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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터블 후일담 창작 단편 7. 어린 날의 청춘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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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터블 후일담 창작 단편 7. 어린 날의 청춘

히아신스v 2024. 1. 20. 13:31

이번 팬픽은 아야세와 그 딸 치토세의 시점이 번갈아가며 진행됩니다. 구분법은, 반말이 아야세고 경어가 치토세입니다.

이야기의 주류는 치토세를 좋아하게 된 어느 남자아이의 사랑이야기입니다.

원작과 비교해 다소 어색하더라도 팬픽이니까 그러려니 하고 재밌게 감상해주시기 바랍니다.

 

 

단풍나무가 붉게 물들고 은행나무가 노란색으로 옷을 갈아입는 가을.

계절이 바뀌어도 나는 언제나 하는 일상생활을 열심히 하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어느 날, 수업이 끝나고 잠시 쉬는 시간을 맞이한 학교.

 

그래서 그 아저씨 어떻게 됐대?”

계속 쫓아가다가 바나나를 밟고 5m쯤 미끄러졌대.”

진짜? , 정말 바나나를 밟으면 미끄러지는 모양이네?”

있잖아. 너희 어제 거 메루루 봤어?”

그럼 봤지! 그런데, 난 메루루도 좋지만 알파도 예쁜 것 같더라.”

 

나를 포함한 여자아이들은 재밌는 이야기를 주제삼아 왁자지껄 얘기하고 있었습니다.

 

왜 혼자 있니?”

 

? 누가 혼자 있다는 거지?

담임선생님의 목소리를 들은 나는 곧장 목소리가 들려온 방향으로 시선을 돌렸습니다.

선생님과 한 남자아이가 교실 뒷문 앞에 서 있었습니다.

가만, 그러고 보니 쟨...

 

이반. 이렇게 혼자 있지만 말고, 다른 친구들이랑 같이 놀렴.”

그렇지만... 그게 안 되는 걸요.”

 

이반. 맞다! 얼마 전에 우리 학교로 전학 온 남자아이입니다.

이반은 일본사람이라고는 생각되지 않을 만큼 노란 금빛의 단정하고 짧은 머리와, 푸른 눈동자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다만, 조금 소심한 성격인 듯 반 친구들과 어울리는 모습을 본 적이 없습니다.

 

얘들아, 저기 쟤 있잖아.”

 

아무와도 어울리지 못하고 외롭게 혼자 있는 이반이 유달리도 신경 쓰인 나는 친구들의 대화주제를 이반으로 돌렸습니다.

내가 손가락으로 이반을 가리키자, 친구들의 시선도 전부 이반으로 쏠렸습니다.

 

누구 말이야?”

, ? 얼마 전에 전학 온 애잖아. 이름이 뭐였더라, 이반... , 너무 길어.”

우리나라 사람도 아닌 애가 왜 우리 학교에 왔을까?”

쟤 기분 나빠. 머리는 왜 저렇게 노랗고, 눈은 왜 저렇게 파란 거야?”

 

친구들은 하나같이 이반에 대해 험담만 늘어놓았습니다.

하지만, 단순히 우리와 외모가 좀 다르다는 이유로 험담을 들어야 할 이유가 있는 걸까요?

 

그렇지만... 쟤도 우리 반 친구잖아.”

 

나는 친구들이 이반에 대해 험담하는 것을 중간에 끊었습니다.

 

뭐야, 치토세 너 쟤 편들어 주는 거야?”

너 설마 너희 고모한테 이상한 병 옮은 거니?”

그러지 마. 괜히 그랬다간 너도 왕따 당해. 저런 애는 그냥 혼자 있게 놔둬.”

하지만...”

 

누구와도 어울리지 않고 혼자 있는 이반이 너무 안쓰러웠지만 친구들의 험담이 너무 심해 어쩔 수가 없었습니다.

다른 애들이 없을 때 한 번 얘기를 걸어봐야지.

곧이어 쉬는 시간이 끝나고 수업 시작종이 울렸습니다.

 

 

해님이 하늘 한 가운데를 넘어 오후 1. 하교시간이 되었습니다.

가방 정리가 끝나고 곧장 교실 문을 지나 학교 건물 정문 앞으로 나갔습니다.

생각한대로 이반은 혼자 교문을 넘어 귀가하고 있었습니다.

 

저기 있다!”

 

평소엔 친구들과 함께 하교하곤 하지만, 이날만큼은 예외였습니다.

 

이반!”

 

나는 이반을 큰 목소리로 불렀습니다.

곧이어 내 목소리에 반응한 이반의 시선이 나에게로 옮겨졌습니다.

나는 이반의 시선이 내게 옮겨지자 활짝 웃으며 손을 흔들어보였습니다.

멀리 있었기에 이반의 표정까지 자세히 볼 순 없었지만, 내가 자신을 부른다는 것을 안 듯, 이반은 교문으로 향하던 걸음 거리를 내게로 돌렸습니다.

 

?”

나랑 같이 가.”

하지만... 괜히 그랬다간...”

괜찮아!”

, 알았어.”

 

공교롭게도 집까지 가는 방향이 같았습니다.

나는 길을 걷는 내내 이반의 얼굴표정을 뚫어지게 바라봤습니다.

그 어둡고 암울한 표정은 길을 걷는 동안 단 한 번도 바뀌지 않았습니다.

이반에게 나의 시선은 의식되지 않는 듯 했습니다.

 

, 이반.”

?”

넌 왜 늘 혼자 있어? 외롭지 않아?”

 

외롭지 않냐는 내 질문에 이반의 걸음이 제 자리에 뚝! 하고 멈췄습니다.

그와 동시에 내 걸음도 멈췄습니다.

 

누가 그걸 모르냐고...”

? ?”

누가 그걸 모르냔 말이야!!”

 

조용하던 이반이 갑자기 과격해졌습니다.

생각지도 못한 반응에 깜짝 놀란 나는 뒤를 향해 한 발짝 뒷걸음질을 쳤습니다.

 

이 나라 아이들은 언제나 나를 못살게 굴고, 이유 없이 괴롭히고, 날 외계인 취급해! 하지만... 하지만 말이야! 그래도 자기들이랑 친구가 되고 싶은 내 마음은 왜 알아주질 않는 거야? 외모가 좀 다른 것 때문에? 내가 다른 나라에서 왔기 때문에?”

, 이반...”

난 아이들과 친구가 되고 싶어서 언제나 먼저 다가가서 고개를 숙이고 손을 내 밀었어! 하지만 이 나라 아이들의 반응은 어딜 가나 똑같았지. 어떻게 이럴 수가 있는 거야? 그런 사소한 이유 때문에 한 사람을 이렇게 비참하게 만들어도 되는 거냐고!!”

 

이반의 두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렸습니다.

그렇구나, 많이 괴로웠구나.

열심히 노력하는데도 아무도 알아주질 않다니...

 

이젠 포기할래... 내가 무슨 수를 써도 이 나라 아이들의 편견은 변하지 않아. 이 나라 아이들 눈엔 난 한 명의 외국인에 지나지 않을 뿐이야.”

 

괴로워하는 이반을 더는 가만히 두고 볼 수가 없었습니다.

우리 아빠가 동네에서 유명한 참견쟁이라는 건 잘 알려진 사실이죠.

그리고 난 그 참견쟁이의 딸이고요.

 

아니야, 그렇지 않아!”

그렇지 않긴 뭐가 그렇지 않다는 거야? 그렇단 말이야.”

그래도 이반. 넌 혼자가 아니야. 이렇게 내가 옆에 있잖아.”

 

이반의 말문이 잠시 동안 막혔습니다.

하지만...

 

네가 뭘 알아? 너처럼 친구관계 원만하고, 순수하고, 해맑은 애가 나 같은 애의 고충을 어떻게 아냐고?”

, 몰라. 하지만 그런 건 아무 상관없잖아. 주위에서 누가 뭐라고 하던 괜찮아. 난 이반이랑 친구가 되고 싶어.”

됐어. 나랑 친해져서 뭐하겠다는 거야? 아까 내가 한 얘기를 어떻게 들은 거니? 괜히 나랑 가까워졌다간 너까지 피해를 본다고.”

피해 좀 보면 어때? 원래 사람은 살면서 언제나 이득을 보고 피해를 본다고 우리 아빠가 항상 말씀하시던 걸. 그리고 난 이반이랑 친구 되는 걸 피해본다고 생각하지 않아.”

우리 아빤 그런 말씀 안 하시던데... 넌 좋겠다. 좋은 아빠가 계셔서.”

 

아빠라는 말이 나오자 이반의 눈살이 찌푸려졌습니다.

아빠에 관해서 안 좋은 추억이라도 있나?

, 그런 건 차차 알아 가면 되겠지.

 

좋아, 이반이랑 나는 친구! 손가락 걸고 약속!”

 

나는 이반에게 오른손 새끼손가락을 내밀었습니다.

 

네 마음대로 해.”

 

나와 이반은 서로의 새끼손가락을 걸고 좋은 친구관계를 약속했습니다.

 

 

다음날 아침. 아침 8시가 조금 못 되어서 등교하고 교실 문을 열고 들어갔습니다.

나보다 먼저 온 이반이 창가 앞에서 창문을 열고 서 있었습니다.

 

안녕, 이반! 일찍 왔네?”

, 치토세? 안녕.”

뭘 보고 있어?”

그냥... 저 하늘을 보고 있자니 옛날 우리 집 생각이 나서.”

옛날 너희 집?”

 

, 그러고 보니.

이반이 외국에서 왔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정확히 어느 나라에서 왔는지는 모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넌 어느 나라에서 살다 왔어?”

 

이반이 어느 나라에서 왔는지 정도는 친구니까 알아야겠죠?

 

러시아.”

러시아? 어디 있는 나라야?”

여기서 비행기 타고 북쪽으로 쭉 가면 나와. 세상에서 제일 크고, 엄청 추운 나라야.”

얼마만큼 추운데? 우리나라보다 더 추워?”

거긴 겨울 밖에 없어. 여기처럼 봄, 여름, 가을이 없거든.”

 

, 계절이 겨울 밖에 없다니. 그런 곳에서 살았는데 안 추웠을까?

 

겨울 밖에 없으면 꽃도 안 피겠네?”

, 안 펴. 밖을 내다보면 항상 새하얀 눈만 내리더라.”

그래도 눈사람을 1년 내내 만들 수 있다는 좋은 점이 있잖아.”

넌 참 태평하구나? 난 여기처럼 봄, 여름, 가을, 겨울이 뚜렷한 나라가 부럽던데. 항상 한 가지 풍경만 보고 살면 지겹기 마련이잖아.”

 

드르륵!

교실 뒷문이 열리며 누군가가 들어왔습니다.

나와 이반은 문이 열리는 소리가 난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습니다.

여자아이들이다.

 

? 안녕? 너희도 일찍 왔네?”

 

나는 친구들을 보자 곧장 아침인사를 했습니다.

하지만...

 

, 뭐야? 치토세 네가 왜 걔랑 같이 있어?”

왜 그런 애랑 같이...”

너 갑자기 왜 그러는 거야?”

 

친구들은 아침인사는 제쳐둔 채 이반과 한 자리에 함께 있는 나를 향해 질문공세를 펼쳤습니다.

그야 당연히...

 

친구니까. 난 이반이랑 친구야.”

말도 안 돼! 그런 애의 어디가 좋아서?”

걔 옆에 있으면 독이 옮는다고 독이!”

어서 떨어져!”

 

친구들은 교실 뒷문에서 창문까지 일사분란하게 달려와 나랑 이반을 떨어뜨려 놓으려고 했습니다.

난 이런 친구들의 행동을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아니야! 이반은 착한 애란 말이야! 그리고 내 친구야!”

잔소리 말고 어서 떨어져!”

너 설마 이 애를 좋아하는 건 아니겠지?”

이거 놔! 이반, 어서 나가자!”

, 잠깐만! 치토세!”

 

나는 친구들의 손을 뿌리치고 이반의 왼손을 꼭 붙잡고 교실에서 뛰어 나갔습니다.

 

 

나와 이반은 출입금지 팻말이 걸려있는 학교 건물 옥상 위로 올라왔습니다.

조금도 쉬지 않고 뛰느라 지친 나와 이반은 옥상에 올라오자마자 제자리에 털썩하고 주저앉아버렸습니다.

 

... ... 치토세. 아깐 왜 그런 거야?”

... ... 뭐 말이야?”

아까 그 일. 그래서 내가 어제 얘기했잖아. 나 때문에 괜히... 미안해.”

아니야. 걔네가 잘못한 거야. 넌 아무 잘못 없어.”

하지만... 계속 그랬다간 네가...”

나도 단지 자기들이랑 조금 다르게 생겼다고 널 외계인 취급하는 애들은 싫어. 너도 우리 반 친구잖아? 나 말고 다른 애들과도 친해지고 싶다고 했잖아? 그럼 포기하지 마. 다른 애들한테 네 속마음을 있는 그대로 보여줘! 네 진심을 알려주라고!”

그렇지만...”

너 계속 그러면 나 진짜 화낸다?”

 

나는 나도 모르게 이반에게 격한 발언을 해 버렸습니다.

격앙(激昻)된 이런 내 모습을 본 이반은 어깨를 움츠렸습니다.

 

, 알았어.”

 

딩동~

이반이 알았다고 함과 동시에 수업 시작종이 울렸습니다.

 

곧 수업 시작하겠다. 어서 내려가자.”

 

난 이반의 왼손을 잡고 함께 옥상을 내려갔습니다.

그런데 뭔가 좀 이상했습니다.

전에는 몰랐지만, 지금 잡고 있는 이반의 손이 어쩐지 평소보다 더 뜨겁게 느껴지는 것은 왜일까요?

 

 

1교시 수업이 끝나고 잠시 쉬는 시간.

수업 마감 종이 치자마자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이반의 자리로 갔습니다.

평소엔 다른 여자아이들과 어울리던 나였지만 지금은 이반이 최우선이었습니다.

 

이반. 같이 놀자.”

그래. 그런데 말이야. 저기...”

?”

 

이반은 말없이 이리저리 고개를 돌리며 주변을 바라보았습니다.

나도 그런 이반의 시선을 따라 주변을 바라보았습니다.

반 친구들의 시선이 전부 나와 이반에게 향해 있었습니다.

모두들 하나 같이 표정을 잔뜩 찌푸리고 있었습니다.

 

다른 애들이 우릴 보는 게 뭐 어때서?”

그야...”

얘들아! 잠깐 내 말 좀 들어봐!”

!”

 

나는 나를 만류하는 이반의 목소리를 무시한 채 교실에 있는 모든 친구들을 향해 큰 목소리로 외쳤습니다.

 

지금까지 이반한테 나쁜 짓하거나 못 되게 군 거 있으면 빨리 사과해!”

, 갑자기 뭐 하는 거야, 치토세?”

이반도 우리 1학년 2반 친구야. 얜 너희랑 친구가 되고 싶어 해! 하지만 너희들은 단지 외모가 좀 틀리다는 이유로 이반을 괴롭히고 왕따하고 못살게 굴었지? 너희도 자신이 처한 입장을 바꿔서 생각해봐! 너희들도 얘처럼 다른 나라 사람들한테 빙빙 둘러싸여 있다고 생각해보라고!”

 

교실 안에 있던 모든 친구들의 시선이 전부 나에게 쏠렸습니다.

그뿐만이 아니었습니다. 내 목소리가 워낙 컸던 탓일까?

다른 반 아이들도 내 목소리를 들은 듯, 교실 앞문과 뒷문 앞에 웅성거리며 옹기종기 모여 있었습니다.

그래도 한 번 시작한 일을 중간에 끝내면 동네최고 참견쟁이의 딸이 아니겠죠?

 

이반. 너도 애들한테 한마디 해 줘.”

내가 뭘...”

아까 옥상에서 약속했잖아? 친구들에게 네 속마음을, 너의 진심을 보여주겠다고.”

 

나는 자신감에 찬 눈빛으로 이반에게 말했습니다.

하지만 이반은 여전히 망설이고 있었습니다.

, 이렇게 까진 안 하고 싶었는데, 해야겠네.

 

, 약속 안 지키는 사람 정말 싫어.”

! , 알았어! 할게!”

 

약속 안 지키는 사람이 싫다는 그 한마디가 망설이고 있던 이반의 마음을 움직였습니다.

이반은 잠시 숨을 고르고, 좀 전까지만 해도 멍했던 두 눈을 부릅뜨며 자리에서 일어났습니다.

이반이 자리에서 일어남과 동시에 다른 아이들의 시선은 나에게서 이반으로 옮겨졌습니다.

 

얘들아! ... 잘 알다시피 이 나라사람이 아니야. 난 저기 머나 먼 북쪽나라 러시아에서 왔어. 우리 아빠는 러시아인이셔. , 아니지. 이런 얘기는 나중에 하자. 어쨌든 난... 여기 일본 친구들을 정말 좋아해! 왜냐면, 내가 옛날에 다니던 학교에 너희처럼 일본에서 온 친구가 있었거든. 걘 지금 나처럼, 외모가 달라서 주변 친구들한테 따돌림을 당했었지. 나도 처음엔 그 애가 싫었지만... 그 앤 그런 일 때문에 결코 울거나 화내지 않았어.”

 

이야기가 계속되자 다른 아이들의 찌푸려져 있던 인상이 점점 풀리기 시작했습니다.

 

오히려 자신을 따돌리는 아이들을 따듯하게 대해줬어. 그래서인지, 친구들은 그 애의 진심을 이해하고 따돌린 것을 사과하고 친한 친구가 되었지. 옆에서 쭉 지켜보면서 그 애가 얼마나 존경스럽게 느껴졌는지 몰라. 처음엔 이해할 수가 없었어. 어떻게 자신을 따돌리는 애들을 그렇게 따듯하게 대해줄 수가 있는 건지. 하지만 그 애랑 잠깐 얘기를 해보니까 다 알겠더라. 그 애가 하는 말엔 조금도 거짓말이 없었거든. 그래서 그 날 이후로 결심했어. 나도 그 애처럼 모두랑 친하게 지내고 싶다고. 그 애처럼 밝고, 해맑고, 순수해지고 싶다고.”

 

이것이, 내면에 숨겨져 있던 이반의 속마음?

 

얘들아. 난 너희랑 머리색도 다르고 얼굴색도 다르고 모든 게 틀려. 하지만... 그래도... 난 여기 있는 모두와 친구가 되고 싶어. 너희와 함께 활짝 웃으면서 열심히 공부하고 싶어. 너희랑 친구가 되고 싶어!”

 

모두와 친구가 되고 싶다는 이반의 한마디 외침이 교실 전체에 울려 퍼졌습니다.

이반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이곳저곳에 뿔뿔이 흩어져있던 아이들이 전부 우리 쪽으로 모여들기 시작했습니다.

아이들의 마치 잘못을 하고 부모님에게 혼난 아이처럼 측은한 표정을 짓고 있었습니다.

 

이반, 미안해! 우리가 잘못했어!”

왕따 시켜서 정말 미안해!”

그동안 많이 힘들었지? 미안해, 사과할게.”

이렇게 착한 줄도 모르고... 미안해.”

 

아이들은 일사분란하게 이반에게 고개 숙여 사과했습니다.

 

, 아냐! 너희가 왜 사과해? 그냥 내 마음 속 얘기를 꺼낸 것뿐인데...”

 

하여튼 이 소심쟁이.

 

. 하면 되잖아.”

, ! 얘들아 고마워! 우리 이제 다 같이 친하게 지내!”

 

언제나 어둡기만 하던 이반의 표정이 아침을 알려주는 해님처럼 밝아졌습니다.

나는 아빠가 인자하게 웃으며 지으시는 얼굴표정을 제일 좋아하지만, 이 시간만큼은 예외였습니다.

그렇게 생각될 만큼, 모두와 화해하고 친구가 된 이반의 표정은 해맑아도 너무 해맑았거든요.

. . .

 

맑고 화창한 푸른 하늘, 10월 가을의 낮.

나는 언제나처럼 집 발코니에 빨래들을 널어놓고 있었다.

 

! ! !

 

옷과 이불들을 널어놓고 잘 마르라고 이불들을 털어주니, 평소보다 먼지가 많이 퍼져 나왔다.

 

어휴! 하여튼 오빠도 참, 이불 좀 곱게 쓰지.”

 

내가 털고 있는 이불은 오빠의 이불이다.

항상 나보고 잠버릇이 심하다고 입버릇처럼 말하는 오빠지만, 이렇게 이불을 털고 보니 남 말할 처지는 못 되는 것 같다.

 

슬슬 치토세가 올 시간이네?”

 

대부분의 초등학교 1학년은 오후 2시 안에 학교 수업이 끝난다.

그렇긴 하지만, 요즘은 어머니들의 교육열이 높아 학교 수업이 끝나더라도 바로 다른 공부를 위해 학원으로 가는 아이들이 많이 눈에 띈다.

아마 옆 나라 한국에서 건너온 교육열에 영향을 받은 듯하다.

나와 오빠는 치토세를 너무 어릴 때부터 고생시키고 싶지 않아 따로 학원에 보내고 있지는 않다.

굳이 보내지 않더라도 충분히 잘하고 있으니까.

 

학교 다녀왔습니다!”

 

아래층에서 치토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목소리를 들은 나는 빨래 너는 일을 잠시 멈추고 현관 앞으로 내려갔다.

그런데...

 

어머? 오늘은 친구랑 같이 왔구나?”

 

치토세의 옆엔 우리나라 사람이라고는 생각되지 않을 남자아이가 서 있었다.

금발의 단정하고 짧은 머리에 푸른색의 두 눈동자. 어딜 봐도 서양에 있는 나라에서 온 아이 같다.

 

인사 드려, 우리 엄마야.”

안녕하세요.”

 

남자아이가 나를 향해 고개 숙여 정중히 인사했다.

 

그래, 안녕. 그런데 넌... 우리나라 사람이 아니구나?”

, 이반 카를로비치 로마노프. 그냥 이반이라고 부르세요.”

, 이반... 하여튼 서양 사람들 이름은 왜 그렇게 긴지. 어쨌든 그렇게 서 있지 말고 어서 올라오렴.”

 

평소에도 친구를 잘 안 데려오던 치토세가 이번엔 무슨 일인지 친구를 데려왔다.

그것도 남자아이에 외국인이다.

자신의 이름을 이반이라고 칭한 남자아이는 외국인이라고는 생각되지 않을 만큼 우리말을 유창하게 구사했다.

 

내 방으로 올라가자. 엄마, 오늘 간식은 뭐예요?”

사과파이란다. 다 되면 부를 테니까 내려오렴.”

. 이반, 내 방으로 올라가자!”

, 잠깐만! 신발은 벗어야지!”

 

치토세는 이반의 손을 잡아끌며 자신의 방으로 올라갔다.

치토세에게 리드 받는 이반의 얼굴을 보니, 마치 홍당무처럼 새빨개져있었다.

이 아이, 설마?

 

 

파이를 구우면서도 치토세의 손을 잡고 있던 이반의 얼굴표정 생각만 했다.

역시 어린아이라도 남자는 남자구나. 그런 반응은 보통 자신의 손을 잡고 있는 아이를 좋아하고 있을 때 나오는 반응이다.

내 딸이긴 하지만 치토세라면 누구에게나 사랑 받는 게 당연하다.

파이를 다 굽고 난 뒤, 그릇에 담고 물 컵 두 잔과 함께 쟁반에 올려놓고 2층으로 올라갔다.

 

얘들이 뭐하고 있을까?”

 

두 아이가 방 안에서 단 둘이 뭐하고 있을지 궁금해진 나는 쟁반을 내려놓고 방문에 귀를 기대어봤다.

 

, 어떻게 이런 일이! 내가 내 금 화살에 스스로 찔리다니!”

 

? 이게 무슨 소리지?

금 화살에 스스로 찔려? 조금 더 자세히 들어볼까?

 

부디 소녀의 잘못을 용서해주시옵소서!”

사랑은 의심아래 타오를 수 없는 법! 네 그 한줌의 의심이 화를 자초하였노라!”

 

어째 어린 애들 대화라기엔... 너무 신화 같다.

궁금한데? 한 번 방 안에 들어가 보자.

똑똑똑!

 

나는 방금까지 들은 이야기를 모른 척하고 방문을 두드렸다.

곧이어 방문이 열리고 치토세가 태연한 표정을 지으며 나왔다.

 

, 파이 다 됐어.”

! 맛있겠다!”

 

모르는 척하며 방 안을 자세히 들여다보니, 얇은 책 두 권이 방바닥에 아무렇게나 놓여있었다.

잠깐, 못 보던 책인데?

 

너희들 뭐하고 있었니?”

연극연습이요.”

연극? 갑자기 웬 연극?”

아이 참, 엄마. 이제 곧 학교 학예회가 열린다고요. 전에 통신문 보여드렸잖아요.”

 

학예회... 학예회라면...

, 생각났다. 그러고 보니 얼마 안 있으면 치토세의 학교에서 학예회가 열린다.

저녁식사 중에 통신문을 대충 본 터라 완전히 잊어버리고 있었는데. 벌써 그럴 때구나?

 

, 미안. 이제 생각났어. 치토세 너희 반은 연극하니?”

! 사랑과 영혼이에요. 제가 프시케(Psyche), 이반이 에로스(Eros)에요. 오늘 학급회의에서 정한 거예요.”

사랑과 영혼? 사랑과 영혼이라면...”

 

너무 오래 전에 들은 이야기라 자세히 생각이 안 난다.

... 처음부터 이런 쪽으로는 좀 문외한이긴 했지만.

어쨌든, 제목부터 어른스러운 게 심상치가 않다. 내가 학교 다닐 때는 우리나라에 전해 내려오는 전래동화를 소재로 연극을 했었는데, 요즘 아이들은 참 수준도 높구나. 전래동화는 물론이요, 다른 나라에 전해져오는 전설이나 신화까지. 정말 요즘 아이들은 못하는 게 없다.

 

그래, 열심히 연습하렴. 학예회 날에 꼭 아빠랑 같이 보러갈게. 알았지?”

우와, 아빠도요? ! 열심히 연습할게요!”

 

누굴 닮은 건지 원. 치토세는 그저 오빠라면 사족을 못 쓴다.

하긴... 날 닮아서 그렇겠지.

 

어머?”

 

우연찮게 눈을 돌린 곳에 이반이 치토세를 힐끔힐끔 보며 멍하니 서 있었다.

이반의 양쪽 뺨엔 홍조가 가득 띄워져있었다.

이반이 치토세와 손잡고 리드 받을 때 30% 짐작했던 것이, 이젠 50% 짐작이 간다.

이 아이의 이런 반응이 어떤 반응인지는 누구보다 잘 안다.

나도 오빠랑 정식으로 교제하기 전에 항상 그랬으니까.

 

다 먹으면 그릇 싱크대에 올려놓으렴. 엄마 잠깐 시장 좀 다녀올 테니까.”

! 잘 다녀오세요.”

 

사실 시장 간다는 건 거짓말이다.

이반을 위해서라도 치토세랑 단 둘이, 조금이라도 더 오랜 시간을 보내게 해 줘야지.

어디보자. 나가서 뭘 할까. 키리노나 카나코한테 전화라도 해볼까?

 

 

세계를 돌아다니며 패션 디자이너를 하고 있는 키리노와, 아이돌에서 배우로 전직한 카나코와 차근차근 통화하니 어느새 석양이 아름답게 핀 오후가 되었다.

날도 점점 어두워지고 있으니 슬슬 이반이 돌아갈 시간인 것 같다.

 

나온다!”

 

나는 현관문을 닫고 나오는 이반을 보자마자 골목 모퉁이 뒤에 잠시 숨었다.

이반의 얼굴엔 여전히 홍조가 띄워져있었다.

게다가... 희미한 미소까지 보인다!

동네 골목 모퉁이는 우리 집에서 별로 멀지 않으니 이반이 어떤 얼굴표정을 짓고 있는 지 정도는 숨어서 힐끔힐끔 보더라도 쉽게 알아볼 수 있다.

나는 이반이 눈치 채지 못하게 총총걸음으로 조심스레 다가갔다.

고양이처럼 발소리 하나 내지 않았다.

발소리가 전혀 들리지 않기 때문인지, 이반은 내가 자신의 뒤에 있다는 것을 전혀 알아채지 못했다.

 

!

이반!”

 

바로 뒤까지 따라간 나는 이반의 왼쪽 어깨를 툭 하고 쳤다.

 

으아아아아!!! , 아줌마?”

 

내 손의 감촉을 느낀 이반은 그 자리에 벌러덩하고 넘어져버렸다.

 

, 미안. 많이 놀랐니? , 아줌마가 잡아줄 테니까 어서 일어나렴.”

, 감사합니다.”

아줌마가 너한테 하나 묻고 싶은 게 있거든. 들어줄 수 있어?”

? 뭔데요?”

, 우리 치토세를 좋아하니?”

 

치토세를 좋아하냐는 질문에 이반은 제자리에 그대로 멈춰 딱딱하게 굳어버렸다.

50% 짐작했던 것이 70% 짐작이 갔다.

 

괜찮으니까 얘기해보렴. 치토세를 좋아하지?”

 

내가 물으면 물을수록 이반의 두 뺨에 핀 홍조가 점점 붉어졌다.

70% 짐작했던 것이 100% 짐작이 갔다.

이런 반응은 사랑을 하지 않고서는 절대 나올 수 없는 반응이다.

 

... 좋아해요. , 치토세를... 좋아해요.”

 

이반이 쑥스러움이 잔뜩 섞인 말투로 말했다.

 

어쩐지, 치토세랑 손잡을 때 얼굴이 홍당무처럼 새빨개지더라. 하긴, 우리 딸이 좀 예쁘긴 하지.”

그런 게 아니에요. 저기... 그러니까...”

 

우리 딸이 좀 예쁘긴 하지. 라는 건 사실 일부러 내뱉은 말이다.

비록 감이지만 이 아이에겐 치토세를 좋아하는 이유가 있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다른 사람을 좋아하는 데는 보통 이유가 없다고 하지만, 명확한 이유가 있는 경우도 두루 있다.

 

치토세는요. 밝고, 순수하고, 청초한데다가 해맑기까지 해요. 게다가... 치토세는 제 고민을 진지하게 들어줬고, 언제나 혼자였던 저를 따듯하게 대해줬어요. ... 다른 애들이 기분 나쁘다고 저를 피할 때도 그 애만큼은 저를 피하지 않았죠.”

 

치토세에 관한 얘기를 할 때마다 쑥스러움이 묻어나던 이반의 표정에 점점 미소가 드리워졌다.

정말 치토세를 진심으로 많이 좋아하는구나.

 

일본으로 오기 전에도 저는 소심한 성격 때문에 늘 친구 한 명 없이 쓸쓸히 지냈어요. 또 아빠가 하시는 일의 성격 상 전학을 자주 다닌 것도 친구가 없는 이유 중 하나에요. 많은 학교를 다녀봤지만 그 어느 곳에서도 지금껏 치토세 같은 아이를 단 한 번도 만나본 적이 없었어요.”

그랬구나.”

제 입으로 이런 말하긴 좀 뭐하지만... 치토세는 천사... 아니, 여신이에요! 세상에서 가장 착하고 제일 예쁜 여신이에요!”

 

여신이라는 말은 내가 오빠한테 귀에 딱지가 얹히도록 듣는 말인데.

역시 어려도 남잔 남자네.

 

그래, 잘 알았어. 그럼 그 얘기를 치토세한테 직접 해 본적은 있니?”

?! , 아뇨... 아직은...”

하긴, 쉽사리 말을 꺼내기 어렵겠지. , 그래! 이번에 치토세랑 같이 학교 학예회에서 공연한다고 했잖아? 열심히 해서 치토세한테 점수를 팍팍 얻어 봐. 그리고 기회가 찾아오면 조용한 곳으로 불러내서 단 둘만의 시간을 만들어. 거기서 치토세한테 네 마음을 고백하는 거야.”

? 고백?! 제가요?”

그럼 안 할 거니? 우리 치토세는 자기 아빠를 닮아서 그런 지 눈치가 좀 없거든. 그렇게 우물쭈물하다간 다른 애한테 뺏길 지도 몰라. 그래도 좋아?”

, 안 돼요! 알았어요. 좋은 말씀 고맙습니다. 꼭 할게요.”

그래, 파이팅. 아줌마가 응원해줄게.”

!”

 

이반은 두 주먹을 불끈 쥐고 큰 목소리로 응했다.

이 아이를 보고 있자니 오빠와 처음 만났을 때의 내가 떠올랐다.

참 눈치 없는 오빠랑 연애하느라 많이 힘들었는데.

 

 

그 날 저녁.

우리 가족은 언제나 변함없는 저녁식사를 하고 있었다.

 

치토세. 밥 먹고 천천히 봐도 되잖니. 그러다 채하겠다.”

안 돼요. 확실히 해두지 않으면 공연 도중에 실수한단 말이에요.”

 

치토세는 대본을 한줄 씩 읽고 밥 먹고, 다시 읽고 밥 먹고, 이런 식의 식사를 계속 반복하는데 여념이 없었다.

 

갑자기 무슨 일이야?”

 

옆자리에서 식사하던 오빠가 내 귀에 대고 조용히 물었다.

 

이제 곧 치토세네 학교 학예회가 열리는 날이잖아요. 거기서 치토세네 반이 연극공연을 하는데, 글쎄 주인공을 맡게 됐다지 뭐예요?”

아니,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식사시간까지 써가며 연습할 필요는 없잖아?”

오빠 때문에 그래요. 제가 오빠랑 같이 보러가겠다고 하니까 좋아서 저러는 거죠. 실수하는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은 거예요.”

그래? 그렇다면야... 알았어. 진짜 갈 수 있도록 한 번 시간 내 볼게.”

 

이왕이면 오빠가 무조건 오도록 못을 박아놓도록 할까?

 

치토세, 아빠가 그 날에 무슨 일이 있어도 꼭 보러 오신대. 그러니까 절대로 실수하면 안 돼요, 알았지?”

, 내가 언제 그랬다고...!”

정말요? 우와, 신난다! 알았어요! 아빠, 꼭 오시는 거예요?”

 

치토세는 읽던 대본을 뒤로 휙 던져놓고 멀뚱히 식사하던 오빠 품으로 달려들었다.

 

, 그래. 갈게. 가야지. , 그렇고말고...”

 

오빠는 품에 안겨있는 치토세를 양손으로 붙잡아 다시 제자리에 앉혀놓으며 말했다.

오빠의 웃는 표정은 갑자기 일어난 일 때문에 매우 부자연스러웠다.

빼도 박도 못할 상황이라는 게 이런 걸 두고 하는 말이겠지.

 

계속 연습해야지. 엄마, 아빠. 전 먼저 올라갈게요. 잘 먹었습니다!”

 

치토세는 식기들을 싱크대에 넣어놓고 휙 던져놓은 대본을 챙겨서 자기 방으로 올라갔다.

 

왜 그런 거야? 그 날에 일 있어서 못 가기라도 하면 어쩌려고 그래?”

 

오빠가 언짢은 표정을 지으며 내게 말했다.

 

오빠가 안 올 수가 없을 걸요? 왜냐면, 오늘 낮에 치토세가 집에 친구를 데려왔었거든요.”

친구? 그게 어쨌는데?”

남자애였어요. 그것도, 치토세를 진심으로 마음 속 깊이 좋아하는 애였어요.”

“...뭐라고? 남자애? 게다가 치토세를 좋아해?”

그대로 멀뚱히 뒀다간 그 애한테 치토세를 뺏길 지도 모르는데요?”

안 돼, 절대 안 돼!! 어떤 녀석인지는 몰라도 내 딸을 그렇게 쉽게 내 줄 순 없지! 알았어. 그 날 무슨 일이 있어도 갈게. 녀석의 얼굴이나 좀 봐야겠어!”

 

오빠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집이 떠나갈 만큼 큰 목소리로 외쳤다.

치토세가 아빠인 오빠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만큼은 아니지만, 오빠도 치토세를 딸로서 지극히 사랑하고 있으니 이런 반응은 당연하다.

우리 아버지도 그러셨으니까. 하여튼 아빠들이란...

 

 

하늘은 구름 한 점 없이 쾌청, 기온은 조금 낮음.

선선한 가을날 아침, 학예회 당일이다.

오빠는 아끼고 아껴놨던 유급 휴가를 써서 학예회 참관에 참석했다.

오빠 말고도 자녀의 장기를 보러온 아빠들은 상당히 많았다.

치토세가 초등학교에 입학하고 처음 맞는 학예회이니만큼, 부모로서 열심히 연습하고 실전에 임하는 모습을 잘 관찰해두지 않으면 안 된다.

게다가 짧은 단역도 아니고, 주연이다.

치토세네 반에서 하는 연극공연 사랑과 영혼은 학예회가 거의 끝나갈 쯤에 순서가 예정되어 있었다.

 

이야, 요즘 애들은 참 꼼꼼한데? 그렇지 않아?”

. 보는 내내 눈을 떼지 못했어요.”

치토세는 언제 쯤 나오려나?”

마지막이라고 했으니까 이제 곧 나올 거예요.”

 

이 날을 위해서 참 열심히들 준비한 것 같다.

아이들의 공연에는 단 한 번의 실수도 없었다.

많은 사람들이 보는 앞에 있는 무대 위에 서면 긴장될 만도 한데. 아이들이 참 기특하게 느껴졌다.

분위기 또한 헛기침이라도 나오면 무안해질 정도로 매우 진지했다.

어떤 공연이든 보는 내내 객석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기립박수를 쳤다.

나와 오빠 또한 그랬다.

6학년 아이의 샤미센(기타와 비슷하게 생긴 일본 전통 현악기) 연주 공연이 끝났다.

그와 동시에 무대 위에 있는 조명이 꺼졌다가 다시 켜졌다.

 

이어서, 1학년 2반이 준비한 연극 사랑과 영혼입니다!”

 

안내방송에 이어서 치토세와 이반이 주연한 연극공연이 시작되었다.

사랑과 영혼. 그리스 로마 신화에 나오는 유명한 이야기다.

어느 나라에 아름다운 공주 세 자매가 살고 있었다.

세 자매가 모두 예뻤는데, 특히 막내 공주인 프시케(Psyche)가 그 중에서 가장 아름다웠다.

프시케가 거리로 나갈 때마다 모든 백성들이 그녀의 아름다움을 찬양했다.

하지만 프시케는 아름다움과 사랑의 여신 아프로디테(Aphrodite)에게 질투를 받는다.

아프로디테는 자신의 아들이자 사랑의 신인 에로스(Eros)에게 프시케를 세상에서 가장 못생긴 괴물과 사랑하게 만들라는 명령을 내린다.

사랑의 신 에로스는 금 화살을 쏴서 맞은 사람이 화살에 맞고 처음 본 사람을 사랑하게 하거나, 납 화살을 쏴서 맞은 사람이 화살에 맞고 처음 본 사람을 싫어하도록 만들 수 있었다.

하지만 프시케는 사랑의 신인 에로스조차 혹하게 만들 정도로 아름다웠다.

그녀의 아름다움에 잠깐 정신이 팔린 에로스는 실수로 자신의 손에 금 화살을 찌르고 만다. 그렇게 사랑의 신이 한 인간여자를 사랑하게 되어버린 거다.

프시케를 사랑하게 된 에로스는 곧 딸을 시집보낼 프시케의 부모에게, 프시케는 흉악한 괴물과 결혼할 운명이라며 나라 근처 바위산 꼭대기에 그녀를 혼자 놔두고 가라는 신탁을 내린다.

그리하여 에로스의 부탁을 받은 서풍의 신 제피로스(Zephyrus)는 산 정상 위에 쓸쓸히 있던 프시케를 에로스가 마련한 화려한 저택으로 데려간다.

에로스는 프시케에게 자신의 모습을 보이지 않은 채 결혼생활을 시작한다.

 

고대 그리스 사람처럼 분장한 치토세는 엄마인 내가 봐도 정말 예뻤다.

오빠 또한 그런 치토세를 보며 시선을 떼지 못했다.

상대역인 이반은 오페라의 유령에 나오는 팬텀처럼 흰 가면으로 얼굴을 가리고 있었다.

원래 이야기대로라면 어두워서 잘 안보여야 하지만, 연극공연이라는 특성상 무대가 어두우면 안 되기 때문에 가면으로 대신한 듯하다.

 

저기, 여보.”

얘기하시오.”

얼굴을 한 번 보여주시면 안 될까요?”

또 그 소리. 그건 안 돼요. 당신이 내 얼굴을 보면 우린 헤어지게 되오. 불행해진단 말이오. 난 당신과 함께 하는 이 순간을 잃고 싶지 않소.”

, 알았어요.”

 

프시케 역의 치토세와 에로스 역의 이반은 서로 양 손을 맞붙잡고 포크댄스를 추기 시작했다.

가면에 가려져 자세히 보이지는 않았지만, 이반의 뺨엔 홍조가 띄워져있었다.

 

신화에 따르면, 집에 방문한 언니들의 이야기를 듣고 자신의 남편의 존재를 의심한 프시케는 밤 중 몰래 자신의 옆에서 곤히 자던 에로스의 모습을 촛불 빛으로 비춰보기에 이른다.

자신의 남편이 사랑의 신 에로스였다는 사실을 안 프시케는 너무 놀란 나머지 실수로 그의 어깨에 촛농을 떨어뜨려 버린다.

 

네가 어찌 이럴 수 있느냐? 어찌 네가 나의 사랑을 의심할 수가 있느냐!”

, 에로스님! 부디 소녀의 잘못을 용서해주시옵소서!”

사랑은 의심 아래 타오를 수 없는 법! 네 그 한 줌의 의심이 화를 자초하였노라!”

 

프시케가 자신을 의심했다는 사실에 화가 난 에로스는 가차 없이 그 자리를 떠나버린다.

그리하여 프시케는 진심으로 사랑했던 남편을 되찾기 위해, 그의 어머니 아름다움과 사랑의 여신 아프로디테를 찾아간다.

 

네가 지금 무슨 짓을 했는지 아느냐? 너의 그 아름다움이 내 아들의 몸과 마음에 큰 상처를 남겼다. 하찮은 인간 따위가 어찌 그럴 수 있단 말이냐!”

용서해주시옵소서, 부디 소녀의 잘못을 용서해주시옵소서. 단 한 번만이라도 좋으니 남편을 만나게 해주시옵소서. 그의 발밑에서 직접 용서를 구하고 싶습니다.”

아름다움에 비해 머릿속에 든 생각은 뻔뻔하기 그지없구나. 뭐 좋다. 넌 지금부터 이곳에 있으면서 내가 시키는 일들을 해야 한다. 열심히 해야 할 것이다. 단 한 번이라도 실수하는 그 날엔 두 번 다시 남편을 만날 수 없게 될 테니 말이다.”

 

아프로디테는 프시케에게 인간여자라면 도저히 해낼 수 없을 것 같은 일들을 시키기에 이른다.

방이 꽉 차도록 쌓인 곡식더미를 종류별로 분류해놓는 일이라던가,

황금빛 털을 가진 사나운 양들의 털을 한 움큼씩 모아오는 일,

매우 험한 계곡 사이에 흐르는 검은 계곡의 물을 길어오는 일,

저승세계의 신 하데스(Hades)의 왕비이자 여신 페르세포네(Persephone)의 아름다움을 나눠받아 오는 일이라던가.

불가능할 것 같던 일들뿐이었지만, 프시케는 자신을 불쌍히 여긴 여러 사람들의 도움을 받아 모든 일들을 훌륭히 해낸다.

하지만 프시케는 지하세계에서 페르세포네에게 받아온 아름다움의 정체가 궁금해, 그것을 담은 상자를 열어봤다가 영원한 잠에 빠져들고 만다.

프시케가 영원한 잠에 빠져버렸다는 것을 안 에로스는 갇혀있던 방에서 필사적으로 빠져나오기에 이르고...

잠에 빠져 쓰러져있는 프시케를 발견한 에로스는 그녀 근처에 잔뜩 퍼져있던 잠을 모아 다시 상자 안에 넣어 봉인해버렸다.

잠이 사라지자 프시케가 깨어났다.

 

에로스님? 당신이 저를 구해주신 건가요?”

갇혀있는 동안에도 그대에 대한 생각 때문에 잠을 이루지 못했소. 비록 당신이 나를 한 번 의심하였었다 할지라도 이젠 상관없소. 프시케, 난 당신을 사랑하오. 더 이상 당신이 나 때문에 힘겹게 고생하는 모습을 보고 싶지 않소.”

저도요. 저도 에로스님을 사랑해요. 이 세상 그 누구보다, 그 무엇보다도 당신을 사랑해요. 이젠 헤어지고 싶지 않아요. 영원히 당신과 함께하고 싶어요.”

 

치토세와 이반이 서로를 격렬히 끌어안았다.

이반의 뺨은 이전에 손을 맞붙잡고 포크댄스를 출 때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빨개져있었다.

이렇게 서로의 사랑을 확인한 에로스와 프시케는 곧장 신들의 신전이 있는 올림포스(Olympus) 산으로 달려가 모든 신들에게 자신들의 사랑이 굳건함을 알리고 행복한 결혼식을 치르기에 이른다.

 

둘의 사랑을 확인한 최고의 신 제우스(Zeus)는 둘의 결혼을 허락해주었고, 에로스의 어머니인 아프로디테조차 둘의 결혼을 인정해주었습니다. 그리하여 프시케는 영원히 늙지도, 죽지도 않는 신이 되어 에로스와 결혼해 행복하게 살았답니다.”

 

부연방송이 끝남과 동시에 무대의 조명이 꺼졌다.

비록 어린 아이들이 준비한 연극이었지만, 그 연기 수준은 드라마에 나오는 탤런트들과 비교해도 손색이 없을 정도로 훌륭했다.

내가 무심코 옆자리에 있는 오빠를 바라보니, 오빠의 두 눈에선 눈물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표정은 무표정했지만.

그 후 오빠는 곧장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큰 소리로 박수를 쳤다.

오빠의 뒤를 이어서 나, 그리고 객석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자리에서 일어나 박수를 쳤다.

 

오빠, 왜 우는 거예요?”

꼭 우리 얘기 같아서 그런다, !”

 

하긴, 오빠의 심정도 이해가 간다.

나랑 오빠가 만나서 결혼하고, 이렇게 가정을 꾸리며 살기까지 참 많은 우여곡절들이 있었다.

하지만 오빠는 이야기 중의 에로스처럼, 나는 프시케처럼, 우리 두 사람은 서로에 대한 믿음과 신뢰, 사랑만으로 여러 시련을 뛰어넘어 이렇게 맺어졌다.

잠시 연애할 때를 생각하니 나도 모르게 얼굴에 홍조가 띄워졌다.

 

그리고 말이야.”

?”

 

오빠가 흐르는 눈물을 닦고 내게 말했다.

 

저 애한테라면... 치토세를 맡겨도 될 것 같아.”

?”

그냥... 그런 느낌이 들어. 저 애라면... 어쩐지 괜찮을 것 같다고.”

 

이반이 치토세를 좋아한다는 얘기를 들었을 때는 마치 이반을 당장이라도 잡아먹을 것처럼 굴더니, 공연을 보고나서 생각이 바뀐 모양이다.

 

 

연극공연을 끝으로 학예회는 무사히 끝을 맺었다.

나와 오빠는 치토세를 보러 무대 뒤편으로 갔다.

치토세는 친구들과 한자리에 모여 옷을 갈아입고 있었다.

 

치토세.”

? 엄마, 아빠. 오셨어요?”

그럼.”

아빠, 저 어땠어요?”

당연히 최고였지. 아빤 치토세가 너무 예뻐서 한시도 눈을 떼지 못했단다.”

 

엄마한테도 좀 물어봐주면 안 되니?

치토세는 언제나 오빠가 우선이다.

 

이반! 잠깐 이리와 봐.”

 

치토세가 다른 남자아이들과 한창 무대를 정리하고 있던 이반을 불렀다.

곧이어 이반은 하던 일을 멈추고 우리가 있는 무대 뒤편으로 왔다.

 

?”

인사드려. 우리 아빠야.”

“...?! 아빠... 아니 아버님이시라고?!”

 

아버님? 요즘 아이들은 참 언어수준도 높구나.

이반은 오빠를 보자마자 제자리에 똑바로 서서 마치 군대에 막 들어간 훈련병처럼 한 치의 흐트러짐도 없는 차렷 자세를 잡았다.

오빠도 이런 이반의 모습을 보고 약간 당황한 듯, 왼쪽 눈썹을 찌푸렸다.

 

, 그래. 얘기 많이 들었다. 네가 그...”

! 이반 카를로비치 로마노프라고 합니다! 러시아에서 왔고, 치토세의 친구입니다!”

아니, 너무 당황하진 말렴. 앞으로 우리 치토세 잘 부탁한다.”

?”

치토세를 잘 부탁한다. 알았지?”

“..., ! 알겠습니다! 걱정 마세요!”

 

이렇게 보니 오빠의 모습이 마치, 결혼하는 딸을 보내며 슬퍼하는 아버지의 모습 같았다.

치토세가 지금 당장 결혼하는 것도 아닌데 왜 그런 모습을 연출할까?

정말 아빠들이란... , 이해가 아예 안 가는 것도 아니지만.

. . .

 

학예회를 무사히 마치고 어느새 시간이 흘러 주말이 찾아왔습니다.

큰일을 하나 끝냈으니, 마음이 매우 홀가분했습니다.

아빠가 보는 내내 눈을 떼지 못하셨다니 아주 큰 성과죠.

정말 기뻤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조금도 떨지 않고 무사히 연기를 해낸 나 자신이 자랑스러웠어요.

그리고 오랜 시간동안 호흡을 맞춰온 다른 친구들도 정말 자랑스러웠습니다.

 

치토세, 잠깐 내려와 봐! 이반 왔어!”

 

아래층에서 엄마의 목소리가 들려왔습니다.

? 이반이? 무슨 일일까?

나는 곧장 총총걸음으로 방에서 나와 현관 앞에 나갔습니다.

이반이 나를 기다리며 초조한 듯 발을 동동 구르며 서 있었습니다.

 

이반? 무슨 일이야?”

치토세 너한테 하고 싶은 얘기가 있어. 나랑 같이 어디 좀 가자.”

, 잠깐만! 신발은 신고 가야지!”

 

이반은 내 오른손을 꽉 붙잡고 어딘가로 리드했습니다.

내 오른손을 잡고 있는 이반은 지금까지 내가 알던 이반과는 뭔가 달랐습니다.

내 손을 잡고 있는 이반의 오른손에는 힘이 잔뜩 들어가 있었습니다.

그렇게 손을 잡힌 채 이반을 따라가니 동네 중앙공원이 나왔습니다.

 

, 이반...”

아무 말도 하지 마.”

 

이반은 중앙공원의 벤치까지 가서야 내 손을 놓아주었습니다.

그리고 나를 향해 뒤돌아보았습니다.

이반의 얼굴표정은 너무나도 진지했기에, 나는 그 모습에 대고 단 한마디도 할 수 없었습니다.

 

. 다음주에... 전학 가.”

“...?! 전학?”

... 다시... 러시아로 돌아가게 됐어. 갑자기 할머니가 돌아가시는 바람에 집안사정이 많이 변했대. 그래서 돌아가는 거래.”

너 전학 온 지 얼마 안 됐잖아. 왜 벌써 가는 거야? 이제 친구들이랑 막 친해졌는데, 이렇게 가버리면...”

그런 건 이제 아무래도 좋아!!”

 

이반이 공원이 떠나갈 만큼 큰 목소리로 외쳤습니다.

나는 너무 당황한 나머지 벙어리처럼 하던 말을 뚝 멈췄습니다.

 

그런 건 아무래도 좋아. 하지만, 이거 하나만은 확실히 하고 싶어. 치토세. 잘 들어!”

, ...”

... ... 너를...! 좋아해!!”

 

지금까지 좋아한다는 말은 귀에 먼지가 얹히도록 들어왔습니다.

그렇지만, 이반이 나를 좋아한다고 한 말은 지금까지 들었던 말들과는 뭔가 다른 게 느껴졌습니다.

단순한 우정이 아닌...

만화나 드라마에서도 흔히 볼 수 있었던 사랑에 빠진 남자의 고백처럼 들렸거든요.

 

내가 언제 이런 얘기 한 적 있었잖아. 러시아에도 너 같은 애가 있었다고. 그거, 사실 거짓말이야. 네 얘기였어. 너는 다른 애들이 날 기분 나빠하며 피할 때도 항상 내 옆에 있어줬어. 별 볼일 없는 나에게 언제나 해맑은 미소를 지어주며 따듯하게 대해줬어. 난 그런 너한테서 천사를... 아니 여신을 봤어! 그런 걸 다 떠나서도... 그냥 너라는 애 자체가 너무 좋았어. 너를 만나고 난 후엔 밤마다 네 생각 때문에 잠도 제대로 잘 수가 없었지. 언제나 내 머릿속에선 네가 지워지지 않았어!”

 

지금까지 내가 알던 이반은 이렇게 진지하고 용감한 아이는 아니었습니다.

이전보다 더 성숙해진 이반의 모습에 반응한 듯, 내 심장의 고동이 계속 빨라졌습니다.

 

러시아에 가서도 난 너를 절대 잊지 않을 거야. 우리 약속하자! , 이다음에 커서 성공하면 꼭 다시 여기로 돌아올게! 그땐... 나랑 결혼해주지 않을래?”

 

이반이 말을 하고 내 양손을 잡음과 동시에, 나는 온 몸이 뜨거워지는 것을 느꼈습니다.

단순히 친구로만 보이던 이반이었지만, 이 한 순간만큼은 이반이 아빠보다 더 멋있게 보였습니다.

단순히 친구로만 여겼던 이반이었지만, 이 한 순간만큼은 남자로서 너무 좋았습니다.

이반의 고백에 대한 답을 해주는 데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습니다.

 

... 나도 이반이 좋아. 그러니까 꼭 돌아와야 돼? 돌아오면 결혼하는 거야. 알았지?”

그래, 내가 꼭 널 행복하게 해줄게. 그때까지 기다려줘. 반드시 돌아올게!”

 

나와 이반은 말없이 서로를 끌어안았습니다.

하지만 행복한 시간은 그리 오래가지 못했습니다.

우리 둘이 함께 보낼 수 있는 시간은 여기서 끝이었으니까요.

이반은 해님이 완전히 하늘에서 내려감과 동시에 그 자리에서 떠나갔습니다.

 

 

월요일이 되었습니다.

이반의 자리는 텅 비어있었습니다.

담임선생님이 이반이 전학을 갔다는 사실을 친구들에게 알려 주셨습니다.

나를 제외한 모든 친구들이 그것에 대해 의아함과 당황스러움을 표현했습니다.

먹구름이 낀 잿빛의 하늘.

나는 친구들이 놀자고 하는 말을 무시한 채 창가에 서서 잿빛의 하늘을 뚫어져라 쳐다봤습니다.

 

치토세. 저 하늘에 뭐가 있는 거야? 아까부터 자꾸 하늘만 보고... 왜 그래?”

안 좋은 일 있었어?”

얘기 좀 해봐. ?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먹구름에서 떨어진 무언가가 내 코끝을 적셨습니다.

흰 눈이 내리기 시작했습니다.

 

별 일 없었어. 단지... 약속을 한 것뿐이야. 언젠가 다시 만나자고. 그리고 결혼하자고.”

 

친구들은 내 말뜻을 이해하지 못한 채 의아한 표정을 지었습니다.

친구들이 이해하지 못해도 상관없었습니다.

아니, 이해하지 않았으면 했습니다.

이 약속은 나와 내 남자친구만이 알고 있는 소중한 약속이니까요.

언젠가 멋진 남자로 성장해서 날 데리러 올 그 아이가 해준 소중한 선물이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