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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터블 후일담 창작 단편 6. 마음 속의 어둠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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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터블 후일담 창작 단편 6. 마음 속의 어둠

히아신스v 2024. 1. 20. 13:30

이번 팬픽은 신혼여행을 간 쿄스케 부부 앞에 벌어진 사건을 다루는 내용입니다.

시점변경 없이 쿄스케의 시점에서만 이야기가 진행되며, 본래 내여귀 본편이나 포터블 등엔 나오지 않는 글쓴이의 가공인물들이 또 다른 메인이 될 것입니다.

원작과 비교해 다소 어색하더라도 팬픽이니 그러려니 하고 재밌게 감상해주세요.

 

 

이 일은 나와 아야세가 바닷가 마을로 신혼여행을 갔을 때 있었던 일이다.

 

우연히 플래그가 꽂혀버린 여동생의 친구와 결혼하게 되었다.

결혼식이 막 끝난 후, 나와 그녀는 편한 옷차림으로 갈아입은 뒤 소박한 시골로 신혼여행을 떠났다.

여기까지 오기의 과정들을 되새겨보면, 시도 때도 없이 손목에 수갑이 채워지고 살해위협을 받는 등 우여곡절들이 많았다. 하지만 그게 다 나를 향한 애정표현이라는 걸 알았을 땐 그녀가 평소보다 더 귀엽게 느껴졌다.

그녀의 이름은 바로 아라가키 아야세. 아니, 이젠 코우사카 아야세겠구나.

지인들의 축복 속에 나와 아야세는 행복하게 맺어졌다.

만인의 사랑을 받는 이 순수하고 청초한 아이를 팔자에도 없어야 정상인 내가 독점해버린 거다.

 

나와 아야세가 향한 곳은 어머니의 친척 아줌마가 운영하는 바닷가 여관이 있는 장소였다.

왜 굳이 이곳을 신혼여행 장소로 정했는가 하면, 가까워서 정한 것도 있지만 가장 큰 이유는 취향 때문이었다.

집안에서는 하와이나 괌, 또는 몰디브 등의 외국 섬으로 가라고 등을 밀기도 했지만, 검소한 취향이었던 나와는 별로 맞지 않아 거절했다.

 

교과서에서나 보던 풍경들이 아직까지 남아있다니, 대단하네요.”

그러게 말이야.”

 

버스를 타고 목적지를 가는 우리 부부의 눈앞에 일말의 훼손도 없는 아름다운 언덕과 어우러진 바닷가의 모습이 비춰졌다.

인간의 손길이 닿지 않은 자연이 아직도 있다니, 참 아름다운 곳이다.

반대로 생각하면 그만큼 시골이라는 뜻도 된다.

 

제가 이런 데로 오고 싶었다는 걸 어떻게 안 거예요?”

어떻게 알긴. 사실 몰랐어. 순전 내 취향대로 한 것뿐이야.”

어머나, 그랬어요? 순전 오빠 취향대로 한 거였군요?”

그래. 큭큭... 이익!?”

 

무심코 옆자리에 있는 아야세의 얼굴을 바라보니, 어느 새 두 눈의 동공이 열려있었다.

그리고 나로 하여금 살해위협과 공포심을 유발하는 검은 오로라까지...

 

, 아냐! 당연히 네 취향도 알고 있었지! 그럼! 그게 정상이잖아? 하하하...”

 

아야세의 두 눈의 동공이 열린다는 곳은 곧, 저 세상으로의 초대장이 왔음을 뜻한다.

나는 애써 아야세의 기분에 맞춰 아부를 떨었다.

 

그럼요, 그래야 제 낭군이죠.”

그렇고말고. 하하하...”

 

하여튼 아야세 얘는... 어떻게 사람이 천사와 악마의 양면을 모두 갖고 있을 수 있는지 볼 때마다 신기하다.

그런 양날도끼처럼 위험천만한 아이를 독점하게 된 나 자신도 신기하고,

별 볼품없는 나한테 시집와준 아야세도 신기하다.

 

! 오빠, 보세요! 바다에요.”

어디?”

 

아야세가 가리킨 방향을 바라보니 푸르고 드넓은 봄의 바다가 펼쳐져있었다.

바다는 여름에 와서 봐야 제 빛을 발휘한다지만, 이렇게 단 둘이 여행을 올 땐 여느 때 오더라도 상관없는 듯하다.

 

정말 깨끗한 바다네? 여기 오길 잘 했지?”

. 기대 이상이에요.”

기대 이상이라니 다행... ?”

 

무심코 반대방향으로 고개를 돌린 나는 바다와 마주보고 있는 언덕을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우리가 타고 있는 버스가 달리는 도로 바로 옆에 있는 산과 붙어있는 언덕이었다.

키 작은 나무들이 듬성듬성 서 있는 그 언덕 위에...

여자가 서 있었다.

자세히 보기엔 조금 멀리 있어서 잘은 못 봤지만, 검고 긴 생머리를 가진 젊은 여자라는 것은 어찌어찌 알아볼 수 있었다.

 

저런 곳엔 뭐 하러 올라간 거지?”

 

때마침 언덕을 내려가는 중이었기에 버스의 속도는 꽤 늦었다.

그래서 나는 버스 창문 밖을 통해, 여자가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그 자리를 뚫어져라 지켜봤다.

내 시선을 의식한 듯, 여자의 시선이 바닷가에서 우리 부부가 타고 있는 버스로 옮겨졌다.

버스 밖에 있는 사람은 버스 안에 있는 사람이 자신을 뚫어지게 바라봐도 인기척이 실린 시선을 못 느끼는 게 보통이건만, 이상했다.

점점 멀어지고 있어서 여자가 무슨 표정을 지었는지까지는 볼 수 없었다.

잠시 후 어찌된 영문인지 방금까지 있던 여자는 처음부터 그 자리에 없었던 것처럼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렸다.

마치... 지우개로 지워버린 것처럼 홀연히.

 

뭐야, 대체?”

 

나는 눈을 비비고 다시 언덕을 봤지만 아무 것도 찾을 수 없었다.

참 귀신이 곡할 노릇이군.

 

오빠, 왜 그래요?”

? , 아니. 아무 것도 아니야.”

저 언덕에 뭐라도 있었어요?”

아무 것도 아니래도.”

 

갑자기 이유모를 오한과 소름이 끼쳐왔다.

설마, 유령을 본 건 아니겠지?

 

 

오랜 시간 버스를 타고 달려와 겨우 도착한 곳은 바닷가 바로 앞에 자리 잡은 작은 여관이었다.

여관 건물은 역사 교과서에서나 보던 전통 일본가옥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건물 이곳저곳에 보이는 낡음은 여관에 방문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세월의 흔적을 고스란히 보여주고 있었다.

낡은 것도 당연하다. 사야코 아줌마의 고조부부터 내려온 여관이라니까.

좀 낡았으면 어떤가. 이렇게 여행 온 부부가 만족스러워하는데.

다른 사람들에게 간섭받지 않고 단 둘이 시간을 보낼 수 있는 장소는 이렇게 약간 외지고 조용한 곳이 제격이다.

나와 아야세가 현관문을 넘어 카운터 앞으로 가자 사야코 아줌마가 맞아주었다.

 

어머, 쿄스케구나? 기다리고 있었단다.”

아주머니도 그동안 안녕하셨어요?”

새파랗게 어릴 때 한 번 보고 못 봤던 애가 벌써 새 신랑이라니. 세월이 참 빨라.”

아주머니도 여전하신 게 보기 좋네요.”

그나저나 요시노. 아니, 너희 어머니는 잘 계시니?”

너무 잘 계셔서 걱정이 안 되는 걸요, .”

 

여관 주인아주머니의 성함은 나카오 사야코(가공인물). 어머니 쪽 친척이시다.

또한 오래 전에 남편 분을 먼저 떠나보낸 과부이시다.

나와 키리노가 한창 어릴 때 한 번 뵌 것 말고는 그다지 만난 적이 없어 잘은 기억나지 않지만...

원래 어중간한 중년 아주머니들은 대부분 다 나이를 속이려고(?) 안달이건만, 이분은 별나게 나이 대에 맞춰 잘 다림질된 기모노를 입고 얼굴주름을 그대로 드러내고 계셨다.

그거 하나만큼은 어린 시절의 우리 남매에게도 확실히 각인되어 있다.

 

, 네가 쿄스케의...?”

처음 뵙겠습니다. 아야세라고 합니다.”

그래. 난 사야코란다. , 쿄스케 너 보기보다 능력 좋구나? 이렇게 예쁜 색시를 어디서 찾은 거니?”

과찬이세요.”

 

아주머니는 아야세를 위아래로 한 번씩 훑어보곤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하긴, 아야세가 예쁜 애라는 건 이미 공인된 사실이다.

부인이 칭찬을 받으면 남편 기분도 덩달아 좋아진다더니 과연 사실이구나.

 

현관 앞에 쭉 세워놓는 것도 미안하니까 어서 들어오려무나. 어디보자, 어떤 방이 좋을까?”

어떤 방이든 크게 상관없어요.”

신혼부부인데 분위기 근사한 방으로 골라줘야지. 너희 어머니한테 얘기 다 들었단다.”

어머니! 청소 다 끝났어요.”

 

카운터 왼편 복도에서 젊은 여자의 목소리와 발자국 소리가 들려왔다.

발자국 소리는 천천히 아줌마와 우리 부부가 있는 카운터 앞으로 가까워져왔다.

 

, 라이사니? 그래, 수고했다.”

 

붉은 기모노 차림에 약간 구릿빛을 띄고 끝이 뾰족하게 갈라진 짧은 머리를 한 여자가 카운터 앞으로 왔다.

라이사라고 불린 이 여자, 얼굴을 보아하니 주름 하나도 없다. 척 봐도 나와 아야세랑 별로 나이차가 나지 않을 만큼 젊어 보인다.

아니, 잠깐만. 라이사라고 했지? 어디서 들은 이름 같은데?

 

, 소개가 늦었구나. 오랜만에 만나는 거라 기억은 안 나겠지만 말이다. 얜 라이사란다. 나카오 라이사. 우리 집 큰 딸이야.”

 

아줌마가 우리 부부에게 자신의 딸을 소개했다.

나카오 라이사(가공인물)... , 생각났다!

라이사는 분명 나와 동갑내기 사촌이었다.

어머니랑 아주머니 사이에서 나온 우스갯소리 때문에 강제로 약혼까지 할 번했던 기억이 난다.

세월이 많이 흘렀으니, 내가 이렇게 큰 만큼 얘도 이렇게 컸구나.

 

라이사도 인사하렴. 네 사촌 쿄스케야. 생각나지? 그리고 그 옆엔 쿄스케 색시 아야세란다.”

안녕하세요.”

 

아야세가 라이사를 향해 정중히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 너는?!”

?”

 

라이사는 자신을 바라보는 내 시선을 무시한 채, 아야세를 먼저 보고는 소스라치게 놀라며 그녀의 양 어깨를 단단히 붙잡았다.

반면 아야세는 라이사의 이유를 알 수 없는 행동에 크게 당황하곤 어쩔 줄을 몰라 했다.

 

말도 안 돼, 네가 어떻게?!”

, 저기 다른 사람이랑 착각하신 것 같은데, 전 아야세에요. 코우사카 아야세라고요.”

... 미안해요. 너무 많이 닮아서...”

, 그러고 보니 너...”

 

라이사가 아야세한테서 손을 떼자마자, 이번엔 아주머니가 아야세를 뚫어져라 바라봤다.

 

어머나, 이럴 수가. 어쩌면 저렇게 똑같이 닮을 수가 있을까?”

두 사람 다 지금 무슨 소릴 하시는 거예요?”

, 미안하구나. 네 색시가 어떤 사람이랑 좀 많이 닮아서. 어쨌든 계속 그러고 있지 말고 어서 들어오려무나. 먼 길 오느라 피곤할 테니까 말이다.”

 

아주머니와 라이사는 내 질문에는 답해주지 않았다.

자기가 아는 사람이랑 닮은 사람을 봤다는 이유만으로 그렇게 소스라치게 놀랄 수 있는 건가?

그런 경우는 외나무다리에서 원수를 만난 사람이나 하는 반응인데.

그것 말고 다른 경우라면... 죽은 사람과 닮은 사람을 만났을 때 그런 반응이 나오기도 하지만, 현실에 그런 일은 어중간하면 없다. 추리 소설에서나 간혹 나오는 일이지.

 

 

나와 아야세가 머무를 방은 창문 너머로 바닷가가 훤히 잘 보이는 방이었다.

방 자체는 그렇게 넓지 않았지만 뭐, 이 정도면 우리 부부가 별 탈 없이 며칠 밤을 보내기에 충분하다.

신경 쓰지 않는 새 시간은 급류처럼 흘러, 어느 새 바닷가에는 황혼이 드리워져있었다.

 

오빠, 우리 바닷가에 한 번 나가봐요.”

그럴까? 마침 석양도 예쁘게 피었고. 가자!”

 

점점 바다 밑으로 사라져가는 태양이 만들어주는 석양은 아야세의 환한 미소 다음으로 아름다웠다.

나와 아야세는 아무도 없는 바닷가를 조용히, 천천히, 살며시, 단 둘이 거닐었다.

, 아야세와 단 둘이 석양이 지는 바닷가를 거닐고 있자니 앞으로 장래가 어떻게 될지 참 기대가 되는구나.

좋아, 이참에 앞으로 어떻게 살아갈지 의논이나 해보자.

 

아야세. 앞으로 말인데.”

분명 행복할 거예요. 오빠가 내 옆에 있으니까요.”

, 하하하... 그거야 뭐... 그래, 행복할 거다. 사랑스러운 천사님이 내 옆에 있으니까.”

 

아야세가 그렇게 얘기하니, 나도 절로 그렇게 얘기하게 되어버리는군.

혹시 내가 무슨 얘기를 꺼낼지 다 알고 있었던 게 아닐까?

 

그러니까 앞으로 있잖아.”

전 앞으로 오빠가 저 말고 다른 여자한테 조금이라도 찝쩍대면 그 자리에서 두들겨 팰 거고요, 혹여나 불륜이라도 저지르면 손이랑 발목에다가 수갑을 채워서 꽁꽁 묶은 다음에 거세해버릴 거고, ...”

, 저기... 너 지금 엄청 위험한 얘기 하고 있는 거 알아?”

후훗. 오빠가 잘 하면 되잖아요. 또 전 오빠를 믿는 걸요. 안 그럴 거라고.”

 

물론 나는 타인의 믿음을 져 버릴 만큼 파렴치한 녀석은 아니다.

믿는 상대가 아야세라면 더더욱 그렇다.

굳이 그런 소리를 안 해도 되건만, 물론 아야세의 과격한 표현들은 자세히 해석하면 애정표현이기 때문에 그냥 애교로 넘어가 줄 수도 있지만...

나처럼 귀에 딱지가 얹히도록 듣고 깨달음을 얻은 사람이 아니고서야 누가 그런 표현들을 애정표현이라 생각할까.

처음 듣는 사람 입장에선 반 강제협박으로 들리겠지.

결혼생활하면 또 자식 문제도 있고 하니, 한 번 얘기를 꺼내볼까?

 

우리 아이 말이야. 그러니까, 몇 명 낳으면 좋을까?”

 

아야세표 엔지게리가 날아오겠지.

난 목숨을 걸었다.

 

, 그건...”

 

내가 생각한 것과는 달리, 아야세는 얼굴에 홍조를 띄우고 부끄럽다는 반응을 했다.

 

둘만... 낳아요.”

 

의외로 대답이 빠른데?

게다가 나랑 생각도 맞는다.

 

, 나도 둘 쯤 낳자고 생각했는데. 역시 우린 뭔가 통하는 게... 끄악!!”

퍼억!!

 

예상이 완전히 빗나간 건 아니구나. 크큭.

아니나 다를까, 아야세의 엔지게리가 내 왼쪽 뺨에 작렬했다.

그걸 또 맞아주고 있는 나는 뭔지.

 

하여튼 이 변태! 그런 얘기를 왜 그렇게 대 놓고 하는 거예요?! 부끄럽잖아요! 그리고 왜 발차기를 그냥 맞아주는 건데요?! 많이 맞았으면 좀 알아서 피하라고요!”

그게 말이야, 피하면 천사에 대한 예의가 아니겠지 싶어서.”

, 예의가 아니라니! 반사적으로 나가는 거라 어쩔 수 없긴 하지만... 그래도 오빠가 다치는 모습은 보고 싶지 않단 말이에요. 다음엔 좀 피해요! 알았어요?”

그래, 알았다 알았어. 이제 날도 어두워졌고 슬슬 들어가... ?”

 

왜 항상 내가 무심코 고개를 돌려 시선을 바꾼 방향에서는 이상한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걸까?

바닷가와 인접해 있는 언덕 위에 누군가의 검은 그림자가 보였다.

꽤 높은 곳이라 언덕 위에 있는 사람이 누군지는 알 수 없었지만, 적어도 누군가가 있다는 것만은 확실히 알 수 있었다.

 

아야세, 저기 저 언덕 위 좀 봐봐.”

언덕이요? ? 누굴까요?”

누가 이런 시간에 저런 데서... 한 번 가볼까?”

그래요.”

 

나와 아야세는 바닷가에서 여관 뒤를 돌아 언덕으로 올라갔다.

언덕 위는 평원 못지않게 넓었다. 있는 거라곤 풀들이 전부였고, 제대로 서 있는 나무는 10그루도 채 되지 않았다.

이 정도면 날이 어둡더라도 누구나 쉽게 눈에 띈다.

 

아니, 잠깐만. 저 사람은...?”

 

나와 아야세는 자세를 낮추고 조심스레 언덕 끝을 향해 다가갔다.

우리 두 사람이 다가가면 갈수록, 검은 그림자의 주인이 누군지 알아보기가 쉬워졌다.

 

저 머리모양은... 라이사씨?”

? 라이사라고?”

 

우리 부부가 검은 그림자의 주인을 알아냄과 동시에, 은은하고 밝은 달빛이 언덕을 비추기 시작했다.

라이사가 확실하다.

달빛에 비춰져 구릿빛의 뾰족하고 짧은 머리가 더 밝게 빛났다.

그런데 이런 시간에 이런 언덕 위에서 대체 뭘 하고 있는 거지?

 

좀 더 가까이 가 봐요.”

안 돼, 여긴 별로 몸을 숨길만한 공간이 없는 걸. 차라리 그냥 앞에 나가보는 게 어때? 뭘 하는 지는 직접 물어보면 되잖아.”

그렇게 해요.”

 

나와 아야세는 애써 태연한 표정을 지으며 라이사에게 다가갔다.

 

라이사.”

!!”

 

내가 이름을 부르자 라이사는 소스라치게 놀라며 뒤로 벌러덩 넘어졌다.

 

, 뭐예요. 쿄스케랑 아야세군요? 여긴 어쩐 일로?”

 

라이사가 애써 태연함을 유지하며 말했다.

 

우린 이 바닷가 앞에 있었죠. 그러다가, 당신이 여기 있는 게 눈에 띄어서 한 번 와 봤는데. 이런데서 혼자 뭐하고 있는 거예요?”

별 일 아니에요! 그냥... 쓰레기 묻을 자리를 좀 만들고 있었어요.”

쓰레기 묻을 자리? 그런 건 보통 지형이 낮은 곳에다 만들지 않나요?”

, 그게... 우리 집은 바닷가 앞에 있어서 그런지 낮은 곳에다 묻으면 쓰레기가 다 바다로 흘러가버려서요! 그래서...”

, 그렇구나. 알았어요. 그럼 우리가 좀 도와줄까요? 셋이 하면 금방 끝날 텐데.”

아뇨! 이제 거의 다 했으니까 안 그래도 돼요! 그리고 손님한테 이런 일을 시킬 순 없죠.”

그래요? , 알았어요. 그럼 수고해요. 가자, 아야세.”

 

나랑 아야세는 방향을 돌려 여관을 향해서 언덕을 내려갔다.

라이사의 반응이 좀 이상했다.

내가 불렀을 때 소스라치게 놀라며 뒤로 자빠진 것도 그렇고,

이런 밤중에 언덕 위에 혼자 있었던 것도 그렇고,

뭔가 있는 건가?

 

라이사씨. 행동이 좀 부자연스럽지 않나요?”

그래, 보통 사람이 하는 행동은 아니지.”

 

그냥 그러려니 하자. 나나 아야세한테도 자신만의 사정이 있는 것처럼, 라이사에게도 자신만의 사정이 있을 테니.

 

말도 안 돼... 이건 말도 안 돼... 이럴 리가... 없는데... 그 애가...”

 

언덕 끝부분에서부터 라이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뭐가 말도 안 된다는 거지? 이럴 리가 없다는 건 무슨 소리고, 그리고 그 애는 또 누구람?

낮에는 아야세를 보고 벌벌 떨더니.

대체 왜?

 

 

조금 늦은 저녁식사를 하는 내내, 나는 오늘 라이사가 한 행동들에 대한 생각만 주구장창 했다.

나와 아야세는 작은 탁자를 사이에 둔 채 마주보고 앉아 조용히 밥을 먹고 있었다.

때마침 아주머니도 옆에 계시면서 지은 식사를 손수 퍼주시고 계신다.

이럴 때말곤 좀처럼 말할 기회가 없을 것 같으니, 한 번 말해보자.

 

, 있잖아요. 아주머니.”

?”

생각해보니까, 이 집에 라이사 말고 딸이 한 명 더 있지 않았나요?”

 

갑자기 생각났다.

분명 이 여관에는 딸이 두 명이 있었다.

다만 만난 지가 너무 오래돼서 이름이 생각나지 않았을 뿐이지.

 

왜 갑자기 그런 걸 묻는 거니?”

 

아주머니가 밥주걱을 내려놓고 나를 바라보며 말씀하셨다.

 

그냥... 저기. 오늘 라이사를 보고 갑자기 생각났어요. 이름이랑 얼굴은 잘 기억이 안 나지만, 하여튼 한 명 더 있었던 것 같은데...”

 

나는 무심코 아주머니의 얼굴을 바라봤다.

대충 예상은 했던 일이지만 역시나.

아주머니의 표정은 심각하게 일그러져있었다.

손님인 주제에 남의 집안 사정을 자세히 알려고 하는 것도 예의가 아니니 이쯤에서...

 

그래. 그 말대로, 우리 집엔 딸이 두 명 있었단다. 라이사하고... , 2살 동생이었던 리이사.”

 

질문을 접을까 했더니 바로 대답해주시네?

 

리이사? , 이름이 리이사구나. 걘 지금 어디 있어요?”

 

또 다른 딸의 이름은 리이사였다.

나하고 동갑인 라이사보다 2살 어리다면, 쿠로네코와 동갑인 셈이다.

어디 있냐는 질문에 아줌마는 표정이 일그러진 것도 모자라 인상을 찌푸렸다.

진짜 그만할까?

 

지금 여기 없단다.”

여기 없는 건 알아요. 그러니까 구체적으로 어디에...”

그 애는... 죽었어.”

?!”

 

리이사가 죽었다는 말에 나와 아야세는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동시에 놀라움을 표현했다.

 

, 죽었다니... 어쩌다가요?”

 

아야세가 아주머니에게 질문했다.

 

하아...”

 

아주머니가 땅이 꺼지도록 한숨을 푹 쉬었다.

 

, 말씀하고 싶지 않으시면 안 하셔도...”

아니. 이 얘긴 해줘야겠다. 오늘 낮에 라이사가 소란을 피운 건 미안했다. 아마, 아야세 네가 리이사랑 많이 닮아서 잠시 착각했던 걸지도 모르겠구나.”

? 아야세가요?”

 

우리는 서로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걔네 둘은 어중간한 자매들보다도 훨씬 사이가 좋았단다. 어찌나 사이가 좋았으면 단순한 자매애라고 보기 힘들 정도였지.”

그런데, 리이사는 어쩌다가 죽은 거죠?”

자살했단다.”

? 자살?”

 

나와 아야세는 또 한 번 소스라치게 놀랐다.

 

시체는 찾을 수가 없었고, 단지... 저 바닷가 절벽 위에서 피 묻은 칼과 유서만 발견되었단다. 그걸 보니 자살이 확실했지... 자살할 이유 따윈 없는 아이인 줄 알았건만...”

 

아주머니의 양쪽 눈에 눈물이 고이기 시작했다.

, 이런. 괜한 걸 물어본 모양이다.

 

죄송합니다, 아주머니. 저희가 괜한 걸 물어본 모양이네요.”

괜한 걸 물어보긴 무슨. 우리 친척이니까 당연히 알아야지. , 맞다. 리이사 사진이나 한 번 봐 볼래?”

? 그래도 되나요?”

물론이지.”

 

아주머니는 잠시 우리 방을 나가 자신의 방으로 가셨다.

이윽고 아주머니는 앨범 하나를 가지고 다시 돌아오셨다.

나와 아야세는 아주머니가 앨범을 한 장 한 장 넘기는 걸 유심히 지켜봤다.

아주머니의 앨범을 넘기는 손이 멈췄다.

 

, 보려무나. 얘가 리이사란다.”

 

나와 아야세의 시선이 아주머니가 손가락으로 가리킨 방향에 멈췄다.

두 사람이 찍힌 사진이었다.

활짝 미소를 지은 라이사가 왼쪽에 나와 있다.

그리고 그 바로 옆엔... 과연 아주머니랑 라이사가 아야세를 보고 깜짝 놀랄 만도 했다.

내 옆의 아야세를 있는 그대로 옮겨놓은 것 같은, 검고 긴 생머리의 청초한 여자가 나와 있었다.

이 애가 바로 리이사구나.

, 잠깐. 어쩐지 낯설지가 않다. 어디서 본 것 같은데?

 

얘는...”

기억난 거니? 어렸을 때 딱 한 번 본거라 잘 생각은 안 나겠지만...”

아뇨, 그게 아니라... 어디서 본 것 같은데?”

그게 무슨 말이냐?”

잘못 본 건 아닌 것 같은데. 여기 오다가 바닷가 근처 언덕에서 닮은 사람을 본 것 같기도 하고...”

?!”

 

조금 먼 거리에 있어서 명확히 눈에 들어오진 않았지만, 아야세와 똑 닮은 검고 긴 생머리와 청초한 분위기는 확실히 기억하고 있다.

이렇게 자신만의 특징이 명확한 아이라면 누구에게나 쉽게 각인된다.

 

, 그야... 있잖아. 원래 세상엔 서로 닮은 사람들이 적어도 3명은 있다고 하잖니. 아마 닮은 사람일 거야. 그럼, 그렇고말고. 죽은 애가 어떻게 그런데서 그러고 있을 수가 있겠니? , 그렇고말고.”

 

당황스러우신 듯, 아주머니가 말을 더듬었다.

정말로 그냥, 단순히 닮은 사람이 언덕 위에서 바닷바람을 쬐고 있던 거라면 좋으련만.

하지만 그리 쉽게 매듭지어질 일은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이 드는 건 또 왜일까.

 

 

해가 완전히 저물고, 밝은 달이 한가운데 떠 있는 밤이 되었다.

평소 같았으면 별 탈 없이 잠을 청하고 있을 텐데.

잠자리에 들기 전부터 있었던 이상한 일들 때문에 오던 잠이 다 달아나버렸다.

어떻게든 자보려고 몸을 이리저리 뒤틀고 뒹굴었지만... 다 허사였다.

 

오빠, 왜 그래요?”

 

오른편 옆자리에 있던 아야세가 나를 불렀다.

 

나 때문에 깼구나? 미안, 도저히 잠이 안 와서 그래.”

저도 오빠처럼 잠이 안 와서 미치겠어요. 오늘 있었던 일들이 너무 신경 쓰여서.”

 

너도 신경 쓰였다고?

잘 맞는다는 건 알았지만 이 정도로 잘 맞을 줄은.

 

아주머니랑 라이사씨는 죽은 리이사씨한테 너무 구애(拘礙) 받는 것 같지 않아요?”

자기 가족인데 누군들 안 그러겠어? 아마 나라도 키리노가 갑자기 죽기라도 하면 그런 반응을 보일 지도 모르지.”

그렇지만, 두 분의 행동이 뭔가 부자연스러워요. 아무리 자기 가족이고, 죽은 사람과 닮은 사람을 봤다고 해도... 사람이 그렇게 소스라치게 놀랄 수가 있을까요?”

나도 그렇게 생각은 했어. 그런 반응은 좀처럼 안 나오는 반응이기는 해. 외나무다리에서 원수를 만났을 때나, 죽은 사람과 닮은 사람을 만났을 때. 그리고...”

 

이 세상에 절대로 존재해서는 안 될 존재를 만났을 때라고 해야겠지.

 

하지만 그런 일이 현실에 일어날 확률은 번개에 두 번 맞는 것보다 어려워. 하느님이 뒤에서 공작이라도 한다면 모를까...”

, 너무 신경 쓰여서 밤잠은 다 잔 것 같아요.”

할 수 없지. 잠깐 바닷가에 나가서 맞바람이라도 쐴까?”

좋아요.”

 

나와 아야세는 곧장 이불을 개고 자리에서 일어나 방을 나갔다.

현관을 향해 둘이 나란히 복도를 거닐고 있는데, 희미하게 빛이 새어나오는 방이 눈에 띄었다.

 

누구 방이지?”

 

나와 아야세는 빛이 비추지 않는 쪽에 무릎을 꿇고 걸터앉아 안에 있는 사람에게 들키지 않도록 천천히 미닫이문을 조금 열어봤다.

누구의 방인가 했더니, 라이사의 방이었다.

 

라이사씨에요.”

뭐하는 지 잠깐 지켜보자.”

 

라이사는 책 비슷한 것을 무릎에 올려놓고 한 장 한 장 넘기며 보고 있었다.

혹시 아주머니처럼 앨범이라도 보나?

 

리이사... 네가 간지도 벌써 1년이구나. 정말이지... 아직도 실감이 안 간다. 사람이 그렇게 갑자기 죽어버릴 수 있다니.”

 

자매관계가 좋았다더니 정말인가보다.

 

너랑 똑 닮은 사람이 오늘 우리여관에 왔어. 깜짝 놀랐다니까. 이 세상엔 서로 닮은 사람들이 적어도 3명은 있다지만... 걘 닮은 정도가 아니라 그냥 너 같았어. ... 참 살다보니 별 일도 다 있구나.”

 

말이 끝나자마자, 라이사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우리가 있는 미닫이문 앞으로 다가왔다.

이런, 위험하다! 사실 지금 우리가 하고 있는 일은 사생활 침해다. 얼른 도망치지 않으면 재앙이...!

 

그렇죠? 쿄스케, 아야세?”

 

우리 두 사람이 도망치기도 전에 미닫이문이 열려버렸다.

마치 우리가 지켜보고 있었다는 것을 다 알고 있었던 듯, 라이사의 얼굴표정은 의외로 평온했다.

 

 

우리 두 사람은 라이사와 평행선을 유지한 채 마주보고 앉아있었다.

우리가 프라이버시를 엿들었으니 그냥 넘어가진 않겠지.

분명 욕이 한 다발로...

 

하아... 괜히 폐를 끼쳐서 미안해요.”

 

분명 욕이 한 다발로 떨어질 거라 생각했건만, 내 예상은 보기 좋게 뒤집어졌다.

사과를 해야 할 쪽은 오히려 우리 같은데?

 

, 아뇨. 저희야말로 죄송해요.”

고의로 엿들은 건 아니었어요.”

오늘 낮에 제가 한 행동 때문에 신경 쓰여서 그런 걸 건데요, . 리이사가 죽으면서 집안에 안겨준 트라우마가 너무 커서 그랬어요.”

저기, 리이사는 대체 왜 자살을 한 걸까요?”

 

내 질문을 들은 라이사의 표정이 굳어졌다.

하지만 그녀는 이내 굳어진 표정을 푼 뒤 이야기를 시작했다.

 

그 애가 자살을 한 이유는 몰라요. 유서에는 단순히, 살고 싶지 않다. 세상이 너무 원망스럽다. 내가 세상에 태어난 이유를 모르겠다. 라고만 적혀있었거든요. 깜짝 놀랐죠. 그렇게 천진난만하고 밝고, 매사에 긍정적인 아이가 사실은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다니 말이에요.”

 

라이사의 시선이 땅바닥으로 향했다.

그녀에게서 신세를 한탄하는 것과 같은 한숨소리가 들려왔다.

 

아야세를 처음 봤을 때, 이 세상에 절대로 존재할 리 없는 애가 살아 있는 것을 보곤 내 양쪽 눈을 의심했어요. 다른 한편으로는 죽은 리이사가 다시 살아서 돌아온 것 같아 반갑기도 했지만...”

리이사씨는 구체적으로 어떤 사람이었나요?”

아까도 말했잖아요. 천진난만하고, 밝고, 매사에 긍정적인 아이였다고. 또 언제나 활짝 웃고 다녔죠. 나랑은 비교조차 되지 않을 만큼 마을 내에선 평판도 좋았고요.”

 

리이사에 대한 얘기를 하는 라이사의 표정이 약간 일그러졌다.

아주머니 말씀으론 둘이 친 자매 이상으로 친했다던데... 막상 본인에게서 얘기를 들어보니 꼭 그렇지만은 않았던 모양이다.

 

걘 여관 일도 잘했고, 마을 남자들의 관심도 한 몸에 받았죠. 하긴 그럴 만도 했어요. 검고 긴 머리에, 청초한 분위기까지. 이런 여자한테 끌리지 않을 남자는 어지간하면 없죠. 내가 남자라도 끌렸을 거예요. 그에 비하면 난 쓸데없이 선머슴 같아서 남자들이 피하기만 하고...”

아니에요. 라이사씨도 충분히 매력 있어요. 선머슴은 표현이 좀 과한 걸요? 남자처럼 씩씩한 여자를 좋아하는 남자들도 얼마나 많은데요.”

 

같은 여자로서 공감대가 조성된 건지, 아야세가 자신을 비하하고 있는 라이사를 위로했다.

 

쿄스케, 아야세. 정말... 두 사람이 너무 부러워요. 신혼부부지만... 너무 행복해보여요.”

, 그야... , 행복하죠.”

오빠, 행복하면 행복하다고 말하면 될 걸 왜 그렇게 말을 더듬는 거예요?”

내가 말을 더듬긴 언제 더듬었다고 그래?”

 

아야세의 눈의 동공이 또 풀리려 한다.

행복하니까, 아야세. 제발 눈의 동공은 풀지 마.

 

어쨌든 당신도 언젠가 좋은 남자를 만날 수 있을 거예요. 그리고 너무 자기 자신을 비하하진 말아요. 누구나 다 하나씩은 다른 사람에겐 없는 매력을 갖고 있기 마련이거든요.”

 

나도 모르게 주제 넘치는 말을 해버렸다.

별 매력도 없는 주제에 무슨 매력타령이람.

 

누구나 다 하나씩은 다른 사람에겐 없는 매력을 갖고 있다... 좋은 말이군요. 그래요. 여자들에겐 남자에겐 없는 매력이 있죠. 예를 들면, 양면의 얼굴이라던가.”

 

양면의 얼굴? 왜 갑자기 그런 말을 하지?

물론 맞는 말이기는 하다. 아야세한테도 천사의 얼굴과 악마의 얼굴, 두 가지 얼굴이 있으니까.

 

밤이 늦었군요. 얼마 안 있으면 아침이니까 어서 건너가보세요. 조금이라도 자 둬야 덜 피곤하죠.”

, . 실례했어요.”

 

나와 아야세는 자리를 훌훌 털고 일어나 방으로 돌아갔다.

하지만, 어쩐지. 라이사가 마지막에 한 말이 좀 미심쩍었다.

 

양면의 얼굴...”

 

 

다음 날 아침.

 

똑똑똑!

얘들아, 아침이다. 어서 일어들 나려무나.”

 

아주머니가 방의 미닫이문을 두드리며 우리를 깨웠다.

어찌어찌 깨우시는 목소리에 일어나긴 했지만,

지난 날 독특한 일 때문에 신경 쓰여서 잠을 많이 못 잤으니 온 몸이 찌뿌드드했다.

 

지난 날 밤, 라이사와 나눈 대화가 너무 신경이 쓰였던 나머지, 나는 아침식사를 조금도 넘기지 못했다.

 

오빠, 어디 안 좋아요?”

 

바로 옆에 앉아 식사하고 있던 아야세가 젓가락을 놓고 말했다.

 

아니, 아무 것도 아냐.”

 

나는 얼른 젓가락을 들고 밥을 한 움큼씩 잡고 입 속으로 밀어 넣었다.

 

라이사씨도 참 안 됐어요. 그렇게 아끼던 동생을 잃고 얼마나 마음고생이 심했을까요? 아주머니도 그렇고. 두 분 다 아직 트라우마를 극복하지 못한 것 같은데, 우리가 괜히 와서 폐만 끼치고... 여기 말고 다른 데로 갈 걸 그랬나 봐요.”

그러게 말이다.”

 

트라우마가 있는 집에 괜히 와서 폐를 끼친다는 생각도 들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이왕 와 버린 거, 내 혈연들이기에 모른 척 하고 넘어갈 수는 없다는 생각도 들었다.

 

리이사 방을 한 번 봐봐야겠어.”

? 갑자기 그게 무슨...”

하다못해 그 애가 자살한 이유라도 밝혀내야지. 안 그랬다간 라이사도 아주머니도, 평생 리이사를 잃었다는 트라우마를 극복하지 못할 거야.”

하지만 그런 걸 어떻게...”

일기장이야.”

일기장?”

인간이라는 생물은, 다른 사람 앞에서는 연기를 하더라도 자기 자신에게는 솔직해진다고 하잖아. 그 솔직한 마음을 눈으로도 볼 수 있게 표현해놓는 곳이 바로 일기장이고 말이야. 어디 있던 지간에 일기장을 찾을 수만 있다면 리이사의 심리상태가 어땠는지 정도는 알 수 있을 거야.”

오빠, 잠깐만요!”

 

리이사의 방이 어디 있는지는 모르니, 일단 아주머니에게 물어보자.

나는 곧장 젓가락을 놓고 방을 나가 카운터로 갔다.

아주머니가 멍한 표정을 지은 채 천장을 바라보고 계셨다.

 

아주머니.”

어머나, 쿄스케구나? 무슨 일이니?”

 

갑자기 나타난 나를 본 아주머니가 깜짝 놀라며 말했다.

 

리이사의 방은 어디 있나요?”

리이사 방? 리이사 방은 왜?”

확인해보고 싶은 게 있어서 그래요. 어디 있죠?”

“...그래. 알았다. 따라오렴.”

 

아주머니는 잠시 망설이는 듯하더니, 이내 나를 리이사의 방으로 이끌었다.

따라가고 또 따라가도 계속 복도와 미닫이문만 나오는구나.

한참을 간 끝에 찾은 리이사의 방은 여관 안에서도 가장 구석에 있었다.

흰색 벽지로 도배된 벽에, 바닷가가 잘 보이는 방향에 뚫린 창문에, 평범한 일반 가정에서도 흔히 볼 수 있는 목조책상과 의자, 옷장, 작은 책장이 여러 방향으로 흩어져 방의 공간을 차지하고 있었다.

 

천천히 보고 나오렴. 뭐 문제 있으면 카운터 앞으로 오거라.”

 

아주머니는 다시 카운터로 돌아가셨다.

누가 보더라도 평범한 방이었지만, 어쩌면 아주머니와 라이사의 트라우마를 해소해 줄 무언가를 찾을 수 있다는 생각에 나는 거침없이 방 안에 들어섰다.

일기장 같은 게 있을만한 곳이라면 가장 가능성이 큰 장소라면 역시 책상이나 책장 정도겠지.

먼저 리이사가 썼다는 책장부터 천천히 뒤적여봤다.

리이사는 그야말로 문학소녀(文學少女)였구나. 일본문학전집에서 서양 문학까지, 문학이라는 문학은 총 망라되어 있었다.

우리 집의 누군가가 좀 배웠으면 좋겠네.

책장에 걸린 책 하나하나 다 펼쳐보며 찾아봤지만 책장엔 별로 그럴싸한 것이 없었다.

그렇다면 이제 남은 것은 책상이로군.

 

오빠! 여기 있었어요? 어휴, 찾아다녔잖아요.”

 

책상 서랍을 하나하나 열어보려는 찰나, 아야세가 방으로 들어왔다.

 

아주머니께 물어서 겨우겨우 찾아왔어요. , 그렇게 혼자 가버리면 섭섭하죠.”

미안. 내 호기심이 너를 고생시키는구나. 어쨌든 일기장을 계속 찾아보자.”

정말 이래도 되는 거예요?”

 

나는 리이사의 책상서랍 중 가장 공간이 넓은 서랍을 열어봤다.

검은 빛깔의 메모장 같은 책자가 나왔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펴보니 일기장이었다.

 

찾았다.”

 

일기장을 한 페이지 한 페이지, 천천히 넘겨보았다.

 

 

410, 맑음.

 

오늘 마을 남자 한 명이 나를 좋아한다며 고백해왔다.

훤칠한 키에 날렵한 외모를 가진 남자였다.

하지만 나는 그 사람에게 아무 특별한 감정이 없었기에 그 남자의 고백을 받아줄 순 없었다.

항상 자신보고 선머슴이라며 고민하는 언니에게 소개시켜주면 어떨까?

그렇게 고뇌하고 있는 언니를 멀리서 보고 있노라면 정말 가슴이 아프다.

아무리 남자같이 굴어도 여자는 여자건만, 왜 마을 남자들은 언니를 무서워하고 피하는 걸까?

 

 

413, 흐림.

 

어머니께서 가족 계모임이 있어 집을 비우신 덕에 이 넓은 집에 나와 언니 단 두 사람만이 남게 되었다.

언니와 나는 어릴 때 비밀기지 삼아 만든 지하실을 청소했다.

이 지하실은 나와 언니 말곤 아무도 모르는 비밀장소다.

청소 후 먹은 언니가 지어준 식사는 정말 맛있었다. 이 정도면 1등 신부 감이지.

언니는 참 따스한 사람이다. 어느 날 우연히 안겼던 언니의 품은 어머니의 품이 부럽지 않을 만큼 따듯했다.

언니는 어느 순간 엄마가 되더라도 잘할 거란 생각이 든다.

이렇게 따듯한 품을 가진 엄마만큼 아이를 잘 품어주는 엄마는 없을 테니까.

나도 얼른 성장해서 언니 같은 여자가 되고 싶다.

 

 

420, 쾌청함.

 

오늘 언니의 표정과 기분이 심상치가 않다.

평소 언니가 보여주던 밝고 쾌활한 모습은 온데간데없었다.

밖에 나갈 땐 웃으며 나갔던 언니가 들어올 땐 펑펑 울며 들어왔다.

왜 우는 지 물어보고 또 물어봐도 언니는 이유를 말해주지 않았다.

언니는 슬플 때마다 가는 자신만의 지하실에 내려가 버렸다.

언니는 그 지하실에 한 번 들어가면 적어도 이틀은 안 나온다.

걱정된다. 그러다가 몸이라도 상하면 어떡하지?

 

 

아무리 페이지를 넘기고 넘겨봐도, 순전 언니인 라이사 찬양이나 일상 에세이를 써놓은 게 전부였다. 내용들 하나하나 훑어보니 리이사는 중증 시스콤이었던 모양이다.

어느 부분을 보더라도 유서에 쓰여 있었다는 것처럼 세상이 원망스럽다던가, 살기 싫다던가, 죽고 싶다던가 하는 말은 조금도 쓰여 있지 않다. 원래 자살하려고 마음먹은 사람들은 항상 일기장에 그런 말들을 도배해놓기 마련이건만.

 

이런 사람이... 정말 자살을 하려고 했을까요?”

그러게 말이야. 자신의 심리상태를 자유자재로 표현하고 옮겨놓을 수 있는 일기장조차, 리이사가 밝고 낙천적이고, 긍정적인 성격을 가진 사람이라는 것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어. 이걸로만 유추해 보더라도, 그 애한테는 자살을 할 만한 이유도 없고 그럴 동기도 없다는 걸 알 수 있지.”

결국 결론은... 자살한 게 아니라는 거군요?”

그래, 맞아. 살해당한 거지.”

 

이제야 알겠다.

일기장을 보니 짐작이 갔다.

리이사는 자살한 게 아니었다.

 

이 여관에 전화가 있던가? 한 번 아버지께 여쭤봐야겠어. 여기가 아무리 시골이라도 사람이 죽었는데 경찰이 안 왔을 리는 없잖아.”

공중전화라면 현관 쪽에 있어요.”

 

나는 황급히 현관 쪽으로 뛰어갔다.

현관 근처엔 아주머니 말고 다른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이 시간대라면 아버지는 한창 근무 중이시겠지만, 나름대로 업무에 관련된 전화니까 별 문제는 없겠지.

아버지와 통화를 하고 난 후에는 주변 사람들에게도 리이사의 행동거지 등을 물어봐야 한다.

키리노의 에로 게임 문제 다음으로 바쁜 시간이 되겠군.

 

 

나와 아야세는 여관의 지하실 왼편 구석진 곳에 몸을 꼭꼭 웅크린 채 숨어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제 슬슬, 리이사를 죽음으로 몰고 간 진짜 범인이 등장할 시간이 됐기 때문이다.

 

오빠! 너무 끼잖아요, 조금만 옆으로 가요!”

좁은 걸 그럼 어떡해? 네가 조금만 봐 줘.”

어쨌든, 리이사씨를 해친 범인이 정말 여기로 오긴 오는 거예요?”

물론. 내 추리가 맞으면 반드시 올 거야.”

덜컹!

 

지하실 문이 열렸다.

나와 아야세는 서로의 입을 손으로 막았다.

너무 어두워서 누군지는 잘 알 수 없었지만 점점 우리가 있는 아래쪽을 향해 계단을 내려오고 있었다.

계단을 다 내려오고 6보 쯤 걸었을까. 걸음소리가 완전히 멈췄다.

 

덜컹!

 

뭔가의 뚜껑을 여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이때다 싶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라이터를 켰다.

 

당신이 여기 올 줄 알았습니다. 역시 범인은 내부에 있었군요. 의외였어요. 설마 당신이 리이사를 죽인 범인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었는데.”

 

라이터로 만들어진 불빛에 비춰진 범인은 당황한 기색을 감추지 못한 채 나와 아야세를 뚫어지게 바라봤다.

 

라이터 불빛을 통해 범인의 모습이 아래에서부터 위까지 천천히 드러났다.

정말 예상 못한 결말이었지만...

살해당한 리이사를 위해서라도 그녀를 죽인 범인은 반드시 밝혀내야 한다.

그리고 리이사를 죽인 범인이 더 이상 죄의 십자가를 등에 얹게 하지 않기 위해서라도...

 

안 그래요? 라이사.”

 

내게 이름이 불린 라이사의 표정이 심각하게 일그러졌다.

 

말도 안 돼, 라이사씨가 리이사씨를 죽인 범인이라니.”

나도 처음엔, 라이사 당신이 리이사를 죽였을 거란 생각은 차마 하지 못했어요. 하지만 우리가 여기 오고 난 이후 당신이 보여준 행동들, 그리고 생전 리이사에 대한 주변 사람들의 증언이 있던 덕분에 모든 일의 진위여부를 완전히 파악할 수 있었죠.”

겨우 그런 걸로 어떻게...”

당신이 언젠가 나랑 아야세한테 이런 얘기를 하지 않았던가요? 여자한테는 남자에겐 없는 양면의 얼굴이란 매력이 있다고. 당신이 가진 양면의 얼굴 중 하나는... 바로 살인자였습니다.”

 

나는 라이사가 열다 만 통의 뚜껑을 완전히 열어 재꼈다.

물건이 들어있는 단순한 통이 아닌, 시체가 들어있는 관이었다.

 

리이사씨?!”

 

나와 함께 관의 내용물을 본 아야세가 소스라치게 놀라며 말했다.

오래 전에 죽어 싸늘한 주검으로 변해버린 리이사가 관 속에 조용히 누워있었다.

포르말린 등으로 방부처리를 한 듯, 시신은 단 한군데도 썩은 부분이 없었다.

 

리이사가 자살을 했다는 건 사실 당신이 꾸며낸 속임수였어요.”

, 말도 안 돼요. 리이사가 죽었을 땐 분명 자필로 쓴 유서도 있었고, 스스로 찔렀다던 칼에는 리이사의 지문 말고 다른 사람의 지문은 없었어요. 그런데 내가 어떻게 리이사를 죽일 수 있었다는 거죠?”

 

과연, 이 질문이 나올 줄 알았다.

물론 나도 한 치의 실수도 없이 준비했으니 그렇게 당황스럽진 않지만.

 

애초에 당신은 유서 필적 감정이나 지문 걱정 같은 걸 할 필요가 없었어요.”

뭐라고...?”

당신은 리이사씨와 남이 아닌, 피가 이어진 자매 맞죠?”

그래요...”

바로 그걸 이용한 거예요. 죽은 리이사씨와 자매 지간이라는 사실이 당신을 용의선상에서 제외해준 거죠. 당신도 피는 못 속인다는 말을 잘 알 거예요. 남매, 자매, 형제들은 설령 이란성이라 할지라도 많은 부분을 닮은 채 태어나요. 글을 쓰는 방식, 젓가락이나 숟가락을 잡는 방식, 심지어는 지문까지도. 더군다나 같은 어머니한테서 태어났다면 더더욱 닮게 되죠.”

 

나도 여동생을 가진 오빠이니만큼, 키리노와 남매이니만큼 이런 것에 관해선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조사해보면 알겠지만, 당신의 지문은 리이사씨와 거의 동일해서 심도 있게 조사해보지 않으면 어떤 게 누구의 지문인 지 정확히 알 수가 없습니다. 물론 피를 나눈 자매라 할지라도 완전히 한 사람은 아니기 때문에 조금의 차이는 있을 수 있지만, 그런 미묘한 차이를 시작부터 끝까지 자세히 조사하는 경찰은 그렇게 많지가 않죠. 대부분의 경찰들은 여러 부분이 동일한 것만으로도 같은 사람의 것으로 간주해버려요. 당신은 경찰들의 그런 허술함과 리이사와의 혈연관계를 교묘히 이용했던 겁니다.”

그래, 지문은 그렇다고 쳐요. 그럼 유서는 어떻게 설명할 거죠? 주변 사람들의 증언만 갖고서는 증명이 안 돼요. 다른 사람 앞에서는 밝은 척 연기를 하고, 속으론 죽고 싶다는 생각을 할 수도 있는 거잖아요?”

 

이 질문 역시 나올 줄 알았다.

나는 라이사의 눈앞에 리이사의 일기장을 내밀었다.

 

이게 뭐죠?”

리이사의 일기장입니다. 한 번 훑어봐요.”

 

라이사는 벌벌 떨고 있는 오른손으로 내 손에 있는 일기장을 빼내어갔다.

그리고 천천히 펼쳐보며 한 장 한 장 훑기 시작했다.

 

이게... 뭐가 어쨌다는 거예요?”

그게 바로 당신이 범인이라는 걸 증명해주는 증거인 셈이죠.”

이런 게 어떻게 증거가 된다는 거죠?”

당신이 또 그랬잖아요. 리이사가 남긴 유서에는 살고 싶지 않다, 세상이 원망스럽다고 쓰여 있었다고. 일기의 내용을 보면 알다시피, 내용을 모두 훑어봐도 거기엔 살고 싶지 않다던가, 세상이 원망스럽다던가 하는 내용은 어디에도 없어요. 인간은 남들 앞에선 연기를 하더라도 자기 자신 앞에서는 무서울 정도로 솔직해지는 동물이거든요. 그런 인간이 자신의 속마음과 내면을 거침없이 표출할 수 있는 곳이 바로 일기장이고요. 그렇게 언니인 당신을 칭찬하고 찬양하다시피 하는 글만 써놓은 리이사가 뭣 때문에 자살을 기도하겠습니까? 그 애한테는 애초에 자살할 이유도, 동기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때 옆에 있었다는 유서는 당신이 쓴 게 아닌가 하고 짐작했던 거죠.”

말도 안 돼! 단순히 혈연관계라서 그런 거라면... 어머니가 그랬을 가능성도 있는 거잖아요!”

그건 불가능해요. 아야세.”

.”

 

나는 아야세한테서 쪽지 2장을 받아들었다.

그리고 라이사가 잘 볼 수 있도록 쪽지 2장을 양 손가락으로 들어보였다.

 

그건 또 뭐죠?”

아주머니께 말씀드려서 가져왔죠. 트라우마 때문인지, 1년 전에 쓰여 진 유서를 계속 갖고 계시더군요. 그리고 이건 당신이 그동안 써온 작업일지의 일부분입니다. 어떤가요? 제 말대로 아닌가요? 얼핏 보면 누가 썼는지 구분이 안 갈 정도로 글자체며 쓰는 방식이 똑같아요.”

... 그건...”

하나 더 보여드리죠.”

 

나는 바지주머니 왼쪽에서 다른 한 장의 쪽지를 꺼내들었다.

 

이건 아주머니가 지금까지 써오신 가계부의 일부분입니다. 그리고 이건 아까 얘기했듯이 당신의 작업일지에요. 확실히 글자체부터 차이가 나지 않습니까? 유전적으로도 그래요. 당신이 비록 아주머니의 친딸일지라도 완전히 똑같을 순 없죠. 아주머니에겐 당신 두 자매가 가진 게 없거든요. 바로, 아버지의 유전자입니다.”

, 겨우 그런 게 내가 범인이라는 증거가 된다고 생각해요? 리이사는 분명 자살했어요! 목을 맸던 밧줄로...! !”

 

라이사는 방금 자신이 스스로 한 소리에 소스라치게 놀라며 황급히 자신의 입을 틀어막았다.

 

방금 그 말 때문에 완전히 탄로가 났습니다! 아주머니 말씀으론, 피 묻을 칼과 유서가 벼랑에서 발견되었다곤 하셨지만, 밧줄이 남겨져 있었다는 말씀은 단 한마디도 안 하셨었어요! 그런데 당신의 입에서 어떻게 목을 맸던 밧줄이라는 말이 나올 수 있는 걸까요? 그건 라이사 당신이 리이사를 목 졸라 죽인 범인이기 때문이죠!”

 

라이사의 일기장을 잡고 있는 손이 벌벌 떨리기 시작했다.

 

세상이 원망스러웠던 사람은 리이사가 아니라 당신이었던 거예요. 이제 진실을 밝힐 때가 왔습니다. 더는 숨길 수 없어요.”

하아...”

 

라이사가 땅이 꺼지도록 푹 한숨을 쉬었다.

 

그래. 범인은 나야.”

 

라이사가 자신의 범행을 인정한 듯싶었다.

 

내가 이 지하실에 내려올 거란 걸 어떻게 안 거지?”

그것 역시 그 일기장에 나와 있어요. 당신과 함께 비밀 지하실을 만들었다고 말이죠.”

그럼 여기에 리이사 시체가 있던 것도?”

리이사의 시체가 있을 거란 사실은 몰랐죠. 하지만 의심은 했어요. 당신이 어제 땅을 파고 있었던 그 장면을 두 눈으로 목격했을 때부터요. 저도 여기가 시골이라서 당신이 땅에다 쓰레기를 묻는다니 처음엔 그냥 그러려니 했지만, 막상 조사해보니 아니더군요. 정기적으로 쓰레기 수거차가 잘 다니더라고요. 수거차가 버젓이 다니건만, 쓰레기 묻자고 땅을 팔 이유가 없는데. 그게 당신을 의심하게 만든 계기가 된 거예요. 땅을 파고 있던 건, 뭔가 묻을 게 있기 때문에 그러는 것이다. 하고 말이죠.”

 

범행을 인정함과 동시에 말투도 거칠게 바뀌었다.

이게 라이사의 참모습인가?

 

망할 꼬맹이 녀석... 끝까지 내 발목을 잡는구나. 그래, 꼴 보기 싫어서 내 손으로 죽여 버렸어.”

어째서... 라이사씨는 왜 동생을 죽이지 않으면 안 됐던 거죠?”

꼴 보기 싫어서 그런 거라고 했잖아. , 그래도 얘기해보자면, 그 꼬맹이는... 항상 나보다 위에 있었어. 무슨 일을 하던 언제나 나보다 우월했어. 주변 사람들의 사랑을 독차지한 것도 모자라, 이젠 나까지도 능멸하려고 들더군. 정말이지... 눈 뜨고는 봐줄 수가 없었어. 그래서 죽여 버린 거야. 이유는 그것뿐이다. 됐지?”

그게... 정말이니?”

 

누군가의 목소리가 지하실에 울려 퍼졌다.

우린 목소리가 난 방향으로 시선을 돌렸다.

아주머니가 지하실 입구에 서 계셨다.

 

라이사... 네가... 정말 네가... 리이사를 죽였단 말이니?”

 

아주머니가 불안한 걸음 거리로 천천히 계단을 내려오시며 말씀하셨다.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짓고 계셨다.

 

, 다 들었으면서 왜 모르는 척을 하세요? 같은 말 반복하게 하지 좀 말아요, 제발! 내가 죽였어요! 그 꼬맹이를 이 손으로 죽여 버렸다고요!”

찰싹!

 

죽여 버렸다는 그 말과 동시에 아주머니의 오른손이 라이사의 왼쪽 뺨을 강타했다.

 

이 바보야... 너마저도 나랑 똑같은 길에 들어서면 어쩌자는 거니? 너는 제발 안 그러길 바랐는데... 너마저도 그래버리면...”

, 뭐라고요? 그게 무슨 말이에요? 설마 어머니가...”

사실 나도 살인자야...”

 

오늘 처음 알았다.

개미 한 마리 못 죽일 것 같았던 아주머니도 라이사처럼 다른 사람을 죽인 적이 있었단 말인가?

 

그래. 네 작은 어머니, 사토코... 나도 너처럼 동생에 대한 질투 때문에 살인이라는 절대로 용서받지 못할 짓을 저질렀단다. 이 두 손으로... 그 애를 죽여 버렸어. 하하하... 벌써 30년도 더 된 옛날 얘기야. 그런 와중에 우연히 네 아버지를 만나 너랑 리이사를 낳게 됐지. 너희 둘을 보면서 내 손에 죽어버린 사토코한테 미안해서라도... 너희들한테만큼은 절대 그런 일이 벌어지지 않게 하겠다고 맹세했었는데... 다 내 잘못이야! 내가 너를 이렇게 만들었어! 내가!! 리이사!!!”

 

아주머니는 바닥에 엎드린 채 지하실이 떠나갈 만큼 큰 목소리로 리이사의 이름을 울부짖듯 외치며 대성통곡을 하셨다.

나라도 아주머니 같은 반응을 보였을 것이다.

겉으론 표현하지 않았지만, 자신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두 딸에겐 그런 비극이 생기지 않기를 바랐는데 똑같이 되어버렸으니, 어떤 부모가 충격을 안 받으랴.

 

라이사. 리이사의 일기장을 조금이라도 봤으니 알겠지만, 그 애는 당신을 언니 이상으로 소중히 여기고 있었어요. 당신을 친언니로서 깊게 좋아하고 사랑했어요. 하루가 지나갈 때마다, 죽기 직전까지도 당신에 대한 칭찬을 써놓는 걸 빼먹지 않았어요. 당신이 그 일말의 질투심에 잡아먹히지만 않았으면 이런 혈육끼리의 비극은 벌어지지 않았을 겁니다.”

, 말도 안 돼... 그럼 난... 대체 무슨 짓을...”

 

내 말을 듣고 다리에 힘이 빠진 듯, 라이사는 멍한 표정을 지은 채 제자리에 무릎을 꿇고 앉아버렸다.

 

 

다음 날, 라이사는 경찰에 신고해 모든 사실을 자백하고 스스로를 구속했다.

아주머니 역시 구속된 라이사를 따라 함께 경찰서로 갔다.

나와 아야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멍하니 서서 그 두 사람의 뒷모습을 바라만 보았다.

 

오빠.”

 

아야세가 슬픔이 섞인 목소리로 나를 불렀다.

 

.”

라이사씨는... 왜 죽은 리이사씨를 땅에 묻지 않았던 걸까요? 그렇게 시신을 아무렇게나 내버려두면 범인으로 의심받을 텐데.”

내가 라이사 본인이 아니라서 잘은 모르겠어. 그래도 짐작해보자면... 아마, 언니로서의 본능 때문에 그런 게 아닐까? 언니로서, 동생을 보살펴주고 지켜야 한다는 본능이 리이사를 땅에다 매장하는 행동을 막은 게 아닐까 싶어. 결국, 질투심이 더 강했던 탓에 리이사는 죽어버렸지만.”

결국 아무 죄 없이 죽은 리이사씨만 불쌍하게 됐네요.”

그런 셈이지.”

 

나와 아야세는 잠시 침묵한 뒤 양손을 합장하고, 리이사가 묻혀진 언덕을 향해 명복을 빌었다.

 

그런데, 오빠. 여기 오면서 언덕에서 대체 뭘 본 거예요? 뭘 봤는데 아무 것도 아니라면서 넘어갔잖아요.”

 

아야세가 명복을 빌다 말고 내게 질문했다.

, 맞다. 그러고 보니... 여관에 오기 전에 버스 안에서 뭔가를 봤었다.

분명 아야세랑 닮은 검고 긴 생머리의 청초한 여자였는데...

 

글쎄... 뭐였을까? 잘 기억이 안 나는데?”

엊그제 봐놓고 기억이 안 난다고요? 가르쳐줘요. ? 뭘 본 거예요?”

미안해, 기억력이 금붕어라서 잘 생각이 안나.”

아이 참! 그러지 말고 얘기해줘요!”

 

아야세는 내 왼팔을 붙잡고 뭘 봤는지 얘기해달라고 어린 아이처럼 졸랐다.

그나저나, 인생에 한 번 밖에 없는 신혼여행을 졸지에 망쳐버린 꼴이 되고 말았다.

 

헛것을 본 건 아니다.

결혼하고 나서 지금까지도 얘기 안 하고 있는 사실이지만...

아마 내가 본 것은 죽은 리이사의 혼령이 아니었을까?

좋아하는 자신의 언니가 평생 죄의 십자가를 짊어지고 살게 하고 싶지 않아, 우리에게 도움을 요청한 게 아니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