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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터블 후일담 창작 단편 5. 내 딸이 파더콤일 리가 없어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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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터블 후일담 창작 단편 5. 내 딸이 파더콤일 리가 없어

히아신스v 2024. 1. 20. 13:28

이번 팬픽의 메인은 쿄스케와 아야세 딸 치토세입니다.

쿄스케와 치토세의 시점이 번갈아가며 진행됩니다.(비중은 쿄스케가 더 큼.)

엄마 못지않게 아빠를 좋아하는 딸의 이야기를 그려볼까 합니다.

다소 원작과 비교해 어색하거나 설정 등의 문제가 있더라도, 팬픽이니까 그러려니 넘겨주시고 감상해주시기 바랍니다.

 

 

슬슬 추운 겨울을 눈앞에 바라보고 있는 어느 가을날의 아침.

무슨 일인지 머리가 지끈하고 온 몸에서 열이 올라온다.

감기인가?

나는 눈이 떠지자마자 침대에서 일어나려고 이불을 걷고 상체를 일으켰다.

침대에서 내려와 일어나는 순간...

 

철퍼덕!”

 

감기 기운에 다리의 힘까지 풀린 듯, 그 자리에 바로 주저앉아버렸다.

평소엔 감기 좀 걸렸다고 다리에 힘이 풀릴 정도는 아니었는데, 아무래도 보통 감기는 아닌 것 같다.

어제 좀 무리를 해서 그런가...

아카기 녀석이 급한 집안 사정이 있어서 내가 늦게까지 남아 녀석 일을 대신 해준 게 탈이 된 모양이다.

바로 그때. 방문이 열리며 치토세가 들어왔다.

 

아빠, 새 나라의 아저씨는 일찍 자고 일찍... ? 아빠!”

 

문 앞에 있던 치토세가 바닥에 주저앉아 있는 날 보자 소스라치게 놀라며 뛰어왔다.

 

... 치토세구나? 아빠 괜찮아. 걱정하지 마.”

어디 아프세요?”

괜찮대도. 금방 내려갈 테니까, 넌 걱정 말고...”

 

난 당장이라도 몸을 일으켜 방문을 나서려 했지만, 내 몸은 내 마음처럼 제대로 움직여주지 않았다.

 

안 돼요! 환자는 침대에 꼼짝 말고 누워있어야 해요! 어서 다시 올라가세요!”

 

치토세는 내 팔을 붙잡고 날 부축해 일어서려 했다.

하지만...

 

꺄아악!”

 

일어서자마자 다시 푹 주저앉아버렸다.

30대를 바라보는 아저씨랑 초등학교 1학년 여자아이의 체격차이는 생각도 안 해본 모양이다.

 

너 혼자서는 무리니까 엄마 모셔와.”

싫어요! 저 혼자서도 충분히 할 수 있어요!”

 

치토세는 나의 만류를 뿌리치고 계속 날 부축해 일어서려 했지만...

아니나 다를까, 바닥에 철퍼덕하고 주저앉아버렸다.

 

그냥 아빠 말 들어.”

치이... 알았어요. 엄마 모셔올게요.”

 

치토세는 입을 쭉 내밀고 뾰로통한 표정을 지으며 방을 나가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누굴 닮아서 저렇게 고집이 센 거지?

 

곧이어 치토세를 따라 아야세가 방으로 올라왔다.

 

오빠, 괜찮아요?”

 

아야세와 치토세가 양쪽 팔을 동시에 붙잡은 뒤 날 부축하며 일어섰다.

 

하여튼 오빠는 천성이 너무 착해서 탈이에요. 일을 열심히 하는 건 좋지만, 이렇게 아파질 때까지 하면 안 돼요.”

하하, 미안...”

어쨌든 오늘은 아무 생각 말고 푹 쉬는 게 좋겠어요.”

그래, 알았어...”

 

아야세는 나를 침대에 눕힌 뒤 이불을 덮어주고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이왕 쉬는 거 푹 쉬자고 생각하고 슬슬 잠을 청하려는데...

 

아빠.”

 

아야세가 아래층으로 내려가는 모습을 멍하니 지켜보고 있던 치토세가 나를 향해 시선을 돌리며 말했다.

날 부르는 목소리에 반응하여 얼굴을 바라보니, 치토세는 표정을 잔뜩 찌푸리고 있었다.

 

왜 그러니? 기분이 안 좋아?”

“...부르신 거예요?”

? 좀 더 크게 말해봐.”

 

내가 헛소리를 들었나?

 

왜 엄마를 부르신 거예요!”

 

치토세가 울음을 터뜨리며 나를 향해 큰소리로 외쳤다.

부를만한 이유라면... 뭐 따로 있을까?

 

그야, 너 혼자서 아빠를 짊어질 순 없으니까...”

저 혼자서도 할 수 있단 말이에요!”

너 갑자기 왜 그래? 왜 그렇게 고집을 부리고 화를 내는 거야?”

몰라요! 아빤 바보야!”

 

치토세는 화란 화는 있는 대로 다 뿌려놓고 씩씩 거리며 방에서 나갔다.

어쩐지 의구심이 들었다.

치토세는 아야세처럼 범죄냄새가 나는 발언만 안 할 뿐, 청순가련한 외모부터 순수한 성격까지 어느 것도 나무랄 것 없이 그녀와 똑 닮은 아이다. 생각하는 것도 나보다 어른스러우면 어른스러웠지 못하지는 않다.

지금까지 그렇게 보고 키워왔던 치토세가 이번만큼은 지금까지와 많이 달랐다.

 

하아... 모르겠다.”

 

나는 곧장 눈을 감고 잠을 청했다.

 

아하~ 오랜만에 푹 쉬는 것도 좋지만,

역시 아야세의 따뜻한 손맛이 들어간 죽만큼 맛있는 것도 없구나.

 

아플 땐 누가 뭐라고 해도 죽이 최고죠. 오빠, 아 하세요.”

~”

 

아야세는 직접 수저로 죽을 퍼서 내 입 속에 넣어주었다.

 

맛있어요?”

아야세가 해주는 건 뭐든 다 맛있어.”

후훗, 바보한테 맛없는 게 어디 있어요?”

 

아야세가 슬쩍 코웃음을 쳤다.

맞는 말이다. 바보한테 맛없는 음식은 없지. 그렇지.

잠깐, 뭔가 썩 탐탁치가 않은데?

 

이렇게 맛있는 걸 매일 먹을 수 있다면 차라리 바보로 살래.”

이젠 너무 익숙해서 그런지 오빠가 바보가 아니면 영 적응이 안 돼요.”

 

나도 나 스스로가 바보짓을 안 하면 적응 못하긴 마찬가지다.

죽을 먹다가 우연히 시선이 아야세가 있는 자리의 왼쪽으로 쏠렸다.

아야세한테 가려져서 잘 안보였었는데, 치토세도 같이 올라왔었구나.

하지만 활짝 웃고 있는 아야세와는 달리 치토세의 표정은 썩 좋지가 않았다.

치토세는 양쪽 뺨을 크게 부풀린 채 언짢은 표정을 짓고 있었다.

 

. . .

 

아빠는 맨날 엄마만 좋아해.

아빠와 엄마의 다정한 모습을 본 나는 질투가 났습니다.

나도 아빠를 돌봐드리는 것 정도는 할 수 있는데.

주변 사람들은 내 몸집이 작다고, 나이가 적다고 나를 자꾸 어린아이 취급합니다.

 

따르르릉~”

 

1층에서 전화 벨소리가 들려왔습니다.

 

어머, 전화가 왔네? 잠깐 갔다 올게요.”

 

엄마는 스탠드 옆에 그릇을 놓고 1층으로 내려갔습니다.

나는 이때다 싶어 오른손으로 그릇을 들고 아빠의 눈앞까지 다가갔습니다.

 

아빠, ~”

 

나는 아까까지 짓고 있던 뾰로통한 표정을 풀고 활짝 웃으며 아빠를 향해 숟가락을 내밀었습니다.

 

너 갑자기 왜 그러니?”

 

아빠가 의아한 표정을 짓고 나를 바라보며 물었습니다.

 

아빠! 환자는 잘 먹고 푹 자야 다시 건강해질 수 있어요! ~ 하세요.”

아니 그거야 그렇지만...”

~ 하세요!”

 

나는 억지로 아빠의 입을 벌리고 죽을 밀어 넣었습니다.

 

맛있으세요?”

, 그래. 맛있구나.”

 

아빠는 한 얼굴로 당황한 표정과 웃는 표정을 동시에 표현했습니다.

 

많이 드시고 빨리 나으세요.”

알았으니까 천천히 좀 줄래? 한꺼번에 먹으면 탈나.”

 

아빠의 표정엔 어렴풋이 언짢아하는 모습도 보였지만, 나는 상관없었습니다.

내가 간호를 해서 아빠가 다시 기운을 차리신다면 그걸로 좋았거든요.

그때, 발소리가 들렸습니다.

엄마가 전화를 받으시고 다시 올라오시는 모양입니다.

방으로 올라온 엄마의 표정은 약간 일그러져 있었습니다.

 

왜 그래? 무슨 전화였어?”

 

아빠가 물었습니다.

 

아버님이셨어요. 어머님께서 아프시데요.”

? 어머니가?”

. 요즘 감기가 유행인가 봐요. 어머님도 감기 때문에 지금 앓아누워 계신데요.”

아버지가 계시니까 괜찮으시겠지. 너무 걱정하진 마.”

그랬으면 좋겠지만... 그게 말이에요.”

 

엄마는 하던 말을 뚝 끊고 잠시 머뭇거렸습니다.

 

어서 얘기해 봐.”

아버님이 급한 일 때문에 바쁘셔서 하루 정도 집을 비우셔야 한데요. 그래서 바쁘지 않으면 어머니 간호 좀 부탁한다고 하셨어요.”

“...뭣이라?! 간호? 너한테?!”

 

아빠가 소스라치게 놀라며 말했습니다.

 

어떡하죠? 오빠도 아프고 어머님도 아프시고... 어느 쪽을 먼저 신경 써야 하는지...”

아니, 잠깐. 아버지는 그렇다 쳐도 키리노는? 그런 거라면 그 녀석한테 맡겨도 되잖아?”

벌써 잊어버렸어요? 키리노는 여름 코미케 갔다가 바로 외국으로 나갔잖아요.”

뜨아아악! 맞아, 그랬지!! 하느님! 어찌하여 제게 이런 고난을 주시나이까!!”

 

아빠는 머리를 양손으로 쥐어 잡고 천장을 향해 큰소리로 외쳤습니다.

그때, 내 머릿속에서 전류가 번뜩하며 좋은 생각이 스쳐지나갔습니다.

여기서 엄마가 할머니를 간호하러 가시면... 나랑 아빠 단 둘이 집에 남는다!

엄마보다 더 아빠와 가까워질 수 있는 기회다!

 

아빠, 걱정하지 마세요, 제가 있잖아요!”

 

나는 자신감에 찬 목소리로 아빠에게 말했습니다.

 

하지만...”

괜찮아요. 아빠를 돌봐드리는 것 정돈 얼마든지 할 수 있어요.”

오빠. 치토세를 한 번 믿어 봐요. 괜찮을 거예요.”

 

엄마도 내 의견에 한수 거들어주었습니다.

 

그래... 뭐 가족을 믿어야지 누굴 믿겠어. 알았어, 치토세. 오늘 하루 동안 아빠 잘 부탁한다.”

맡겨만 주세요!”

 

나는 순간의 기쁨을 주체하지 못하고 큰소리로 답했습니다.

 

나는 1층으로 내려가 엄마를 배웅했습니다.

 

치토세, 엄마는 오늘 하루 집에 못 올 것 같으니까, 아빠 잘 돌봐드려. 알았지?”

알았어요.”

그리고 혹시 불 쓸 일 있으면... 쓰는 건 좋은데, 조심해서 써야한다?”

걱정 마세요.”

문단속도 잘하고, 아빠 많이 편찮으시니까 귀찮게 하면 안 돼. 그리고 또...”

아이 참! 엄마, 저도 이제 다 컸단 말이에요.”

 

엄마는 참 걱정도 많으세요.

요즘은 7살이면 다 컸다는 말을 듣는다고요.

스스로 생각하는 거지만, 나는 몸집만 좀 작은 어른이에요.

 

그래, 그래야 우리 딸이지. 엄마 갔다 올게.”

다녀오세요!”

 

나는 엄마가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기다리며 현관 앞에 있다 집 안으로 들어갔습니다.

집에는 아빠와 나, 단 둘만이 남게 되었습니다.

나는 내 방에 올라가 계획표를 짜기 시작했습니다.

몸이 편찮으신 아빠를 돌보는 게 제일 큰일이지만, 일은 차근차근 계획을 해놓고 하는 편이 이롭다는 걸 학교에서 배운 적이 있습니다.

 

먼저... 그렇지. 아빠 식사랑 약이 있어야지.”

 

나는 안방으로 가 아빠가 주무시는 틈을 타 감기약을 찾기 시작했습니다.

옷장 문도 열어보고, 엄마 화장대의 서랍장도 열어보는 등 여러 군데를 뒤적여봤지만...

엄마가 깜빡하신 건지, 아니면 내가 못 찾는 건지, 약이나 약상자 같은 건 도저히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어디 있지? , 맞다! 없으면 사면되지!”

 

나는 엄마가 할머니 댁으로 가시기 전에 주신 용돈을 새까맣게 잊고 있었습니다.

집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엔 한 할아버지가 하시는 오래된 작은 약방이 있습니다.

아빠랑 아침산책 할 때 가끔씩 들러보기 때문에 주인 할아버지와도 어느 정도 면식이 있습니다.

 

아니, ... , 거기 꼬마!”

 

약방으로 가던 나를 누군가가 뒤에서 불러 세웠습니다.

목소리에 반응한 나는 곧장 뒤를 돌아보았습니다.

어른이라고 하기엔 약간 작은 체구와, 전형적인 일본 미인의 스타일을 갖춘 검은 머리, 왼쪽 눈 아래에 있는 눈물점이 돋보이는 희고 고운 얼굴의 아줌마가 서있었습니다.

? 어디서 한 번 만난 사람 같은데?

 

아줌만... 누구세요?”

나를 벌써 잊어버리다니, 이 검은 빛의 타락천사님을 정녕 몰라보겠니? 여름 코미케 때 한 번 만난 적이 있었잖아.”

여름 코미케? , 맞다! 생각났어요! 쿠로네코 아줌마!”

 

자화자찬이 약간 섞여있는 말투와 태도를 보자 번뜩 떠올랐습니다.

 

나는 나에게 생전 처음으로 굴욕을 안겨준 원수 같은 꼬맹이를 잊지 않고 있었는데, 막상 너는 나를 잊고 있었다니, 좀 섭섭한 걸?”

그때 그 게임 너무 재밌었어요! 저 또 하고 싶은데, 어디가면 살 수 있어요?”

이번 가을 코미케에 오면. 그리고 그땐 내가 받은 굴욕을 돌려줄 거야.”

 

나는 쿠로네코 아줌마를 만나자 반가운 마음에 당장 해야 할 일을 잊고 대화에 푹 빠져버렸습니다.

 

혼자 길가를 거니는 걸보니 시간이 넉넉한 모양이구나? 원한다면 지금 당장 가서 한 번 더 게임해줄 수 있는데, 어때?”

, 정말이세요? 그럼 저도 같이...”

 

같이 가겠다고 하려는 순간 떠올랐습니다.

이럴 때가 아니야!

몇 분전까지만 해도 나는 아빠를 간호하고 있었습니다.

 

같이... 가 아니라, 죄송해요, 아줌마. 오늘은 안 될 것 같아요. 아빠가 감기 때문에 앓아누우셨거든요. 빨리 감기약을 사가지 않으면 안 돼요.”

아빠? 선배 말이야?”

 

아줌마의 점잖던 표정이 일그러졌습니다.

 

비치녀 2... 가 아니라 너희 엄마는 어쩌고 네가 그런 일을 해?”

엄마는 할머니 댁에 가셨어요. 할머니도 아빠처럼 감기 걸리셔서 아프다고 했거든요.”

 

얘기가 다 끝나기도 전에, 쿠로네코 아줌마는 나를 바라보던 시선을 땅바닥으로 돌렸습니다.

 

후훗... 타락할 대로 타락한 비치 천사주제에... 나를 제치고 선배를 차지했다는 녀석이 그러면 안 되지. 나보다 선배에 대한 애정이 한참 부족한 것 같군. 크크크큭...”

 

누구한테서 들려오는 목소리지? 아줌마인가?

아줌마의 얼굴표정을 슬쩍 보니, 나는 온 몸에 닭살이 돋고 오한이 서려왔습니다.

표정은 일그러질 대로 일그러져있었고, 거기서 새어나오는 웃음소리는 만화에서 자주 나오는 마왕보다 더 음흉하게 들렸으니까요.

 

치토세.”

!!”

 

나는 단 한 치의 흐트러짐도 없이 차려 자세를 잡고 부름에 응답했습니다.

 

굳이 약방까지 가서 약 같은 걸 살 필요 없어. 특별히 인심 써서 감기를 한 방에 낫게 할 수 있는 민간요법을 가르쳐줄게.”

민간요법? 그게 뭐예요?”

따라와 보면 안단다. 후훗!”

 

일단 따라와 보라고 하시니 한 번 믿어볼까.

나는 음흉한 미소를 짓고 괴기스러운 웃음소리를 내는 아줌마를 아무 말 없이 조용히 따라갔습니다.

마을 한가운데에 위치한 공원을 지나고 여러 집들이 밀집해있는 골목을 몇 바퀴 돌고 나니 대형 상점가가 나왔습니다.

어디 대단한 데로 가나 했더니 겨우 여기?

 

여긴, 상점가잖아요?”

여기서 다 구할 수 있어. 내가 얘기하는 대로 하기만 하면, 너희 아빤 언제 아팠냐는 듯 감쪽같이 나을 거야.”

 

아줌마와 내가 상점가에서 가장 처음 간 곳은 식료품점이었습니다.

 

어서 오세요.”

 

곱슬곱슬한 파마머리를 하고 후한 인상을 가진 약간 뚱뚱한 주인아주머니가 우리를 맞이해주었습니다.

 

생강차 있나요?”

, 얼마나 드릴까요?”

치토세, 살 사람은 너니까 양은 네가 결정해.”

저기... 안 사봐서 잘 몰라요.”

 

엄마가 상점가에서 장보는 모습은 많이 봤지만,

어디까지나 보기만 했지 직접 사본 적은 없거든요.

 

다음으로 간 곳은 상점가 한가운데에 위치한 생활용품점이었습니다.

많고 많은 물건들 중에서 아줌마가 내게 골라준 것은 다름 아닌 식초.

식초가 감기를 낫게 할 수 있는 건가?

 

, 아줌마. 이 식초는 왜 사는 거예요?”

나중에 가르쳐줄테니까 일단 따라오기나 하렴.”

 

쿠로네코 아줌마의 머릿속은 무슨 생각으로 가득 차 있을까?

나는 아줌마와 함께 다니는 내내 고민을 반복했습니다.

 

. . .

 

멍하니 자고 있던 나의 귓가를 향해 핸드폰 벨소리가 울려왔다.

모처럼 편히 쉬려고 하는데 대체 어떤 녀석이 시끄럽게 전화를 하고 난리야?

나는 열 때문에 한층 무거워진 몸을 어슬렁어슬렁 이끌며 스탠드 옆에 있는 휴대폰의 폴더를 열었다.

키리노였다.

나는 잠에서 깨며 생긴 짜증을 애써 억누르고 전화를 받았다.

 

오빠 안녕! 요즘 어떻게 지내? , 내 걱정은 안 해도 돼! 오빠가 생각하는 것처럼 잘 지내니까.”

 

누가 그런 걸 물어봤냐?

그리고 난 네 걱정 안 했거든?

내가 생각하는 것처럼 잘 지낸다는 건 무슨 똥개가 똥 밟고 미끄러지는 소리냐?

 

제발 부탁이니까 오래하지 마라... 환자한테 전화는 안 좋아.”

환자? 오빠 어디 아파?!”

선선하고 시원한 가을밤에 과다노동을 한 덕택으로 감기에 걸려서 누워있다.”

에이, 뭐야. 난 또 큰 병에 걸려서 병원에라도 실려 간 줄 알았잖아. 만약 그랬으면 내가 당장 달려가서 간호해주려고 했는데.”

 

큰 병에 걸린 다음 병원에 안 실려 가서 참 미안하구나.

 

어쨌든 아야세랑 치이는 잘 있지? , 오빠가 아프다면 지금 옆에서 아야세가 간호해주고 있겠네? 혹시 바꿔줄 수 있어?”

 

치이는 치토세에게 정을 담아 부르는 키리노만의 표현이다. 쉽게 말하면 애칭.

 

지금 집에 없어. 우리 친가에 갔거든.”

친가? 갑자기 왜?”

하느님의 계시인지 우연인지는 모르겠다만, 어머니도 나처럼 감기로 몸져누우셨다지 뭐냐. 아버지는 급한 일 때문에 집을 비우셔야 해서 나가시고. 나는 그렇다고 쳐도 어머니는 혼자 둘 수가 없잖아. 그래서 아야세가 돌봐드리러 갔어.”

뭐야, 그럼 오빠 혼자 있는 거야? 오빠는 누가 돌봐주고...”

치토세가 나를 오늘 하루 동안 돌보겠다고 나서더라. , 누굴 닮아서 그렇게 고집이 센 건지 원.”

치이가?!”

 

이게 뭐 놀랄 일이라고.

키리노가 소스라치게 놀라며 큰 목소리로 외쳤다.

 

꺄아아!! 나도 치이가 간호해준다면 몇 번이고 아프고 싶어! 치이랑 뺨을 부비부비하면 어떤 병이든 감쪽같이 다 나을 것 같단 말이지!!!”

 

그 말대로 뺨을 부비부비하다가 덩달아 치토세까지 아파버리면 어쩔 건데?

하여튼 키리노 이 녀석의 중증 시스콤은 나이를 몇이나 먹어도 고쳐질 기미가 안 보인다.

하기야, 나도 남 말 할 처지는 못 된다. 나 역시 아야세가 옆에서 간호해준다면 몇 번이고 아프고 싶으니까.

 

, 맞다. 키리노. 너한테 좀 묻고 싶은 게 있는데.”

 

아주 잠깐이지만, 치토세 얘기가 나오니 갑자기 뇌리를 스쳐 떠오른 것이 있었다.

 

? 뭔데?”

요즘 치토세가 하는 행동이나 말하는 걸 보면... 엄마를 꼭 경쟁상대로 보는 것 같단 말이야. 예를 들면, 나한테 죽 먹여주는 모습을 보고 뺨을 부풀리고 뾰로통한 표정을 짓는다던가, 뭔가 혼자하기 힘들 것 같아서 엄마를 모셔오라고 하면 버럭 화를 낸다든가... 하여튼 좀 이상해. 혹시 왜 이러는 지 아냐?”

그건... 혹시 엘렉트라 콤플렉스(Electra Complex)아닐까?”

, 엘렉트라... 뭐라고?”

 

태어나서 처음 들어보는 말이다.

시스터 콤플렉스, 브라더 콤플렉스, 파더 콤플렉스, 마더 콤플렉스 말고도 또 콤플렉스가 있나?

 

엘렉트라 콤플렉스. 아빠를 동경해서 엄마를 경쟁상대로 보는 여자아이들의 심리상태를 말하는 거야. 이거와는 반대로 남자아이가 엄마를 동경해서 아빠를 경쟁상대로 보는 오이디푸스 콤플렉스(Oedipus Complex)라는 말도 있어. 어쨌든, 쉽게 말하면 엘렉트라 콤플렉스는 파더콤과 비슷한 거라고 보면 되겠지.”

혹시 심각한 거냐? 성장해서도 정신적으로 문제가 생긴다거나, 아니면 엄마를 계속 경쟁상대로 본다거나...”

치이만한 애들한테서 주로 나타나는 심리상태고, 성장하면서 차차 없어지는 거니까 너무 걱정할 필요는 없어. 파더콤처럼 나이 들어서도 가져가는 증후군은 아니야.”

에휴... 그렇다니 다행이다.”

 

나는 잠시나마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하지만, 오빠도 딸을 키우는 아빠니까 이건 알아둘 필요가 있어. 아빠한테서 많은 애정을 받지 못한 딸들이 나중에 성장해서 파더콤에 걸리는 일이 많아. 원조교제가 그것 때문에 일어나는 거야. 아빠 때문에 생긴 애정결핍 때문에. 그런 애들은 성장해서도 자신보다 나이가 많은 남자, 아빠 같은 남자, 아빠를 대신할 수 있는 남자만 찾게 되지. 그런 사람들을 통해 아빠에게 못 받은 사랑을 채우려고 해.”

 

키리노의 장황한 설명을 듣고 나는 잠시 침묵했다.

치토세의 심리 상태가 단순한 엘렉트라 콤플렉스를 겪고 있는 상태라면 성장의 한 일환으로 조용히 넘어갈 수도 있겠지만, 혹여나 파더 콤플렉스라면 심각하게 생각해봐야 한다.

지금까지 치토세가 태어나고 7년 간, 내가 치토세에게 아빠로서 뭘 해줬는지 골똘히 생각해봐도 잘 생각나지 않는다.

물론, 퇴근할 때마다 목욕탕도 같이 들어가고 잠도 같이 자주는 등 아빠로서 해줄 수 있는 최소한의 것은 해주었지만...

요즘처럼 일이 바쁜 시기에는 전혀 신경도 못 써주는 일이 많다.

막 태어난 치토세를 처음 봤을 때의 나는 이 아이를 순수하게 키우고 싶다는 소망을 갖고 있었지만, 어느 새엔가 그런 소망은 전부 기억의 어둠 속에 묻혀버린 지 오래였다.

 

네 얘기를 좀 듣고 나니까 알 것도 같다. 하긴, 엘렉트라 콤플렉스든 파더 콤플렉스든... 결국 나 때문에 그런다는 거 아니냐.”

엘렉트라인지 파더콤인지 확실한 건 아니잖아. 풀 죽을 것 없어.”

에휴, 정말 나라는 놈은 왜 항상 이 모양인지 모르겠다.”

치이는 어른스러운 애니까 걱정 안 해도 되겠지만... 정 신경 쓰인다면 지금부터라도 애정표현을 더 많이 해주는 게 어떨까?”

그래, 좋은 생각이다.”

 

어린 인간이 성인으로 성장하려면 자신 스스로 성장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 성장할 수 있는 발판을 놔주는 데에는 부모의 몫이 가장 크다.

역시 부모노릇이라는 게 그렇게 쉬운 일은 아니구나.

내가 직접 부모가 되어보니, 나랑 키리노를 키워주신 어머니와 아버지가 평소보다 훨씬 더 존경스럽게 느껴졌다.

그리고 치토세와 같은 여자입장에 서서 내 의문을 풀어준 키리노에게도 고마움을 느꼈다.

 

정말 고맙다. 덕분에 좋은 걸 많이 알았어. 너란 녀석도 가끔은 도움이 될 때가 있구나?”

가끔이라니? 난 언제나 오빠한테 도움이 되잖아?”

그래, 네 마음대로 생각해라. 어쨌든 아야세랑 통화하려면 집에다가 전화해 봐. 하는 김에 어머니한테 안부도 전해드리고.”

알았어. 그럼 나중에 또 전화할 테니까 푹 쉬어.”

.”

 

나와 키리노는 동시에 전화를 끊었다.

 

. . .

 

나와 쿠로네코 아줌마는 생강과 식초 등 약이라고 생각하기엔 좀 무리가 있는 물건들을 사들고 상점가를 나왔습니다.

이런 걸로 정말 아빠의 감기를 낫게 할 수 있는 거야?

 

저기, 아줌마. 이런 걸로 정말 아빠의 감기를 낫게 할 수 있는 거예요?”

 

나는 의문과 의아함이 가득 찬 표정을 짓고 아줌마에게 질문했습니다.

 

후후훗... 물론이야. 난 이런 것 가지곤 절대 거짓말 안 하거든. 아까도 얘기했지만, 생강차랑 식초만 있어도 감기 하나 쯤은 쉽게 이겨낼 수 있어.”

 

아줌마와 함께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며 중앙공원을 넘고 집들이 즐비한 골목길을 걷다보니 어느 새 우리 집으로 통하는 네거리가 나왔습니다.

 

난 여기서 헤어져야겠다. 치토세. 그 생강차를 물에 넣고 잘 달여서 아빠한테 드려봐.”

생강차를요?”

생강차는 소화불량이나 설사, 구토에도 효과가 있지만, 혈액순환을 촉진해주고 몸의 열을 내려주는 효과도 있거든. 그래서 우리나라에선 예로부터 감기약으로 쓰기도 했지.”

우와, 그렇구나. 저 몰랐어요. 그럼 이것만 있으면 감기가 나을 수 있는 거예요?”

물론이지.”

 

생강차에 그런 효과가 있다는 건 오늘 아줌마를 통해서 처음 알았습니다.

그런데... 식초는?

 

이 식초는 어떻게 쓰면 돼요?”

식초는 말이야. 약간 방법이 좀 특이해서. 물론 너라면 무리 없이 할 수 있겠지? 하지만 그 비치타락천사는 100번 죽었다 1000번을 다시 태어나도 절대 못할 거야! 오호호호!!”

 

아줌마의 음흉한 웃음이 또 터져 나왔습니다.

나는 피부를 엄습해오는 한기를 애써 참으며 아줌마의 조언을 귀 기울여 들었습니다.

 

아줌마와 헤어지고 집으로 돌아온 나는 곧장 안방으로 올라갔습니다.

 

아빠, 다녀왔습니다.”

 

나는 주무시고 계신 아빠를 향해 인사를 했습니다.

너무 깊게 잠이 드신 건지, 아빠한테는 아무 반응이 없었습니다.

나는 곧 안방 문을 살며시 닫고 아래층 부엌으로 내려갔습니다.

 

냄비에 물을 넣고 끓이면 된다고 했었지.”

 

나는 냄비에 물을 넣은 뒤, 안에 생강차를 풀어놓은 다음 가스레인지 위에 올렸습니다.

불을 쓰는 일은 나에겐 매우 쉬웠습니다.

평소 엄마가 하시던 걸 옆에서 유심히 지켜봤거든요.

그렇게 10분 정도 끓이고 난 후, 국자로 차를 푼 다음 아빠가 쓰시는 컵에 옮겨 담았습니다.

컵을 쟁반에 올려놓고, 조심스레 2층 안방을 향해 계단을 올라갔습니다.

 

아빠, 잠깐 일어나보세요.”

 

나는 스탠드 옆에 생강차를 잠시 놓아두고, 곤히 주무시는 아빠를 흔들어 깨웠습니다.

흔들림에 반응한 아빠의 눈이 천천히 떠졌습니다.

 

, 치토세구나? ?”

생강차를 끓여왔어요. 한 번 마셔보세요.”

생강차를? 그래, 알았어.”

 

아빠는 생강차가 담긴 컵을 조심스레 들고 천천히 입 안으로 차를 털어 넣었습니다.

 

맛있구나.”

 

아빠가 차를 다 드시고 난 후, 나를 향해 점잖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습니다.

 

이거 드시고 꼭 나으셔야 해요?”

물론이지. 벌써부터 몸이 개운해지는 것 같은데? 고맙다.”

고맙긴요. 제가 누구에요, 아빠 딸이잖아요. 저는 뭐든지 잘 할 수 있어요.”

그럼, 그래야 우리 딸이지.”

다 드셨으면 이리 주세요. 정리하고 올게요.”

 

나는 아빠에게서 컵을 받아든 후 부엌으로 내려가 컵을 씻었습니다.

생강차를 드렸으니, 이제 아줌마가 가르쳐준 두 번째 방법을 실행에 옮길 차례였습니다.

나는 욕실에서 작은 대야에 따뜻한 온수를 받고, 상점가에서 사온 식초를 물에 풀었습니다.

그 다음으로, 다른 대야에 물을 받고 수건들을 넣어서 푹 적신 다음 있는 힘껏 쥐어짰습니다.

 

나는 식초와 온수를 섞은 대야와 수건들을 들고 2층까지 조심스레 올라갔습니다.

식초에서 나는 시큼하고 코를 찌르는 냄새는 좀처럼 참기 어려웠지만, 이렇게 해서라도 아빠를 낫게 할 수 있다면 이런 냄새쯤은 아무 것도 아니었습니다.

안방 문을 열고 들어가자, 마침 주무시지 않고 깨어계시던 아빠가 나를 맞이해주었습니다.

 

아니, 왜 세숫대야를 여기까지 갖고 올라온 거니?”

약 사러가다가 쿠로네코 아줌마를 만났는데요. 아줌마가 민간요법만으로도 감기를 낫게 할 수 있다고, 저한테 방법을 가르쳐주셨어요.”

쿠로네코가? 그렇구나. 생강차 끓이는 건 아줌마한테 배운 거니?”

. 그리고 이것도요.”

! , 잠깐만! 그 세숫대야에 뭘 넣어온 거니? 시큼한 냄새가 진동하는데?”

 

아빠는 세숫대야에서 올라오는 식초냄새를 견디지 못하고 양손으로 코를 막았습니다.

아빠의 반응이 그러하듯 나에게도 식초냄새는 불쾌했지만, 그래도 아빠의 감기를 낫게 하려면 어쩔 수가 없었습니다.

 

아줌마가 가르쳐주신 방법이에요. 러시아에서는 감기 걸리면 이렇게 한데요.”

, 아니 생강차면 됐지 굳이 이렇게 할 필요까진 없잖아?!”

안 돼요! 아빠가 기운을 차리려면 이 방법이 제일 확실해요!”

 

나는 침대 위로 올라가 아빠의 잠옷을 위에서부터 벗기기 시작했습니다.

 

, 치토세! 너 갑자기 왜 이렇게 적극적인... 아니! 그게 아니잖아! 대체 무슨 방법인데 옷을 벗기려는 거야?!”

식초를 가득 바른 수건으로 온 몸을 닦아주면 열이 내리고 감기가 낫는다고 했어요! , 어서 벗으세요!”

이것 말고 더 얌전한 방법은 없는 거니?!”

 

아빠는 옷을 벗기려는 내 손을 잡고 낑낑대며 버텼습니다.

나 또한 내 손을 잡고 버티는 아빠의 손을 빼내려 온 정신을 집중했습니다.

 

. . .

 

쿠로네코 녀석... 왜 얌전하고 순수한 애한테 이런 방법을 가르쳐줘서 나를 곤란하게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두고 봐라. 언젠가 이 빚을 꼭 갚고 말거다!

녀석이 치토세한테 가르쳐준 방법이란 건, 미지근한 물에 적신 수건이나 시트에다 식초를 잔뜩 발라서 환자의 온 몸을 닦아주는 방법이었다.

미국 대표 노스캐롤라이나 주의 브레너 어린이 병원에서도 인정한 민간요법이란다.

이런 방법을 쓰는 러시아의 엄마들도 기가 찰 노릇이지만, 이런 방법을 아무것도 모르는 애한테 가르쳐준 쿠로네코도 참 기가 역류해 넘칠 노릇이다.

결국 내가 설득하고 또 설득하고, 귀에 딱지가 앉히도록 치토세한테 간곡히 간청한 덕분에 온 몸에 식초냄새가 배는 일은 막았다.

 

에휴... 참 부모노릇이라는 게 이렇게 힘든 거구만.”

 

나는 침대에 드러누운 채 천장이 내려앉도록 푹 한숨을 쉬었다.

어쨌든 생강차의 효과가 벌써 나타난 듯, 몸이 꽤 개운해져서 이젠 누구의 부축 없이 충분히 움직일 수 있을만한 힘이 생겼다.

 

치토세 얘가 이번엔 뭘 하고 있으려나. 한 번에 내려가 볼까?”

 

치토세가 혹여나 또 이상한 짓을 하고 있진 않을까, 불안한 생각이 들어 나는 안방을 나와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계단을 하나하나 내려갈 때마다 음식 냄새가 점점 강해졌다.

아니, 우리 집에서 요리하는 사람이 아야세 말고 또 있었나?

나는 계단 너머를 통해 보이는 부엌을 유심히 지켜보았다.

앞치마를 두른 치토세가 식탁과 싱크대를 왔다 갔다 하며 동분서주하는 모습이 보였다.

 

아니, 치토세가?”

 

혹시 옆에 다른 사람이라도 있나 해서 부엌 주변을 이리저리 살펴보았지만,

아무리 봐도 집에 있는 사람이라곤 나와 치토세 뿐인 듯싶었다.

 

? 아빠, 일어나셨어요?”

 

열심히 왔다 갔다 하던 치토세가 나를 발견하자 잠시 제자리에 멈춰 서서 말했다.

 

아니, 이걸 다 네가 차린 거니?”

 

식탁 위에는 두 사람이 먹을 만한 양의 식사가 차려져있었다.

 

. 앉아서 조금만 기다려주세요. 곧 끝날 거예요.”

 

일단 그 말대로 식탁 앞에 앉긴 앉는다만.

식탁 위를 유심히 살펴보니, 아야세가 차려주는 식사와 비교해도 손색이 없을 만큼 잘 준비 되어 있었다.

진수성찬이란 생각이 절로 들었다.

물론 치토세는 일에 바쁜 나보다 주부인 아야세랑 집에 함께 있는 시간이 더 많을 테니 요리 한 두 개 쯤 배워놓는 건 일도 아니겠지만, 이 정도면 어중간한 어른들 이상의 솜씨다.

내가 봐도 감탄스러운데 요리를 오달지게 못하는 키리노가 보면 정신이 붕괴돼서 뒤로 자빠질 것이다.

 

준비 끝! 배 많이 고프셨죠? 어서 드세요.”

, 그래. 잘 먹겠습니다.”

 

밥그릇을 들기 전 창문 밖을 바라보니 벌써 황혼이 지고 있었다.

시간에 맞춰 식사 준비할 생각도 다 하고, 참 기특하기도 하지.

나는 치토세와 단 둘이 식탁에 마주보고 앉아 저녁식사를 시작했다.

 

, 이 감자조림은 네 엄마가 해주는 거랑 완전 똑같다? 맛있어. 그리고 된장국도... 캬아! 이 얼큰한 맛! 언제 요리를 다 배운 거니?”

엄마가 가르쳐주셨어요. 이런 일들은 어릴 때부터 다 할 줄 알아야 한다고 하시면서요.”

그래? 정말 맛있구나. 하하하, 이거야 원. 이 정도면 우리 치토세 시집보내도 되겠는데?”

싫어요. 나 결혼 안 할 거야. 엄마아빠랑 쭈욱~ 행복하게 살 거예요.”

농담이야, 농담. 크큭, 엄마 닮아서 농담 이해 못하는 것도 똑같구나?”

 

치토세가 어른스럽게 성장하는 것은 좋은 일이지만, 다른 관점으로 보면 점점 나와 아야세의 곁에서 멀어진다는 것도 된다.

우리 부모님도 나와 키리노를 키우면서 이런 생각이 드셨을까?

 

덕분에 감기도 말짱히 다 나았어. 고맙다.”

 

나는 얼굴에 점잖은 미소를 짓고 치토세에게 고마움을 표현했다.

하지만 어째서인지 치토세는 아무 반응도 하지 않았다.

 

치토세?”

 

내가 자리에서 일어나 치토세의 얼굴을 유심히 바라보았다.

3초를 넘게 바라봐도 전혀 움직임이 없다.

눈도 깜빡이지 않고 있다.

더 자세히 들여다보니, 치토세는 두 눈을 감고 앉은 채로 졸고 있었다.

 

하긴, 피곤했겠지.”

 

나는 치토세를 안아들고 계단을 통해 2층 방으로 갔다.

그 후 앞치마를 벗긴 뒤 살며시 침대에 눕히고 위에 이불을 덮어주었다.

 

따르르르릉!”

 

1층에서 전화벨 소리가 울린다.

나는 얼른 치토세에게 이불을 덮어주고, 1층 현관 앞에 있는 전화 앞으로 내려가 수화기를 들었다.

 

여보세요?”

어머, 오빠? 감기는요? 괜찮아요?”

 

아야세의 전화였다.

 

, 말짱해.”

괜찮다니 다행이에요. 어머님도 이제 거의 다 나으셔서, 내일아침이면 집에 갈 수 있을 것 같아요. , 그렇지. 치토세는 지금 뭐해요?”

나를 돌보면서 집안일까지 하느라 그런지, 피곤해서 잠들어버렸어.”

그래요? 정말, 우리 딸이긴 하지만 치토세는 참 어른스럽네요. 엄마인 내가 봐도 대단할 정도예요.”

너무 대단해서 내 온 몸에 식초냄새가 밸 번하기도 했지.”

? 식초냄새? 그게 무슨 소리에요?”

하하하... 아니, 농담이니까 너무 신경 쓰지 마. 어쨌든 이번 주말에 말인데, 가족끼리 어딘가 외출하는 게 어때? 어딜 가볼까. 놀이공원이라도 갈까?”

 

몇 시간 전까지만 해도 나는 치토세의 심리상태에 대해 걱정하고 고민했다.

그랬지만...

이젠 치토세가 엘렉트라 콤플렉스든, 파더콤 증세를 보이든 상관없다.

내가 아빠로서의 충분한 애정을 선물해주면 쉽게 끝날 문제니까.

 

전화를 끊고 나서 나는 다시 치토세의 방에 올라갔다.

조용히 문을 열고 들어가니, 치토세는 누가 업어 가도 모를 만큼 곤히 자고 있었다.

어린애들은 잘 때만큼만은 누구나 다 천사가 된다더니, 사실이었다.

하지만 치토세만은 잘 때만 천사인 다른 아이들과 다르다.

이 아이는 나와 여신 아야세 사이에서 태어난, 우리 집의 천사다.

자고 있으나 깨어 있으나, 언제나 밝고 환한 미소를 만인에게 선물해주는 천사다.

나는 그런 천사의 사랑을 한 몸에 받는 세상에서 가장 축복받은 아빠다.

 

좋은 꿈꾸렴.”

 

나는 치토세의 이마에 살며시 입맞춤을 해주었다.

자다가 내 입맞춤의 감촉을 느낀 듯, 치토세의 곤히 자는 얼굴에 환한 미소가 드리워졌다.

나는 혹여나 치토세가 깰까봐, 최대한 발소리를 내지 않으며 조용히 방문을 열고 나가려했다.

 

아빠... 사랑해요...”

 

치토세가 잠꼬대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래, 아빠도 사랑한다.

 

고맙다, 아빠 딸.

그리고 앞으로도 무럭무럭 잘 자라주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