시 멀리 떨어져 서로 횡 스크롤을 하며 기회를 엿봤다.

그러나 두 캐릭터의 대치는 엔젤의 선공으로 깨져버렸다. 이어 엔젤은 빠른 스텝으로 알리사에게 최대한 접근해 풍신권 다음 가는 강력한 공중 콤보 연결기 데빌 트위스터를 날렸다. 그 후 광선 공격과 공중 콤보를 맞추며 상대의 체력을 70% 가량 깎아놓았다.

 

, 레이지 모드를 만들어주지 않는 지능적인 플레이까지. 역시 내가 인정한 게이머는 뭔가가 다르군.”

 

모니터를 통해 치토세의 경기를 지켜보고 있던 쿠로네코가 감탄을 금치 못했다.

 

레이지 모드를 안 만들어준다? 그게 무슨 말이야?”

철권은 많은 역전의 역사를 갖고 있는 게임이지만, 그게 말이야 쉬운 말이지 그렇게 쉽게 나오는 것도 아니잖아. 저렇게 레이지 모드를 만들어주지 않고 기회를 엿보며 시간을 끌다가 한 번에 체력을 깎아버릴 수 있는 콤보를 날려주는 것도 철권의 주된 전술 중 하나야. 역전의 발판을 사전에 차단해버리는 거지.”

그렇구나.”

 

철권이라는 게임을 태어나서 처음 잡아본 치토세는 대체 이런 자세한 부분까지 어떻게 알고 있는 걸까? 정말 의문스러운 일이다.

어쨌든 치토세는 상대를 궁지에 몰아넣고도 방심하지 않고 하단, 중단 공격을 통해 얼마 남지 않은 알리사의 체력을 깎으며 천천히 게임을 진행했다.

이어서 엔젤이 날린 나락 쓸기가 들어가면서 게임은 치토세의 승리로 마무리되었다.

 

치토세 양의 승리로 게임 종료! 결승진출을 축하합니다. 어린 나이에 정말 대단하네요? 열심히 싸운 양 선수에게 뜨거운 박수 부탁드립니다!”

치토세! 치토세! 파이팅! 파이팅!!”

 

관중석에서는 박수가 쏟아져 나옴과 동시에 치토세를 향한 응원의 외침도 함께 퍼져 나왔다.

처음엔 의아한 눈빛으로 치토세를 바라본 사람들이었지만, 이렇게 모두의 눈을 즐겁게 해주니 어느 정도 응원할 마음이 든 모양이다.

치토세가 다른 사람들한테 응원을 받으니 나도 왠지 모르게 뿌듯해졌다.

 

이어서 준결승 2회전! 데빌 진의 마츠도 블랙캣 선수와 에디의 Mist 선수의 경기를 시작합니다!”

 

쿠로네코가 나갈 시간이다.

여기서 쿠로네코가 이긴다면 자연스레 치토세와의 복수전이 되는 거다.

 

잘 해.”

내 자존심이 걸린 문제라고. 잘하지 말래도 잘 할 거야.”

 

쿠로네코가 두 주먹을 불끈 쥐며 말했다.

나는 아야세가 두 눈의 동공을 풀 때가 가장 무섭다.

그 다음으로는 복수심에 불타오른 쿠로네코가 무섭다.

쿠로네코와 그 상대 선수가 자리에 앉자 게임이 시작되었다.

 

데빌 진 VS 에디 골도

 

쿠로네코에게서 얻은 짧은 지식에 의하면, 데빌 진과 같은 풍신류 캐릭터는 웬만한 적과 만나도 크게 상성을 타지는 않지만, 유독 에디 같은 카포에라 스타일의 캐릭터에게는 상성을 많이 타는 편이라고 한다.

물론 쿠로네코가 한 얘기를 전부 다 알아들을 순 없었지만, 그래도 쉽게 간추려보자면 쿠로네코에게 불리한 게임이라는 얘기가 된다.

게임이 시작됨과 동시에 데빌 진은 에디에게 최대한 접근하려고 과감히 대시했고, 이에 맞서는 에디는 데빌 진과 최대한 떨어지고자 백 대시를 했다.

에디는 마치 팽이처럼 제자리에서 빙글빙글 돌며 데빌 진에게 하단 공격을 날렸다.

처음 몇 방은 잘 방어하던 쿠로네코였지만, 역시 두드리면 열린다고 결국은 에디 유저에게 공중 콤보를 허용했다.

그렇게 공격을 맞다보니 데빌 진의 체력 게이지가 붉은 빛을 발했다. 이대로 가면 질지도 모르는데... 하지만 쿠로네코는 그렇게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데빌 진이 날린 회심의 데빌 트위스터가 에디에게 정확히 명중했고, 이어 광선 공격을 시작으로 공중 콤보가 들어갔다.

이어 공중 콤보를 전부 맞은 에디가 쓰러지자 데빌 진은 갑자기 자리에서 빙빙 돌기 시작하며 에디가 쓰러져 있는 곳까지 전진해 갔다.

이어 에디가 반격하기 위해 일어나는 그 순간, 데빌 진의 뇌신권과 흡사한 공격이 정확히 명중했고, 그 공격을 맞은 에디는 30% 이상의 체력을 남겨놓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단 한 번에 K.O 되었다. -나중에 안 사실인데, 이 기술의 이름은 진 귀신멸렬이다.-

모든 캐릭터에게 다 하나씩은 있다는 필살기라고 한다.

 

마츠도 블랙캣 선수의 역전승으로 게임 종료! 과연 세계적인 아케이드 플레이어답습니다! 아쉽게 진 Mist 선수에게도 뜨거운 박수 부탁드립니다!”

 

관중석에서 중앙 무대를 향해 박수갈채가 쏟아졌다.

대기실에서 모니터를 통해 지켜보던 나도 화려한 역전승을 보여준 쿠로네코를 향해 박수를 보냈다.

 

어느 새 G스타 주관 철권버스터즈는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살아남은 마츠도 블랙캣 선수와, 어린 나이에 처음으로 대회에 출전해 엄청난 실력을 보여주고 있는 코우사카 치토세 양의 결승전만을 남겨놓고 있습니다. 그럼 결승전에 임하기 전에 두 선수와 인터뷰를 나눠보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마츠도 블랙캣 선수 나와 주세요!”

 

진행자의 멘트가 끝나자 쿠로네코가 아케이드 기판 좌석에서 일어나 무대중앙으로 나아갔다.

 

마츠도 블랙캣 선수의 연전연승을 지켜본 분들은 역시 기대를 저버리지 않는다는 평가들을 해주셨는데요. 이번 결승전에서 만나게 된 코우사카 치토세 양에 대해선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경쟁상대죠.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닙니다. 상대가 누구든 단지 최선을 다해서 싸울 뿐입니다.”

 

2병 쿠로네코 답지 않은 짧고 굳건한 멘트였다.

물론 공적인 자리이기 때문에 적당히 자제했겠지만.

 

, 짧고 굳건하고 강직한 인터뷰에 감사드립니다. 다음은 이에 맞서는 코우사카 치토세 양과 인터뷰를 나눠보겠습니다. 나와 주세요!”

 

내 옆에 멍하니 앉아 있던 치토세는 자신의 이름이 불리자 서둘러 대기실에서 무대 중앙으로 나갔다.

 

어린 나이에 대회에 출전해서 엄청난 실력을 보여주고 있는 치토세 양에게 많은 철권 팬들의 기대가 집중되고 있습니다. 이렇게 큰 무대에 나왔는데, 어때요. 긴장되지 않나요?”

, 전혀요!”

정말 씩씩한 대답이군요. 만약 결승전에서 승리한다면 제일 먼저 누구를 만나서 기쁨을 나누고 싶나요?”

아빠요!”

 

일말의 생각도 망설임도 없이 바로 아빠라고 하다니.

하여튼 치토세의 파더콤은 못 말린다.

 

지금 아빠가 치토세 양을 지켜보고 계시나요?”

, 여기 계세요.”

치토세 양 아버님, 혹시 안 계십니까?”

 

여기서 뜬금없이 왜 나를 찾는 거야?

갑자기 받은 부름에 다급해진 나는 서둘러 대기실에서 무대 중앙으로 나갔다.

그러자 관중석에 있는 사람들의 모든 시선이 한꺼번에 내게로 쏠렸다.

, 쪽팔려 죽겠네.

 

, 어디 계시나 했더니 아버님도 출전자 중의 한 분이셨군요? 잠시 인터뷰 좀 부탁드려도 괜찮으시겠습니까?”

, 좋으실 대로.”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본선에서 다른 선수들을 압도적으로 이기며 결승전까지 올라온 치토세 양에게 많은 관심과 기대가 쏟아지고 있는데요. 따님이 언제부터 이렇게 철권을 잘하기 시작했나요? 무슨 비결이라도 있는 건가요?”

사실 그렇게 게임을 좋아하는 애는 아닙니다. 애초에 철권을 잡아보는 게 오늘이 처음이에요. 비결이라든가 그런 것도 없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가족 중 누군가가 게임을 잘해서 유전된 것도 아니고, 굳이 얘기하자면 천부적인 재능이라고 할 수 있겠죠?”

 

철권을 대회에 나와 처음 잡아봤다는 내 발언을 들은 관중석의 모든 사람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하긴 사람들의 반응이 그런 것도 당연하다. 치토세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잡아보는 게임과 캐릭터로 결승전까지 단 한 번도 안지고 올라왔으니까.

 

이야, 천부적인 재능이라. 어린 나이에 이렇게 엄청난 실력을 보여주니 아버님도 참 따님이 자랑스러우시겠습니다.”

, . 그야 물론이죠.”

 

엄청난 게임실력이 없더라도, 치토세는 누구 앞에 내 놓아도 부끄럽지 않은 내 딸이다.

 

인터뷰에 응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드디어 많은 분들이 기다리고 또 기다리셨던 대망의 결승전이 시작됩니다! 결승전에 임하게 될 두 선수를 뜨거운 박수와 응원으로 맞아주시기 바랍니다!”

 

진행자의 멘트와 함께 관중석에서 무대 중앙을 향해 박수갈채와 응원소리가 퍼져나갔다.

나는 대기실이 아닌 관중석에 앉아 쿠로네코와 치토세 두 사람을 동시에 지켜보기로 했다.

 

결승전은 본선이나 준결승과는 달리 53승제로 개시됩니다. 그리고 결승전에서 승리한 선수는 한국에서 방문해주신 철권신 KneeJr 씨와 특별대전을 할 수 있게 됩니다. 여러분, 오늘 이 자리를 위해 먼 길을 걸음해주신 KneeJr 씨를 뜨거운 박수로 맞아주십시오!”

 

진행자가 멘트를 마치며 오른손으로 관중석을 가리켰다.

그러자 대회장 내 있던 모든 사람들의 시선이 진행자가 가리킨 방향으로 쏠렸다.

철권신이라고 불리는 유저는 사실 관중석에 앉아 선수들의 플레이를 지켜보고 있었던 거다.

KneeJr 라는 아이디를 쓰는 철권신 유저는 관중들의 시선이 자신에게 쏠리자 자리에서 일어나 사방의 모든 관중들을 한 번씩 바라보며 정중히 고개 숙여 인사했다.

이 유저는 크지도, 작지도 않은 키와 적당히 마른 체격에 뿔테 안경을 낀 지극히 평범한 외모를 가진 남성이었다.

KneeJr 가 다시 자리에 앉자 결승전이 시작되었다.

 

데빌 진 VS 엔젤

 

두 캐릭터는 외모와 성별만 다를 뿐, 같은 격투 스타일과 같은 기술을 공유하는 캐릭터다.

자칭 타락천사 쿠로네코와 러블리 엔젤 2세 치토세의 대결에 매우 잘 어울리는 캐릭터들이기도 하다.

하지만 캐릭터의 인지도나 인기, 성능 등을 따져보면 데빌 진이 엔젤보다 더 우월하다.

같은 풍신류끼리는 풍신권 싸움이 주를 이룬다. 어떤 풍신류 유저가 풍신권을 잘 때리고 콤보를 잘 넣는 테크닉을 보여주느냐에 따라 승패가 좌우된다.

첫 게임은 가볍게 풍신류와 나락 쓸기 콤보를 잘 넣은 쿠로네코의 승리.

두 번째 게임도 공중 콤보를 다 맞고 레이지 모드 상태가 된 치토세가 최후의 최후까지 몰아붙이며 역전을 노렸으나, 결국은 쿠로네코의 승리로 끝났다.

치토세를 상대로 두 번이나 이긴 쿠로네코의 표정에 아주 잠깐이지만 희미한 미소가 드리워졌다.

반면 치토세는 지고 있는 상황인데도 불구하고 의연함과 미소를 잃지 않고 있었다.

자칫 잘못하면 마지막이 될 수도 있는 세 번째 게임이 시작되었다.

이번에도 쿠로네코의 페이스인 듯, 밀고 당기는 접전 끝에 치토세의 엔젤이 레이지 모드 상태가 되었다.

모두가 쿠로네코의 승리를 점치고 있던 그 때, 예상치 못한 일이 벌어졌다.

 

우와, 말도 안 돼!!”

엔젤이 어떻게 저럴 수가 있지?!”

 

경기를 지켜보던 관중들이 큰 목소리로 외쳤다.

그런 반응이 나오는 게 당연하지. 공격 거리가 짧은 엔젤이 데빌 진에게 풍신권을 3방이나 날렸으니 말이다.

풍신권 3방에 이어서 엔젤은 데빌 진에게 공중 콤보를 날리고 곧장 땅으로 내 던져 광선 공격을 했다.

K.O. 치토세의 만회 승이었다.

쿠로네코에게 쭉 끌려가기만 하던 페이스를 다시 되찾아오는 순간이었다.

이어지는 4경기. 이제 완전히 손이 풀린 듯, 치토세는 진 귀신멸렬이나 열반 보내기 등 좀처럼 실전에서 쓰기 힘든 기술들로 쿠로네코를 농락하며 여유롭게 승리를 챙겼다.

그리고 바로 이어진 마지막 5경기. 서로 풍신권 이후 공중 콤보를 한 번씩 맞아준 두 캐릭터는 밀고 밀리는 치고 빠지기 싸움을 하며 서로를 레이지 모드로 만들었다.

양쪽 다 레이지 모드가 된 이상 단 한 번이라도 실수를 하면 바로 패배다.

관중석에 있는 모든 사람들은 양 손에 땀을 쥐고 잔뜩 긴장한 채 이 두 사람의 대결을 지켜보았다.

나 또한 엄습해오는 긴장감을 무시할 수 없었다.

엄습해오는 긴장감처럼 승부는 좀처럼 쉽게 나지 않는 듯... 했지만.

 

치토세 양의 역전승으로 경기 종료! 우승을 진심으로 축하합니다!”

 

치토세의 엔젤이 날린 회심의 연속 풍신권 공격으로 게임은 마무리되었다.

승자가 결정되자 관중석의 모든 사람들은 치토세를 향해 박수와 환호를 보냈다.

 

철권 대회 역사상 최연소 우승자의 탄생을 축하합니다!”

축하해!”

어린 나이에 대단하다!”

이제 최연소 여성 철권신의 탄생도 멀지 않았어!”

 

관중들은 자리에서 일어나 기립박수를 치며 치토세를 향해 온갖 찬사와 칭찬을 아끼지 않고 보냈다.

 

, 여러분! 훌륭한 경기를 보여준 마츠도 블랙캣 선수에게도 격려의 박수를 부탁드립니다!”

 

진행자의 멘트가 끝남과 동시에, 치토세를 바라보고 있던 관중들의 시선이 쿠로네코에게 쏠렸다.

 

괜찮아요! 게임인데 뭐 어때요?”

블랙캣 씨도 정말 훌륭했어요! 한 수 똑똑히 배웠습니다!”

앞으로도 꾸준한 활동 부탁드려요!”

 

쿠로네코를 향해서도 치토세에게 보내던 박수만큼이나 뜨거운 박수갈채가 쏟아졌다.

나 또한 명승부를 보여준 쿠로네코에게 아낌없는 박수를 보냈다.

반면 쿠로네코는 무표정한 얼굴로 중앙무대에서 내려와 내 옆 자리에 앉았다.

 

쿠로네코.”

 

두 번이나 치토세한테 졌으니 -비록 다른 게임이긴 하지만- 상심이 없진 않을 거다.

이럴 땐 무슨 말로 위로를 해줘야 할까?

 

정말... 못 당하겠는데?”

 

어떻게든 위로해주려고 했는데. 쿠로네코의 얼굴에 미소가 드리워졌다.

이 녀석, 의외로 상처회복이 빠르다.

 

선배 딸은 천재(天才)인 것 같아. 아까 선배가 한 말대로 이쪽에 천부적인 재능을 타고난 모양이야. 그러니까... 나 같은 범재(凡才)는 아무리 노력을 해도 당해낼 수가 없는 거지. 이젠 복수전 같은 건 관둘래. 인정할 건 인정해야지.”

너도... 잘했어. 비록 지긴 했지만, 그래도 잘했어.”

빈 말이라도 고마워.”

 

쿠로네코는 나를 바라보며 쓴웃음을 지었다.

나 또한 이에 맞춰 그녀를 향해 쓴웃음을 지어주었다.

 

 

대회에서 우승한 치토세는 예정대로 한국에서 온 철권신, KneeJr과 특별대전을 치르게 되었다.

 

여러분도 잘 아시다시피, KneeJr 씨는 초대 데빌 진 철권신이자 지난 2010년도 WCG 철권 세계대회 우승자 Knee 씨의 아들입니다. 역시 엄청난 명성을 가진 아버지의 아들답게 KneeJr 씨의 명성 또한 세계적으로 어마어마한데요. 여기서 특별대전에 임하게 된 KneeJr 씨와 잠시 인터뷰를 나눠보도록 하겠습니다.”

 

관중석의 모든 사람들의 시선이 무대 가운데에 있는 KneeJr에게 쏠렸다.

 

이번 대회를 어떻게 보셨습니까?”

이번에 나온 선수들 모두 정말 훌륭한 경기를 보여주었습니다. 그 중에서도 특히 최연소 우승자에 등극한 코우사카 치토세 양이 가장 유심히 지켜볼 만 했습니다. 저도 아버지처럼 많은 세계대회를 뛰어봤지만, 치토세 양 같은 상대는 세계 어디에서도 만날 수가 없었습니다. 이번 특별경기는 저에게도 기억에 남을 경기가 될 것 같네요.”

 

KneeJr라는 이 사람은 한국인치고는 우리말을 제법 능숙하게 구사했다.

 

, 드디어 여러분이 목이 빠지도록 기다리시던 철권 버스터즈의 마지막 이벤트! 한국의 철권신 KneeJr 씨와 이번 대회의 최연소 우승자 코우사카 치토세 양의 특별대전을 시작합니다!”

와아아아!!”

 

진행자의 멘트가 끝남과 동시에 중앙 무대를 향해 관중들의 환호성이 퍼져나갔다.

KneeJr이 사용하는 캐릭터는 쿠로네코와 마찬가지로 데빌 진이었다.

쿠로네코에게서 얻은 짤막한 지식에 의하면, KneeJr의 아버지 KneeWCG 2010년 대회의 우승자이며 풍신류 캐릭터인 데빌 진, 카즈야 등이 하향 패치 등으로 인해 많이 힘들던 시절, 데빌 진으로 철권신에 등극한 세계적인 철권 플레이어였다고 한다.

그 아들인 KneeJr 역시 풍신류 캐릭터로 철권신에 등극하며 아버지 못지않게 세계적으로 명성을 떨치는 유저란다.

이런 엄청난 가문과 대전을 하는 것도 영광스러운 일인데, 혹여나 치토세가 이기기라도 한다면... 나로선 감당이 안 될 것 같다.

두 사람이 아케이드 기판 앞에 자리를 잡고 앉음과 동시에 대전은 시작되었다.

데빌 진과 엔젤의 2차전인 셈이다.

시작과 동시에 두 캐릭터는 서로에게 과감히 접근해 풍신권 공방을 벌였다.

하지만 어느 쪽도 쉽게 상대에게 풍신권을 맞출 순 없었다.

이에 데빌 진은 안 되겠다 싶어 엔젤과의 거리를 벌린 뒤 광선 공격을 날렸다. 반면 엔젤은 횡스크롤 이동으로 광선 공격을 간단히 피한 뒤 빠른 속도로 접근해 풍신권을 시도했지만 안타깝게도 빗나가버렸다.

역시 철권신은 그렇게 호락호락하게 맞아주지 않는다.

똑같은 풍신권 공방의 연속으로 흘러가던 게임이었지만 잠시라도 긴장을 늦출 수는 없었다.

그렇게 게임시간이 30초 정도 흘렀을 때, 치토세의 엔젤이 날린 회심의 데빌 트위스터가 데빌 진에게 명중했다. 이어서 엔젤은 광선 공격 이후 공중 콤보를 맞추며 전세를 유리하게 이끌어갔다.

이에 질세라 KneeJr의 데빌 진도 엔젤에게 풍신권을 2방 맞추며 공중 콤보를 넣었다.

서로 강력한 콤보를 맞은 터라 쉽사리 접근하지 못했다. 그러던 순간, 엔젤의 횡 스크롤 이동 방향을 눈치 챈 데빌 진이 나락 쓸기를 날렸으나... 막혀버렸다!

나락 쓸기가 막히고 엄청난 딜레이를 감지한 치토세의 엔젤은 곧장 데빌 진에게 풍신권을 맞추며 공중 콤보를 날렸다.

하지만 치토세도 철권신을 상대로 많이 긴장했는지, 콤보 실수가 나와 데빌 진을 완전히 끝장내지 못했다. 결국 역전의 기회인 레이지 모드를 만들어줘 버린 거다.

이에 기회를 잡았다고 여긴 KneeJr는 치토세의 엔젤에게 나락 쓸기를 성공시키며 역전의 기회를 노리는 듯 했지만...

 

! 이럴 수가!”

어떻게 이런 일이!”

 

관중석에서 안타까움이 잔뜩 섞인 탄성들이 쏟아져 나왔다.

시간은 결국 데빌 진이 아닌 엔젤의 편을 들어주었다.

데빌 진이 엔젤에게 나락 쓸기를 맞추던 바로 그때, 하필이면 게임 제한시간이 다 지나버려 체력이 조금 더 많이 남아있던 치토세의 엔젤이 승자가 되었다.

 

시간은 결국 치토세 양의 손을 들어주었습니다! 치토세 양의 승리로 게임 종료!”

 

이겨버렸다.

설마 했지만 이겨버렸다.

치토세가 철권신을 이겼다.

 

여러분, 훌륭한 경기를 보여준 두 선수에게 뜨거운 박수를 보내주십시오!”

 

진행자의 멘트와 동시에 관중석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치토세를 향해 박수갈채를 보냈다.

승자가 됐으면 승리를 만끽해도 되는데, 치토세는 사람들이 박수갈채를 보내는 것엔 아랑곳하지 않고, 사람들을 향해 고개 숙여 정중히 인사했다.

뭐 이것도 자기 나름대로 자신을 축하해주는 사람들에 대한 예의겠지.

 

오늘 이 시간을 위해 와주신 KneeJr 씨와 인터뷰를 나눠보겠습니다. 비록 안타깝게 지긴 했지만 정말 훌륭한 경기였습니다. 경기 내용에 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진행자의 멘트와 동시에 회장 내 모든 사람들의 시선이 KneeJr에게 쏠렸다.

 

, 정말 잊을 수 없는 경기였습니다. 게임하는 내내 긴장을 멈출 수가 없었죠. 시간 초과로 진 것만 해도 감지덕지해야할 것 같아요. 만약 치토세 양의 콤보가 실수 없이 말끔히 들어갔다면 제가 완전히 졌을 지도 모릅니다. 이번 일을 계기로 철권의 무궁무진한 재미를 더욱 뼈저리게 느낄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제 경기를 보러 오신 모든 분들과, 저와 훌륭한 게임을 해 준 치토세 양에게 고마움을 표현하고 싶습니다. 치토세 양, 최연소 여성 철권신 등극을 진심으로 축하합니다!”

 

KneeJr의 솔직한 감상과 치토세를 향한 진심어린 축사가 끝나자, 모든 관중들은 훌륭한 경기를 보여준 두 사람을 향해 기립박수를 보냈다.

나와 쿠로네코 또한 그랬다.

박수를 치던 내가 무심코 옆에 있는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니, 치토세를 바라보며 다정한 엄마의 미소를 짓고 있었다.

 

 

긴장의 연속이었던 철권 대회가 끝나고, 우리는 남은 시간 동안 가을 코미케를 구경하기로 했다.

오늘의 주인공인 치토세를 위해, 우리는 치토세가 좋아하는 만화가 잔뜩 있는 층을 돌았다.

아야세 못지않게 반짝이는 치토세의 두 눈이 스타더스트 위치 메루루의 부스를 향해 시선을 고정했다.

아니나 다를까. 이 부분은 자기 고모(키리노)를 닮은 모양이다.

 

저기 가보고 싶니?”

! 저 메루루 무지무지 좋아해요! 아줌마, 같이 가 봐요!”

, 잠깐만!”

 

치토세는 쿠로네코의 왼손을 꽉 잡고 메루루 부스로 달려갔다.

두 사람이 저러고 있으니 꼭 사이좋은 모녀 같다.

나도 빠지기는 뭐하니까 서둘러서 쫓아가볼까.

 

우리가 메루루 부스에 도달하자, 메루루 코스튬 플레이를 한 점원이 맞이해주었다.

 

안녕하세요! 스타더스트 위치 메루루 부스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우와! 진짜 메루루 같아요!”

감사합니다! 어떤 걸 찾으시나요?”

 

치토세는 부스에 진열된 물건들을 이리저리 둘러보기 시작했다.

동인잡지에, 피겨에, DVD, 코스튬에... 과연 메루루 관련 물품은 없는 게 없구나.

여러 물건들을 둘러보던 치토세의 시선이 피겨에서 멈췄다.

 

아빠, 저 이 메루루 인형이 갖고 싶어요.”

그래? 이 메루루 피겨는 얼만가요?”

선배, 잠깐만.”

 

피겨를 사려던 나의 손을 쿠로네코가 잡았다.

 

? ?”

그거, 내가 계산할게.”

네가? 아냐, 이런 건 아빠인 내가...”

괜찮으니까 이리 줘. 내가 계산할게.”

 

내 손을 붙잡고 있는 쿠로네코의 손엔 무슨 이유인지 힘이 잔뜩 들어가 있었다.

 

, 그래? 알았어. 고맙다.”

, 3,400(한화 약 37000)입니다.”

 

쿠로네코는 지갑에서 돈을 꺼내 계산한 다음 치토세에게 피겨를 건네주었다.

 

, 아줌마가 주는 선물이야.”

우와! 아줌마 감사합니다!”

소중히 간직하렴.”

! 소중히 간직할게요!”

 

쿠로네코는 피겨를 선물 받고 기뻐하는 치토세의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자식이 선물을 받았으니 부모인 나도 고마움을 표현해야겠지?

 

쿠로네코, 고맙다.”

고마워할 거 없어. 그냥 내가 사주고 싶어서 사준 거야.”

네가 자상한 애인 줄은 알고 있었지만, 설마 이 정도일 줄은 몰랐어.”

그럼 나를 대체 어떻게 생각한 거야? 난 자상함 빼면 시체라고.”

크큭, 어련하시려고.”

 

이렇게 자상한 애를 단순히 중2병 환자라고만 생각했던 나 자신이 바보 같이 여겨진다.

 

우리 다른 데 또 가 봐요!”

그럴까?”

 

쿠로네코는 치토세의 손을 잡고 다른 만화 부스를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서로의 손을 잡고 있는 두 사람에게서 나를 향해 행복함의 오로라가 느껴졌다.

비록 손을 잡고 있는 치토세가 자신의 친 자식이 아닐 지라도, 연적(戀敵)의 자식일 지라도...

지금의 쿠로네코가 짓고 있는 표정은 너무나도 행복해보였다.

저 검은 빛의 타락천사가 아야세 못지않게 행복한 표정을 짓는 모습을 보는 게 얼마만의 일이더라?

, 지금 그런 건 신경 쓰지 말자. 이 순간을 마음껏 즐기는 거다.

아무리 아야세라도 이럴 땐 봐주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