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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터블 후일담 창작 단편 8. 약혼은 목숨을 걸고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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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터블 후일담 창작 단편 8. 약혼은 목숨을 걸고

히아신스v 2024. 1. 20. 13:31

이번 팬픽은 쿄스케 & 아야세 부부의 결혼 전 이야기를 다룹니다. 시점은 쿄스케의 시점으로 진행되며, 시간적 시점은 현재 -> 과거 -> 현재로 돕니다. 원작과 비교해 다소 어색하거나 다른 설정들이 나오더라도 팬픽이니 그러려니 하고 재밌게 감상해주시기 바랍니다.

 

 

추운 바람이 뼈 속까지 스며들어오는 초겨울의 아침.

스탠드 옆에 있는 자명종 시계를 보니 아침 8시다.

평소 같으면 아침식사를 마치고 회사로 향하고 있을 시간이다. 하지만 황금주말의 시간을 황급히 보낼 순 없지.

오랜만에 맞는 휴일이니 간만에 늦잠이나 자볼까... 했는데, 그냥 일어나자.

 

으이구, 춥다!”

 

겨울이 오더라도 온도가 영하로 내려가지 않는 일본이라지만, 추운 건 추운 거다.

너무 추운 나머지 이불 밖으로 나가기 싫다.

그렇지만 이대로만 있으면 심심한데. 뭐라도 보는 게 좋지 않을까?

 

간만에 앨범이나 봐볼까.”

 

왜 굳이 앨범을 보잔 생각이 들었는지는 묻지 않아줬으면 좋겠다. 그냥 보고 싶어서 보는 거니까.

아아, 앨범을 꺼내보려고 이불 밖으로 나오니... 춥다. 빨리 다시 들어가자.

겨울철에 하는 제일 고통스러운 일이 이불 밖에서 나가는 것이라던데 과연 정설이다.

나는 곧 장롱 위에 있는 사진앨범을 갖고 고치를 짜는 누에처럼 이불 속으로 꼼지락거리며 들어갔다.

앨범 첫 장을 피니 나와 아야세의 결혼식 사진이 나왔다.

지금도 눈부시게 예쁘지만 이때의 아야세는 그야말로 여신이라는 말이 절로 튀어나올 정도로 빼어난 미모를 자랑했다.

하기야, 너무 예뻤던 탓에 당시의 나는 여신이라는 말을 입에 달고 다녔다.

 

찰칵!

한창 사진 앨범을 보던 그때, 방문이 열리며 누군가가 살며시 들어왔다.

발소리가 작은 걸보니 아야세는 아니다.

 

아빠, 새 나라의 아저씨는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나는 거랬어요.”

 

나보고 아빠라고 부르고, 새 나라의 아저씨는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나는 거라며 깨우러 오는 사람은 우리 집에 단 한 명이다.

나와 아야세 사이에서 태어난 천사, 코우사카 치토세다.

 

일어나세요! 주말이라고 늦잠 주무시면 안 돼요!”

 

치토세는 침대 위로 올라와 내가 덮고 있는 이불을 걷어내기 시작했다.

치토세는 청초한 외모와 순수한 성격부터 나이에 맞지 않는 어른스러움까지, 많은 부분 아야세를 빼닮아있다. 이제 초등학교 1학년 밖에 안 됐건만, 하는 행동이나 생각하는 걸 보면 나이를 먹을 만큼 먹은 나나 키리노보다도 훨씬 어른스럽다.

어떻게 된 어린 아이가 아침잠도 없는 지, 말을 할 수 있게 된 때부터 단 한 번도 빼놓지 않고 아침마다 한참 꿈나라에 가 있는 나를 깨우곤 한다.

또한 아야세처럼 범죄냄새가 나는 발언을 안 하는데다 오지랖이 넓은 듯 대인관계도 좋다.

이 정도면 완벽하겠거니 싶지만... 내가 시스콤이었고 키리노가 브라콤이었던 것처럼, 치토세도 파더콤이라는 콤플렉스를 갖고 있다.

그 증거로 언제나 아빠랑 결혼할래요. 라는 말을 입에 달고 산다.

그것도 모자라서 누군가가 아빠가 좋아 엄마가 좋아 라고 물어보면 길게 생각하거나 고민할 것도 없이 아빠가 좋다고 칼 대답을 한다. 자기 스스로 파더콤을 인증하고 다니는 셈이다.

그렇다고 해서 엄마인 아야세와 사이가 안 좋은 건 또 아니더라.

나한테 하는 것처럼 대놓고만 안 할 뿐, 아야세에게도 나름대로 조용한 방법으로 애정표현을 한다.

이처럼 지금은 성장의 일환으로 보고 그러려니 한다. 누구나 다 여러 약점이나 결점을 갖고 있기 마련인데, 이만한 결점 밖에 없는 게 대단한 거 아닐까?

 

아빠 안자거든? 그리고 앨범 구겨지니까 그만하렴.”

? 앨범이요?”

오랜만에 사진 앨범 보고 있었는데, 네가 계속 안 내려가고 그러고 있으면 다 구겨지겠다.”

알았어요. 그럼 저도 같이 볼래요.”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치토세는 곧장 이불 속으로 들어와 내 옆에 엎드려 누웠다.

 

?”

왜 그러니?”

제가 없어요.”

어디? , 여기?”

 

나는 치토세가 손가락으로 가리킨 사진을 봤다.

무슨 사진인가 했더니, 결혼식 후 양가 부모님과 함께 만찬을 나누는 자리에서 찍은 사진이었다.

 

할아버지, 할머니, 외할아버지, 외할머니, 아빠, 엄마는 계시는데 왜 저는 없어요?”

없는 게 당연하잖니. 이건 8년 전 사진이야. 넌 이때 태어나지도 않았어.”

거짓말! 저만 빼놓고 몰래 찍으신 거 아니에요?”

아니라니까 그러네. 어쨌든 넘긴다.”

, 잠깐만요!”

 

난 치토세의 말을 정중히 무시하고 다음 장으로 앨범을 넘겼다.

, 또 하나 오래 전에 찍은 사진이 나왔다.

사진에는 유카타 차림의 나, 아야세, 키리노, 카나코가 나와 있었다.

날짜를 보아하니... , 그때 찍은 사진이구나.

사진을 다시 보니 나도 모르게 코웃음이 쳐졌다.

이 사진을 찍을 당시 있었던 일이 생각났기 때문이다.

 

? 아빠 왜 그러세요?”

아니, 그냥 좀. 다음 장으로 넘길까?”

잠깐만요. 아빠, 여기 이 분은 누구세요?”

 

나의 시선이 치토세가 가리킨 방향에 정확히 멈춰 섰다.

붉은 빛 트윈 테일, 옆에 있는 아야세와 키리노에 비교하면 약간 유아스러운 체형을 가진 이 여자는...

누구긴 누구겠니.

 

, 카나코라고 네 엄마 친구야. 그 요즘 한창 월요일 화요일 저녁 8시에 방송되고 있는 드라마 있지? 제목이 뭐였더라. , 아이돌과 매니저의 부적절한 관계였던가? 하여튼 거기 나오는 양 갈래 머리 아가씨 있잖아. 바로 그 사람이야.”

! 여자 주인공! 아빠 대단하시다? 유명배우랑 친구에요?”

나보단 네 엄마가 더 친구였지. 이렇게 다시 보니까 갑자기 옛날 일이 생각나네.”

옛날 일? 무슨 일이 있으셨는데요?”

듣고 싶니?”

, 들려주세요.”

 

그 옛날 일이라는 건 나와 아야세가 강제약혼을 했던 일을 말한다.

키리노와 카나코가 만든 어떤 사건 -그다지 사건이라고 할 만한 일은 아닌 것 같지만- 때문에 우리 두 사람은 이른 나이에 강제약혼을 하고 결혼해야 했다.

물론 결혼한 걸 후회하는 건 절대 아니지만.

 

 

때는 8년 전 학교 여름방학 때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의 나는 한창 취업을 앞두고 있는 취업준비생이었고, 아야세는 고등학교 3학년이었다.

대학의 방학은 초중고보다 빨리 시작하기 때문에 훨씬 길다. 그것 때문인가 특별히 할 일이 없으면 지루하게 시간을 보내기 마련이다.

 

아이고, 지루하다!!”

 

키리노가 맡긴 에로게임을 할 때도 지루했지만, 이런 식으로 아무 것도 안하고 있을 때도 지루하긴 매한가지.

할 일 없이 더운 방 안에서 서성이던 나는 그동안 취업준비 때문에 못잔 잠이나 자려고 침대에 드러누웠다.

 

♩♪♬~

책상 위에서 음악소리가 들려온다.

, 핸드폰 벨소리구나. 누가 전화했을까?

나는 침대 위에서 제대로 일어나지도 않은 채 엉금엉금 기어가 핸드폰 폴더를 열고 송신자를 확인했다.

 

! 아야세 전화다!”

 

아야세가 전화했다는 사실을 알자마자 나는 나 자신도 모르게 양쪽 입 고리를 위로 올렸다.

이 세상에 단 한 명뿐인 나의 천사가 나를 부르고 있다.

나는 곧장 폴더를 열고 전화를 수신했다.

 

여보세요?”

, ... 오빠. 전데요.”

, 듣고 있으니까 얘기해봐.”

 

뜨아악! 무슨 일 때문인지는 모르지만 전화하면서 쑥스러워하는 것도 왜 이리 사랑스러울까?

 

이번 주 안에 다른 볼 일 있으세요?”

아니, 없는데. ?”

 

아야세가 무슨 얘기를 할지는 다 알고 있었지만, 나는 일부러 모른 척했다.

 

시간 있으면... 방학도 했겠다, 같이 바닷가 펜션에 여행가지 않을래요?”

“...뭐라고? 방금 뭐라고 했니?”

, 그러니까... 방학도 했으니까 같이 바닷가 펜션에 여행가자고요! 싫어요?”

 

싫을 리가 있겠니.

 

아니, 물론 좋지!”

. 그럼 내일 아침 9시에 마을 공원 앞에서 만나요.”

 

공원에서 만나자는 약속을 잡음과 동시에 우리 두 사람은 전화를 끊었다.

강렬한 태양열이 내리쬐는 이 여름에, 바닷가 펜션으로, 그것도 러블리 앤젤 아야세와 단 둘이 여행이라.

누구라도 열광하고 흥분하지 않을 수 없을 거다.

그래, 우리 단 둘만의 데이트였다면 그랬겠지.

 

 

바닷가로 향하는 버스 안, 나는 도박하다 모든 걸 다 잃은 평범한 샐러리맨처럼 인상을 찌푸리고 좌절하는 표정을 지은 채 멍하니 좌석에 앉아 창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에휴...”

 

나는 버스 바닥이 내려앉을 만큼 큰 한숨을 쉬었다.

아야세와의 달콤 살벌한 데이트를 바라고 있던 나의 소망은 보기 좋게 깨어졌다.

왜냐하면...

 

! 이 초 귀여운 여동생님께서 따라가 주시는데 왜 한숨을 쉬고 난리야?”

이 초 귀여운 아이돌님도 계시는데 기운 빠지게 뭐하는 거야?”

 

방해꾼들을 달고 왔기 때문이다...!!

내가 그 전화를 받고 있었을 때부터 일이 이렇게 꼬여버렸다.

키리노 이 녀석은 하필이면 그 때 집에 있어갖곤. 벽을 통해 내가 아야세랑 전화하면서 하는 말 하나하나를 다 들었다고 한다.

카나코는 아야세가 불러서 왔다.

그러고 보니, 애초부터 아야세는 단 둘이 가자는 말은 안 했었다.

얘기를 제대로 듣지도 않고 단 둘이 가는 걸로 오해해버리다니, 나도 아직은 통찰력이 부족하구나.

 

내가 다 듣고 있을 줄은 꿈에도 몰랐지? 너만 재미 보게 할 순 없다고. 그리고 아야세를 너랑 단 둘이 보냈다간 무슨 짓을 할지 어떻게 알아?”

맞아, 맞아. 우리 절친한테 나쁜 짓 하는 꼴은 두 눈 뜨고 절대 못 보지.”

내가 무슨 색골영감인 줄 알아?! 그리고, 아야세가 걱정 되서 따라왔다는 애들의 꼴이 그게 뭐냐?”

 

억지로 여행에 따라오는 사람치고 안 즐기는 사람은 없다.

이 두 방해꾼들은 바닷가 펜션 여행에 맞춰 옷, 세면용품, 발리볼 등 잡다한 즐길 거리 등을 꼼꼼히 준비해왔다.

너희는 누가 봐도 여행 즐기러 따라온 거 맞아.

 

, 그거야... 이유야 어쨌든 여행 가는 거니까.”

그럼 맨몸으로 가리?”

세 사람 다 이제 그쯤 해 둬요. 이왕 여기까지 온 거 신나게 즐겨야죠.”

 

서로를 바라보며 들개처럼 으르렁거리고 있는 우리들을 아야세가 중간에 끼어 중재했다.

역시 아야세는 천사다.

 

그럼, 그래야지. 그런데 누가 자꾸 즐거운 여행길의 분위기를 흐려놔서 말이야.”

지가 엄청 횡재했다는 걸 몰라. 확 그냥 입에다가 줄담배를 물려버릴까?”

 

키리노와 카나코는 돌연 태도를 바꿔 아야세의 말에 수긍하는 척, 하며 나를 비꼬았다.

정말이지, 아야세는 대체 이 악마들하고 어떻게 절친이 된 걸까? 갑자기 궁금해진다.

 

 

그렇게 우여곡절 끝에 펜션에 도착했다.

MARINES 라는 이름의 펜션은 우리들 앞에 펼쳐진 푸른 하늘보다 더 푸른 바닷가와 완전히 상반되는 흰색으로 도배되어 있었다.

하지만, 뭐랄까. 어째 좀 조용하다.

새로 생긴 펜션이라 그런가 아니면 우리가 너무 빠른 시기에 와서 그런가는 몰라도, 바닷가치곤 인적도 많지 않고 드넓은 평판처럼 고요했다.

 

얘들은 아직도 멀었나?”

 

나는 모래사장에 돗자리를 깔고 적절히 자리 잡고 앉아 여성진이 오기를 목이 빠져라하며 기다리고 있었다.

남자는 옷 갈아입는데 그렇게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기 때문에 언제나 여자보다 먼저 나와서 기다려야 한다.

 

! 매니저! 멍하니 있지 말고 이쪽으로 시선 돌린다, 실시!”

초초 귀여운 여동생님 가신다!”

 

멍하니 있는 나를 향해 고함치는 악마 두 마리의 목소리가 들렸다.

나는 곧 목소리가 들린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비키니 수영복으로 갈아입은 키리노와 카나코가 내 쪽으로 뛰어오고 있었다.

오호라. 별로 기대는 안 했지만 내 눈도 나름대로 호강하는구나.

카나코는 약간 유아스러운 체형과 의외로 잘 어울리는 빨간 비키니 차림이었다. 머리도 빨갛게 염색하더니 빨간색이 참 좋은 모양이다.

반면 키리노의 비취빛 비키니는 과거보다 훨씬 성장한 몸매와 잘 어우러져 한층 매력을 돋보였다. 내 동생이지만 제법인데?

 

어때? 어울려? 어울리지? , 네가 어울린다는 말 말고 또 무슨 말을 할 수 있겠어?”

애초부터 안 어울린다고 못하잖아.”

 

어떻게 되는지 내가 그런 걸 어떻게 아냐.

너희들 덕분에 내가 요즘 말을 못해요, 말을.

 

오빠! 얘들아!”

 

바로 그 때. 두 악마들에게 둘러싸여 있는 이 불쌍한 중생을 구원하는 아름다운 천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왔다!!”

 

나는 방금 전까지만 해도 찌푸리고 있었던 인상을 0.5초 만에 활짝 펴고 목소리가 들려온 방향을 향해 시선을 고정했다.

아야세가 우리가 있는 곳을 향해 왼손을 흔들며 뛰어오고 있었다.

뜨아아악... 과연 아야세다. 역시 천사야.

아야세의 순백의 비키니는 세월이 흘러 매력적으로 성장한 바디라인과 잘 어우러져 보는 나로부터 절로 감탄사가 흘러나오게 만들었다.

지난번에 바닷가에서 단 둘이 데이트할 때보다 더 황홀한 감동이 내 전신을 마비시켰다.

그때도 무지무지 예뻤지만, 지금의 아야세는 천사 그 이상이다.

악마 둘이 딸려온 게 조금 걸리긴 하지만 그래도 오길 잘했다.

 

! 여기도 좀 보란 말이야!”

우리 절친 이상한 눈으로 보지 마!!”

 

키리노와 카나코가 나를 향해 고함이란 고함을 다 질러댔다.

아무리 떠들어봐라. 하나도 안 시끄럽다.

지금 내 눈엔 바로 앞까지 달려온 천사를 제외하고 다른 건 아무 것도 안 보인다.

 

너무 오랜만에 입는 거라 감촉이 좀 어색하네요? 어때요 오빠. 어울려요?”

그럼! 물론이지!! 어울리고말고!!!”

사실 전 키리노보다 몸매가 좀 별로라... 보이기 좀 민망했거든요. 그래도 어울린다니 다행이네요.”

 

아우, 겸손해도 어쩜 이렇게 겸손할까? 정말 귀여워 죽겠다.

사실 아야세의 몸매는 키리노랑 견줘도 별로 뒤질 게 없다. 나올 곳은 잘 나와 있고 들어갈 곳도 잘 들어가 있다.

이 정도면 충분히 잘 빠졌는데 어디가 별로라는 걸까?

 

! 모였으면 됐으니까 이제 놀자!”

, 잠깐만!”

잠깐만이라고 할 시간도 아깝다고! 다 같이 바닷가로 돌격!!”

너희가 무슨 애들이냐!”

 

키리노와 카나코는 아야세의 양손을 단단히 붙잡고 뛰어가 거침없이 바닷가로 뛰어들었다.

, 기다리는 시간도 끝났고. 혼자 안 놀기도 그러니 놀이 감이나 좀 제공해줘야겠다.

난 돗자리 위에 아무렇게나 올려뒀던 발리볼을 챙겨들고 여성진이 있는 쪽으로 다시 돌아갔다.

 

 

우리들은 장소를 모래사장으로 옮겨 두 팀으로 갈라져 비치발리볼을 하기로 했다.

나와 아야세가 한 팀, 키리노와 카나코가 한 팀이었다.

 

, 간다!”

!

 

키리노가 먼저 첫 번째 토스를 날렸다.

 

제가 받을 게요!”

!

 

아야세가 간단히 받아쳐 카나코 쪽으로 넘겼다.

 

제법인데?”

!

 

카나코가 받아친 토스가 이번엔 내 쪽으로 넘어온다.

 

아야세, 한 번 꽂아줘!”

!

!”

 

나는 카나코의 토스를 아야세 쪽으로 쳐 넘겼다.

 

간다!!”

!

 

아야세는 공이 눈앞으로 떨어져 내려오자 제자리에서 펄쩍 뛰어올라 스파이크를 때렸다.

아야세의 스파이크를 맞은 공이 카나코 앞으로 떨어졌다.

 

어딜!”

!

 

카나코는 바로 제자리에서 몸을 던져 공을 키리노 쪽으로 튕겨냈다.

 

나이스 토스, 카나코! 좋아, 이번엔 내 차례다!”

!

 

카나코의 토스를 받은 키리노가 아야세의 왼편을 향해 스파이크를 때렸다.

!

 

아야세는 몸을 던져 가까스로 키리노의 스파이크를 튕겨냈다.

그런데...

 

아야야... , 수영복에 모래가 잔뜩 들어갔어요.”

 

나는 은근히 요염하게 넘어져 있는 아야세한테서 좀처럼 시선을 떼지 못했다.

장담하건대 누구라도 못 뗄 거다.

!!

 

끄악!!”

 

아야세한테서 시선을 떼지 못하던 내 얼굴의 왼쪽 뺨을 향해 발리볼이 꽂혔다.

 

미안! 실수야 실수! 안 아프지? 나름대로 살살했으니까.”

크크크큭, 네가 지금 딴 데 신경 쓸 처지야?”

 

내 왼쪽 뺨에 발리볼을 꽂은 범인은 키리노였다.

그 옆에 있는 카나코는 내가 발리볼에 맞는 모습을 보곤 실실 쪼개고 있었다.

이 녀석들, 역시 너희들은 악마야.

하지만 이 악마들을 신경 쓰고 있을 시간은 없다.

넘어져 있는 천사가 더 걱정되니까.

 

괜찮아?”

, 괜찮아요. 살짝 넘어진 것뿐이에요.”

괜찮으면 빨리 다시 하자고!”

닭살 돋는 영화는 제발 다른 데 가서 찍어!”

그래그래, 알았다. 간다!”

 

질투나면 자기들도 빨리 애인 만들던가.

어쨌든 우리들은 혹여나 서로 다칠까봐 스파이크 없이 토스만 하기로 했다.

 

그런데 말이야, 우리도 이제 3학년인데 너희는 나중에 학교 졸업하고 뭐할지 정했어?”

!

 

키리노가 공을 토스하면서 말했다.

 

난 졸업해도 그냥 이 일 할래! 이미 TV를 통해서도 얼굴이 많이 알려졌고, 또 아이돌 일 하는 게 마음 편하기도 하고! 아야세는 어쩔 거야?”

!

 

카나코가 아야세에게 물었다.

 

? 글쎄, 아직 잘은 모르겠어. 하고 싶은 일은 많은데, 그 많은 일 중에 뭔가 하나를 선택하기가 좀 그래서.”

!

 

보통 장래희망 같은 건 중학교 3학년 때 미리 정해놓고, 고등학교 때 장래희망을 이루고자 노력하는 게 정상이건만, 아야세는 아직까지도 정해놓은 게 없는 모양이다.

하긴, 나도 학교 다닐 때 그랬으니 이상할 건 없지만.

 

그럼 키리노는 뭐할 건데?”

!

? 모델 쪽에서 계속 일할까봐. 그러다가 나중에 나이 좀 들면 디자이너로 전직해야겠지? 모델이라는 게 원래 젊을 때만 잠깐 반짝이는 직업이잖아.”

!

 

성격은 악마처럼 사악한 녀석이 장래희망 하나는 잘 잡았네.

이런 점에 있어선 키리노 이 녀석이 나보다 더 성숙해 보인다.

 

오빠는 뭐하실 거예요?”

!

 

아야세가 내게 질문했다.

 

? ... 글쎄. 일단 취직부터 할 생각이야. 아무래도 기업에서 일하는 게 체질에 잘 맞는 것 같으니까 그런 쪽으로 가려고.”

!

, 네가 그러면 그렇지. 나처럼 좀 꿈을 가져보라고. 언제까지 평범남으로 살래?”

!

 

평범남이라서 미안하다. 난 평범한 게 좋다.

모름지기 인간은 평범하게 사는 게 제일이란다.

자신한테 가장 맞는 일을 하며 살아야 삶의 보람과 즐거움을 느끼지.

애초부터, 그렇게 핀잔만 들이댈 거면 남의 장래희망 같은 건 왜 물어보는 건데?

 

너 설마, 7년 후에 진짜로 과장이 되는 건 아니겠지?”

!

 

예전에 내가 10년 후에 과장이 될 거란 희대의 드립을 친 카나코의 입에서 또 과장이라는 말이 나왔다.

하기야 그땐 철없는 중학생이었으니 그랬겠지만, 이젠 좀 알았으면 좋겠다. 사실 요즘 같은 세상에 나이 30도 안 돼서 과장이면 그건 그야말로 능력자다. 30대가 대리를 하는 마당에 30도 안 돼서 과장을 한다는 건... 정말 드라마 같은 일이 일어나지 않고서야 쉬운 일이 아니니까.

TV 드라마 같은 곳에선 20대 중반을 겨우 넘긴 사람이 사장이나 실장 같은 걸 하고 있는 경우가 흔한데, 나는 거기에 대고 짧고 간략하게 한마디 해줄 수 있다.

그게 어디 말이나 되냐?

그런 드라마를 보고 남자들에게 환상을 품는 여자들에게도 기꺼이 한마디해줄 수 있다.

꿈 깨셔. 라고.

 

과장이 되던 안 되던, 난 그냥 평범하게 사는 게 마음 편하고 좋아. 화려한 것보단 소박한 게 취향이거든!”

!

, 누가 보면 꿈 없는 불쌍한 중생으로 알겠다!”

!

 

남들 눈에 불쌍한 중생으로 보여도 어쩌랴.

내가 그 길을 가겠다는데 그 누가 막으랴.

 

얘들도 참, 그래도 그러는 편이 제일 오빠답고 좋잖아. 그리고 나도 오빠처럼 평범하고 소박하게 살았으면 좋겠는 걸.”

!

아야세 너, 저 평범남이랑 사귀더니 무기력해지는 병에라도 걸린 거 아냐?”

!

매니저, 어떻게 책임질 거야? 네가 아야세를 다 배려놨어!”

!

평범한 게 죄냐?”

!

 

이 두 마리 악마들은 왜 아까부터 내 마음 속을 박박 긁는 말만 하는지 모르겠다.

에휴, 나이를 먹을 만큼 먹은 내가 참아야지 어쩌겠나.

 

 

태양이 다음날을 기약하며 만들어내는 석양이 아름답게 핀 오후.

강렬한 햇빛 아래에서 열심히 노느라 땀을 뺀 우리들은 펜션 내 인공온천에서 목욕하기로 했다.

새로 생긴 펜션답게 있을만한 건 다 있구나.

만화나 에로 게임에서 본 것처럼 남녀혼탕이 아닐까 하고 잠시 기대했던 나.

하지만...

 

잠깐이나마 기대했던 내가 바보지...”

 

그건 어디까지나 픽션이라는 사실을 까맣게 잊고 있었다.

인공온천은 타 지방에 있는 노천온천들보다 더 철저하게, 남탕 여탕으로 반분되어 있었다.

남탕 여탕을 구분 짓는 벽도 대나무 벽이 아닌 콘크리트 벽으로 생쥐 한 마리도 빠져나갈 수 없을 만큼 단단하게 막혀 있었다.

 

... 쓸쓸하구나.”

 

목욕하는 이 시간만큼은 아야세와 함께 보낼 수 없다는 게 정말 안타까웠다.

나는 온천물에 양 다리를 넣자마자 목욕탕 단골손님인 마냥 푹 하고 드러누워 버렸다.

 

, 인공온천인데 노천온천보다 더 온천 같다?”

 

? 키리노의 목소리다.

드디어 여성진이 온천에 입수하기 시작한 모양이다.

 

바닷가 펜션에 이런 온천 같은 게 있는 줄 누가 알겠어.”

 

아야세의 목소리도 들려왔다.

나는 나도 모르게 애들이 온천물에 들어가며 나는 물소리에 온 신경을 집중했다.

 

우리 나중에 학교 졸업하면 한 번 더 올래? 그 누구더라, 다음엔 마나미 언니와도 같이 오자.”

? 평범이랑 같이? 싫어 얘. 평범이가 두 명이나 있으면 더더욱.”

 

거기서 마나미 욕은 또 왜 나오고,

평범이가 두 명이 어쩌고 하는 얘기는 또 왜 나오니?

그 중 한 명은 분명 내 얘기겠지만.

 

? 나쁠 거 없잖아. 원래 여행이란 건 사람이 많으면 많을수록 재밌는 법이야.”

난 시끌벅적한 건 딱 질색이라서.”

 

시끌벅적한 건 딱 질색이라고 하는 너 하나 때문에 더 시끌벅적한 건 모르겠고?

 

! ! 모두 저리 비켜! 대스타 아이돌님 나가신다!!”

 

대스타 아이돌이 어쩌고 하니 이번엔 카나코가 등장할 시간이군.

풍덩!!

 

온천물이 사방으로 퍼지는 소리가 크게 들려왔다.

보나마나 뻔하지. 수영장 들어가듯이 온천을 향해 온 몸을 던졌을 거다.

이 녀석은 공공시설 쓰는 예의도 없나?

 

, 카나코! 여긴 수영장이 아니란 말이야. 엄연한 공공시설이라고. 이런 데서 그러면 안 돼.”

 

아야세는 언제나 옳은 말만 한다.

 

그런 있으나마나한 규칙은 안 지켜도 돼.”

그게 무슨 무책임한 소리야? 아무리 있으나마나한 규칙이라도 지키기 때문에 이 세상이 아름다운 거야.”

, 잘못했습니다! 하지만 여긴 지금 우리밖에 없는데요?”

, 정말... 네 그 태평함 때문에 두 손 두 발 다 들겠다.”

 

나 같았으면 바로 싸대기를 날렸을 텐데.

역시 천사는 대화로 풀려고 노력하는구나.

 

그나저나... 인공온천치곤 따듯한 게 기분 좋다. 안 그래?”

그러게. 우와! 키리노. 너 피부 완전 매끄럽다? 꼭 어린아이 같아.”

 

, 피부?

어째 얘기 주제가 이상한 곳으로 갈 것 같은 이 불길함은 뭐지?

 

장래희망이 모델인데 피부 관리는 생명이지. , 그러는 아야세 네 허리도 장난 아니다? 완전 개미허리야.”

아니 너 얼마 못 본 새에 완전 다른 사람이 됐네?”

, 아냐 그런 거. 카나코 넌 많이 안 변해서 오히려 그게 더 부러운 걸? 나이도 속일 수 있잖아?”

너희처럼 잘 빠진 애들이 나 같은 중학생 몸매의 고충을 어찌 알랴.”

 

몸매 얘기까지 나오니 내 신경이 곤두서지 않을 리가 없다.

나는 반대편에서 들려오는 얘기를 더 자세하게 듣고자 물소리가 나지 않게 최대한 조심스럽고 조용히 움직여 벽 가까이까지 다가갔다.

 

, 카나코! 뭐하는 거야? 안 돼, 그런 데 만지지 마!”

같은 여자끼리 뭐 어때서 그래?”

, 재밌겠다! 나도 같이할래. 아야세, 내가 아주 S라인으로 만들어줄게!”

얘들아, 그만해! 거긴 안 돼!”

 

악마 두 마리가 천사를 괴롭히고 있다.

, 이런. 마음 같아선 당장 구해주고 싶지만 하필이면 목욕 중이라 자칫 잘못하면 내가 악마가 되어버린다.

 

, 이런 꼴을 오빠한테 보이면 부끄럽단 말이야!”

이런 꼴은 무슨! 그 평범이는 그렇게 안 보여도 은근히 이런 걸 좋아해요!”

맞아, 알고 보면 톱 변태라니까?”

 

다 들린다, 이 망할 악마들아.

나한테는 너희가 하는 일에 혹해서 몰래 엿들은 죄 밖에 없다.

남자라면 당연한 거라고.

 

! 잠깐 와봐! 이 변태 다 듣고 있었어!”

 

카나코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목소리가 들린 방향을 바라보니 벽 위였다!

젠장, 망했다! 이 사실을 키리노가 알면 카나코와 연합해서 욕을 바가지로 날릴 게 분명하다.

카나코에 이어서 키리노도 벽 위로 올라왔다.

 

어머, 누가 변태 시스콤 아니랄까봐 다 듣고 계셨어요?”

, 그거야 너희가 하도 시끄럽게 구니까...”

! 이해해! 당연히 하나 뿐인 초초초 귀여운 여동생의 성장상태가 궁금하시겠지요, 초초초초 시스콤 변태 오빠님!”

그래서 몰래 엿들으신 감상은 어떠셨어? 변태 매니저 아저씨?”

 

시스콤 변태에, 변태 매니저에...

뭘 했다하면 항상 변태래.

 

, 감상이고 뭐고 괜히 얌전히 있는 아야세한테 뭐하는 짓이야?”

뭐하는 짓이라니? 몸매가 좀 부러워서 그런 건데 뭘. 아하, 너 말은 그렇게 하고 사실 우리가 부러운 거지? 그렇지?”

아냐, 인마! 부럽긴 뭐가 부럽다고...”

... 오빠.”

 

벽 반대편에서 아야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곧장 목소리가 들려온 곳으로 귀를 가까이 갖다 대었다.

 

, 아야세?”

... 듣고 계셨어요?”

, ... 저기. 그게 말이야. , 그래. 하도 시끄럽다보니 반대편까지 다 들리더라고.”

, 더 노력할게요.”

 

? 노력한다고?

 

, 노력한다니 뭘?”

지금보다 훨씬 더 몸매 좋아지도록 노력할게요. 오빠 앞에서 더 당당해지고 싶어요.”

 

아야세의 말을 듣자마자, 내 양쪽 콧구멍에서 뭔가 뜨거운 액체가 터져 나오려고 했다.

나는 오른손으로 코를 꽉 쥐어 잡고 애써 콧구멍을 틀어막았다.

 

, 저기. 아야세? 넌 안 그래도 예뻐. 굳이 사서 고생할 필요 없어.”

, 정말요? 알았어요. 저 열심히 노력할게요!”

 

왜 내 말을 반대로 알아듣는 거니?

 

! 닭살 돋는 짓은 제발 다른 데 가서 해!”

아야세 너도 나보고 공공시설이 어쩌니 그런 말 할 자격 없는 것 같은데?”

 

벽 위에 매달려 있는 키리노와 카나코가 나와 아야세를 번갈아 돌아보며 핀잔을 주었다.

 

닭살 돋는 짓을 하도록 유도한 게 누군데 그런 소리를 하냐?”

어머, 우리가 그랬었나?”

우린 그냥 여자들끼리 일본의 건전한 목욕문화를 즐기고 있었던 것뿐이라고. 닭살 필드는 그쪽에서 먼저 만들었잖아?”

 

에휴, 도저히 상식이 안 통한다. 그냥 말을 말자.

이런 녀석들을 하루 종일 상대했다간 내 정신과 얼이 다 빠져버리지.

나는 키리노와 카나코를 정중히 무시하고 다시 온천의 정 가운데로 가서 몸을 푹 담가버렸다.

배도 고프고, 적당히 하다가 나가서 밥이나 먹을까.

 

 

저녁식사는 서양식으로 지어진 펜션과 완전히 상반되는 전형적인 일본인의 식사였다.

우리는 여성진이 어른이 된 것을 기념 삼아 조촐한 성인식을 하기로 했다.

사실 내년 11일에 해야 맞지만, 키리노의 경우 학교를 졸업하기만 하면 바로 모델 일로 바빠질 것이고, 카나코 또한 아이돌 일로 바쁘기 때문에 미리 하기로 한 거다.

 

캬하! 술 맛 좋다. 어쨌든 말이야. 그때 참 웃기지 않았어?”

맞아, 맞아. 그때 그 검은 사람이 매니저한테 싸대기 날리는 장면 보고 얼마나 통쾌했는데.”

그 일은 가능하면 좀 잊어주라. 나는 뭐 맞고 싶어서 맞았냐? 쿠로네코 그 녀석이 일방적으로 때린 거지.”

나도 그 중2병 검은 거의 마음이 어느 정도는 이해가 가더라니까.”

 

처음에 내가 아야세와 사귄다고 공표했을 땐 별 반응을 안 보였던 쿠로네코였지만, 막상 내가 키리노의 에로 게임 짐꾼으로 여름 코미케에 불려간 그날, 난 그녀에게 정통으로 뺨을 맞아야만 했다.

그땐 내가 너무 눈치 없어서 잘 몰랐지만, 시간이 흘러 그 이유를 생각해보니 내가 쿠로네코의 마음을 조금도 헤아리지 않았기 때문에 맞았다는 걸 깨달았다.

 

그 사람도 너무했어.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때릴 것까진 없었잖아. 내가 그 자리에 있었으면 확실히 사과를 받았을 텐데.”

만약 아야세 너까지 그 자리에 있었으면 아마 서로 머리채 붙잡고 난리 났을 걸? 그리고 내 책임도 확실히 있었는데 뭘 그래. 이제 다 지난 일이니까 그만 잊자.”

그렇지만... , 알았어요.”

 

자리에 있던 모두의 말문이 막히고 분위기가 잠시 서먹해졌다.

그만큼 그때 일이 큰일이었으니 어련하겠느냐 만은.

 

, ! 그런 얘기는 이제 그만하고, 생전 처음으로 가져보는 술자리인데 화끈하게 즐겨야지! 모두 잔 들고!”

 

그 암울한 얘기를 먼저 꺼낸 장본인(키리노)도 분위기를 서먹하게 해서 미안했는지, 다시 분위기를 밝게 전환하고자 자리에서 일어났다.

병 주고 약 준다더니 이런 경우를 두고 하는 말인가 보다.

그래, 단순히 분위기 전환에서 끝났으면 그걸로 좋았겠지, 정말로.

 

30분 후.

 

근심을 털어놓고 다 함께 차차차!”

차차차!!”

 

정말로 단순히 분위기 전환에서 끝났으면 그걸로 좋았겠지만, 내가 바라는 대로 다 된다면 세상사는 게 뭐가 무서우랴.

키리노와 카나코는 잔뜩 취한 채 서로 어깨동무를 하고 음정과 박자를 다 무시하며 막무가내로 노래를 불러댔다.

여긴 노래방 기기도 없으니 그야말로 한밤중의 고성방가인 셈이다.

 

오빤 괜찮으세요?”

 

옆에 있던 아야세가 내게 물었다.

 

대학 가서 선배들이랑 술 먹다보면 다 단련되게 돼 있어. 그러는 아야세 너는 괜찮아? 너도 얼굴이 좀 빨간데?”

저도 슬슬 한계 같네요. 이제 그만 먹을까 봐요.”

 

아야세는 이미 취할 대로 취해버린 키리노나 카나코와는 달리 의외로 술에 강한 듯, 그렇게 마셨음에도 생각보다 취하지 않았다.

위이잉, 위이잉

 

어디선가 핸드폰 진동소리가 들려온다. 혹시 내 건가?

 

, 제 거네요. 잠깐만 갔다 올게요.”

 

아야세는 곧 전화를 받기 위해 핸드폰을 들고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누구 전화일까?

아야세의 남자친구다보니 이런 사소한 것도 은근히 신경 쓰인다.

 

오빠...”

 

아야세가 벌써 돌아왔나?

아니, 그럴 리가 없다. 방금 전에 전화 받으러 나간 애가 이렇게 빨리 올 순 없지.

 

오빠... 나 좀 봐봐...”

오라버니... 제발 저 좀 보시와요...”

 

오빠에 이어서 오라버니까지?

아까부터 익숙하지 않은 말투를 쓰는 친숙한 목소리들이 계속 들려온다.

목소리들이 들려온 방향으로 시선을 돌려보니... 끄아아아악!!!!

키리노와 카나코다!

그것도 입은 옷을 반 정도 풀어헤치고 요염해보이도록 엎드린 채 나를 향해 천천히 기어오고 있었다.

 

, ! 너희들 왜 그래?”

오빠!!”

오라버니!!”

털썩!

 

두 사람은 당황하고 있는 나의 품을 향해 인정사정없이 자신들의 몸을 던졌다.

, 이런. 이럴 땐 어떻게 해야 되는 걸까?

 

너희들 너무 취한 거 아니냐? 그러니까 술 좀 적당히 먹으래도!”

잠까안! 오빠... 입 다물고... 내 말 좀 들어보라고... 나 말이야! 아야세한테 오빠 뺏기기 싫어! 오빠를 세상에서 제일 좋아하는 건... 나란 말이야, ! 이 초초초초초 귀여운 여동생이라고!!”

저도 오라버니를 뺏기기는 싫사옵니다! 오라버니는 소녀만의 매니저이시옵니다!!”

너흰 술 취하면 막 벗고 말투도 바뀌고 그러냐? 어쨌든 그만하고 좀 떨어져! 누가 보면 오해하겠다!”

 

술에 취하니 키리노는 나보고 평생 안 부르던 오빠라 부르고, 카나코는 이미지와는 전혀 안 어울리게 나를 오라버니라고 불렀다.

 

아야세 너무해! 다시 얘기할 수 있게 된 그런 오빠인데... 왜 뺏으려 들어!!”

오라버니! 가지 마시와요! 소녀를 두고 가지 마시와요!!”

 

분명 나랑 아야세가 사귄다고 공표한 걸 순순히 인정한 애들이었는데...

역시 술에 취하니 본심이 드러나는구나.

 

얘들아, 다른 사람들이 보면 오해하니까 제발 좀 떨어져줄래?”

싫어! 안 놓칠 거야!”

그리 가셔야겠다면 부디 소녀를 사뿐히 지르밟고 가시옵소서!!”

제발 좀 떨어져라! 이런 모습을 아야세가 보기라도 하면...!”

스으윽...

 

미닫이문이 열리며 그녀가 들어왔다.

제길, 이미 예견은 하고 있었지만 최악의 사태가 벌어졌다.

 

, 오빠...”

 

아야세의 얼굴을 유심히 살펴보니, 그녀의 동공이 반쯤 풀려있었다.

게다가 그녀의 전신으로부터 살해위협을 받게 하는 검은 오로라가 피어올랐다.

그녀는 우리들을 잠시 뚫어져라 바라본 뒤 곧장 뒤를 돌아 아래층으로 내려가 버렸다.

 

아야세! 잠깐만!”

 

나는 내 양 다리를 붙잡고 있는 키리노와 카나코를 겨우겨우 뿌리치고 아야세를 쫓아갔다.

망했다. 하필이면 그런 모습을 가장 보이고 싶지 않은 사람에게 보여 버렸다.

내가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천사에게 절대로 보여선 안 될 모습을 보여 버렸다.

하지만 이건 결코 내가 원해서 일어난 일이 아니었다.

천사를 쫓아가자. 그리고 사실을 얘기하고 용서를 구하자.

지금 할 수 있는 일은 오직 그것밖에 없다.

 

온 몸에서 땀이 줄줄 흐르도록 나는 뛰고 또 뛰었다.

지금 해야 하는 가장 급한 일은 천사를 찾고 용서를 구하는 일이다.

여기서 나의 천사를 잃는다면 그것은 천벌을 받을 일이다.

찾았다. 그렇게 애타게 찾던 나의 천사가 저기 있다.

어디 먼 곳에라도 간 줄 알았지만, 그녀는 바닷가 앞에 쪼그려 앉아있었다.

분명 그렇게 기분이 좋진 않을 거다.

나는 고개를 푹 숙인 채 자리에 앉아있는 아야세에게 조심스레 다가갔다.

 

아야세.”

 

나는 그녀의 이름을 조심스레 불렀다.

 

이 바보!!”

퍼어억!!

뜨아악!!”

 

아야세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나를 향해 앞차기를 날렸다.

내 하반신의 가장 중요한 부분에서 상당한 고통이 느껴졌다.

이 고통은 여자는 절대로 느낄 수 없는 남자만의 고통이다.

 

내가 왜 화났는지 모르죠?!”

, 그야... 아까 그 장면 때문에... 미안해. 그건 사고야. 걔네들이 취해서 일방적으로 그런 거야. 정말이야. 하필 네가 그때 올라올 줄은 꿈에도 몰랐어.”

역시 오빤 바보야... 한 대 더 맞아요!!”

퍼어억!!

끄아아악!!”

 

나 이러다가 장가도 못 가는 거 아닐까?

 

정 모르겠다면 얘기해줄게요. 잘 들어요! 너무 한심해서 그랬어요.”

, 뭐가 말이야?”

키리노나 카나코처럼... 적극적이지 못하고 소심하기 짝이 없는 나 자신이 한심해서 그랬다고요! 이 세상 그 누구보다도 오빠를 사랑하고 있는데... 그 사랑하는 남자의 품에 스스로 안기질 못하다니... 한심하잖아요! 그것도 모자라서 오빠는 내 마음조차 제대로 모르고 있고! 그래서 홧김에 그런 거예요. 이제 알겠어요?!”

 

내가 초능력자도 아니고, 네 마음속을 어떻게 그리 자세히 꿰뚫어보겠니?

하지만 지금 이런 얘기를 했다간 역 효과만 날 것 같으니 접어두자.

바람피우는 걸로 오해한 것도 아니니까.

이럴 땐 그저 미안하다고 먼저 고개 숙여주는 게 제일 좋다.

 

네 마음이 그런 줄도 모르고 정말 미안하다. 하지만 말이야. 그래도 괜찮아. 나도 이 세상 그 누구보다도 널 사랑해. 서로 사랑하기만 하면 그걸로 되는 거잖아. 못 믿겠으면 지금 이 자리에서 증명해볼까?”

아뇨, 됐어요. 그럴 필요 없어요. 나도 잘 아니까. 그리고 또 하나, 하고 싶은 얘기가 있어요.”

뭔데? 얘기해 봐.”

 

아야세는 잠시 숨을 고르고 진지한 표정을 지었다.

그런 아야세를 바라보고 있자니 나도 자연스레 진지해졌다.

 

아까 낮에 배구할 때, 장래희망에 관해서 얘기했었잖아요. 저는... 뭘 해야 할지 잘 모르겠다고 했었지만, 이제 확실히 정했어요.”

, 그래? 정했다니 다행이네?”

오빠! 나랑 결혼해요!”

결혼? 그래, 결혼... ?”

 

나는 내 양쪽 귀를 의심했다.

 

결혼하자고요! 귀 먹었어요? 잘 들어요! ! ! ! !!”

그래, 결혼해야지. 나도 너랑 결혼하고 싶다. 그런데 갑자기 그 얘기는 왜...”

장래희망을 확실히 정했다고 했잖아요. 오빠 부인이 되고 싶어요! 엄마가 되고 싶어요! 알았죠? 이게 내 장래희망이에요!”

 

이럴 땐 웃어야 되나 울어야 되나?

물론 나도 아야세랑 결혼할 생각은 있었지만 그건 한창 나중에나 꺼내야 할 얘기인 것 같았는데...

이렇게 단도직입적으로, 그것도 내가 아닌 아야세가 먼저 결혼하자는 얘기를 꺼내다니 정말 당황스럽지 않을 수 없다.

수긍해주지 않으면 이 자리에서 곧장 하늘나라로 떠날 것 같으니 별 수 없다. 일단 수긍은 해주자.

 

좋아, 결혼하자. 그 전에 약혼부터 해야지. 안 그래? 지금은 너무 이르고, 그러니까 좀 시간이 흐른 뒤에...”

지금 당장 해요!”

 

이젠 말도 무서워서 못 하겠다.

반박하면 그대로 끝장이다.

 

... 그럴까? 알았어. 넌 지금 학생이니까... 그래. 네가 학교 졸업하면 바로 결혼하자. 알았지?”

좋아요. 그 정돈 제가 양보하죠.”

 

아야세의 찌푸려져 있었던 인상이 다시 시원하게 펴졌다.

나 또한 그녀의 활짝 웃는 미소를 따라 엉겁결에 따라 웃었다.

내가 웃는 게 웃는 게 아니야, 라는 노래를 어디선가 들은 것도 같은데, 이런 경우를 두고 지은 노래인 모양이다.

 

 

어쨌든, 이 바닷가 펜션에서 있었던 일련의 에피소드 덕분에 나는 그녀와 강제로 약혼하고 결혼하게 되었다.

한참 이야기를 듣던 치토세가 이제 좀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 그랬구나. 고모랑 이 아줌마 덕분에 엄마랑 아빠가 그렇게 일찍 결혼하신 거네요?”

그렇게 결혼하고 또 1년이 지나서 네가 태어났지. 그때 네 엄마가 얼마나 좋아했는지 아니? 물론 아빠도 기뻤지만, 네가 태어난 그 날 엄마가 아빠에게 보여줬던 그 미소는 그야말로 세상을 다 가진 사람의 미소였어.”

 

지금 생각해보면 정말 웃지 못 할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렇게 일찍 약혼하고 결혼했지만, 나는 단 한 번도 그때 일을 원망하거나 후회해본 적이 없다.

그 일이 있었기 때문에 우리 부부의, 우리 가족의 사랑이 이렇게 굳건한 거니까.

그 일이 있었던 덕분에 나는 여신과 천사의 사랑을 한 몸에 받는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남자가 되어 있으니까.

 

오빠, 치토세! 아침 다 됐어요!”

엄마가 부르세요. 빨리 내려가요.”

그래, 알았다.”

 

그 일이 있은 이후로 당시까진 악마라고 원망했던 키리노와 카나코에게 어찌나 고마움을 느꼈는지 모른다.

걔네 둘이 그래준 덕분에 나와 아야세가 이렇게 행복하게 살고 있는 것이니 말이다.

물론 걔네 둘은 자기들이 그랬다는 사실을 전~~~혀 기억하지 못하는 게 흠이지만.

덕분에 이렇게 행복해졌으니, 나중에 따로 자리를 마련해서 두 사람의 고생을 치하해줘야겠다.

나의 사랑하는 여신 아야세와, 소중한 천사 치토세와 함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