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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터블 후일담 창작 단편 10. 자명종 천사 치토세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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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터블 후일담 창작 단편 10. 자명종 천사 치토세

히아신스v 2024. 1. 20. 13:32

이번 팬픽은 치토세의 갓난아기 시절에 있었던 일을 다룬 팬픽입니다.

시점은 아야세의 시점에서 진행되며, 시간 순서는 현재 -> 과거 -> 현재 순으로 돌아갑니다.

원작과 비교해 다소 어색하거나 다른 설정이 나오더라도 팬픽이니까 그러려니 하고 재밌게 감상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하늘의 먹구름에서 떨어져 내린 흰 눈이 코끝을 살포시 적시는 날.

온 몸의 뼈를 가르고 시리게 하는 추위를 자랑하는 겨울이 왔다.

 

, 역시 겨울엔 빨래들이 잘 안 마르는구나. 주부는 힘들다니까.”

 

나는 언제나 하는 것처럼 집 베란다에 널어놓은 빨래들을 걷어내고 있었다.

바깥에 내어놓고 빨래를 말리기엔 너무 추우니까.

겨울의 추위 때문에 그런지 빨랫감들이 좀처럼 말라주질 않는다.

하다못해 바깥에 햇빛이라도 비치면 괜찮은데, 무슨 이유에서인지 이 날은 먹구름이 하늘에 잔뜩 끼어 마치 바다 위에 떠 있는 기름들처럼 햇빛을 완벽히 차단하고 있다.

 

어휴! 먼지! 오빠도 참... 온 몸에 먼지를 달고 산다니까.”

 

언제나 있는 일이지만 안방 이불에선 먼지가 눈덩이처럼 뿜어져 나온다.

나와 이불을 같이 쓰는 오빠가 하는 일의 특성상 몸에 먼지가 묻는 건 당연한 일이지만...

이불을 널 때나 걷어날 때나 먼지가 뿜어져 나오는 건 좀 심한 거 아닐까.

 

엄마! 다녀왔습니다!”

 

1층 현관에서 치토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 치토세가 벌써 왔나?”

 

나는 잠시 들고 있던 빨랫감들을 내려놓고 1층 현관으로 내려갔다.

현관 앞으로 내려가니, 치토세가 쓰고 있던 털모자와 장갑 등을 훌훌 벗는 모습이 보였다.

 

잘 놀다 왔니? 어서 올라오렴.”

친구들이랑 열심히 노느라고 다 젖어버렸어요.”

집안도 이렇게 추운데 밖엔 얼마나 추울까? 안 추웠어?”

! 전혀요!”

 

누굴 닮아서 이렇게 뜨거운 정열을 항상 달고 사는 걸까.

내 딸이긴 하지만, 정말 치토세는 보면 볼수록 묘한 아이다.

 

새 나라의 어린이는 춥다고 집안에만 있으면 안 된댔어요. 조금 춥더라도 밖에 나가서 열심히 땀을 흘리면 건강해지고 좋잖아요.”

그렇겠구나. 그럼 어서 씻고 베란다로 올라와서 엄마 빨래 너는 것 좀 거들어줄래?”

!”

 

치토세는 곧 신발을 벗고 현관을 넘어 2층으로 올라갔다.

현관 바닥에 아무렇게나 흩어져 있는 털모자와 장갑 등을 주우며 바깥을 보니, 온통 하얀 세상이 펼쳐져있었다.

 

벌써 한 겨울이구나. 세월 참 빠르기도 하지.”

 

나는 열려있던 현관문을 닫고 남은 빨래를 걷고자 서둘러 2층으로 올라갔다.

 

 

눈이 잔뜩 쌓인 겨울이라는 풍경에 맞게 살을 에는 세찬 바람이 불어왔다.

바람을 정통으로 맞고 있는 이불들은 드라이아이스만큼 차가웠다.

빨리 걷어내지 않았다간 이불 째로 얼어버릴 지도 모른다.

 

치토세, 엄마가 이불 내릴 테니까 잘 받아내렴.”

!”

 

나는 빨래집게들을 빼고 이불을 걷어내 뒤에 있는 치토세한테 넘겼다.

 

받아냈으면 원래 있던 방에다 갖다놔. 그건 네 방이야.”

.”

 

치토세는 이불을 양손으로 받아들고 마치 펭귄처럼 뒤뚱거리며 안방으로 향했다.

무거울 법도 하건만, 바닥에 떨어뜨리지 않는 게 참 신기하다.

 

바람 때문에 이불이 다 차가워졌네. 빨리 걷어야겠다.”

 

나는 이 추운 날 밖에서 나와 치토세를 위해 열심히 일하고 있을 오빠를 생각하니, 이불이 차가워선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어 평소 하던 것보다 더 속도를 내어 이불을 걷어내었다.

내가 이불을 걷어냄과 동시에 치토세도 베란다로 왔다.

 

, 이건 안방.”

, 꺄아악!!”

 

치토세는 안방 이불을 받자마자 이불 밑에 묻혀 제자리에서 푹 고꾸라졌다.

 

어머, 미안! 이 이불은 아직 무리인가?”

, 엄마! 저 여기 있어요!”

알았어. 조금만 기다려.”

 

나는 목소리가 들려온 쪽의 이불을 들춰내었다.

이불이 들춰짐과 동시에 치토세가 밖으로 천천히 기어 나왔다.

 

하마터면 숨 막혀 죽을 뻔했어요.”

괜찮니? 미안해. 아까 이불 잘 들고 가서 이것도 들 수 있는 줄 알았어. 이건 엄마가 갖다놓을 테니까 네가 남은 빨래들을 다 거둬줄래?”

.”

 

나는 이불을 양손으로 집어 들고 안방으로 향했고, 치토세는 계속 베란다에 남아 빨랫줄 위의 빨랫감들을 걷어냈다.

나랑 오빠가 쓰는 이불은 꽤 무거웠다.

한 명도 아니고 두 명이 쓰는 거니까 무거운 건 당연하겠지만, 이걸 받아 들자마자 그대로 그 자리에 묻혀버린 치토세한테는 얼마나 무거울까?

나는 이불을 안방 침대 위에 넌 다음 구겨진 부분 없이 부드럽게 펼쳐놓고 다시 베란다로 올라갔다.

 

빨래 다 걷었니?”

. 다 걷었어요.”

추운 곳에서 빨래 걷느라 많이 힘들었지? 그래도 치토세가 도와줘서 일이 더 빨리 끝났어. 고마워.”

아니에요, 엄마. 저 하나도 안 추웠어요.”

 

인간의 몸은 마음처럼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치토세의 양쪽 뺨은 차가운 바람에 오래 노출되어있던 탓에 많이 빨개져있었다.

나한테 걱정 끼치는 게 싫어서 제 딴엔 아무렇지 않다고 하는 모양이다.

이런 부분은 오빠랑 완전히 판박이다.

 

얼굴에 추웠다고 다 쓰여 있어요, 공주님. 이제 내려가자. 오늘 간식은 따듯한 코코아란다.”

 

나와 치토세는 서로의 손을 맞잡고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나와 치토세는 거실의 쇼파에 앉아 녹차와 코코아를 천천히 음미했다.

 

어때, 치토세? 맛있니?”

저는요, 엄마가 해주시는 건 뭐~든지 다 맛있어요. , 맞다! 엄마. 저 겨울방학 숙제 있는데.”

 

겨울방학 숙제?

어쩐지 치토세가 학교를 안 가고 아침부터 친구들이랑 놀러 나가나 했더니, 겨울방학이라서 그랬었구나.

 

겨울방학 숙제? ... 그래. 어제 방학했었지? 요즘 건망증이 너무 심해서.”

선생님이 제가 지금보다 더 어릴 때 무슨 일이 있었는지, 어떻게 자랐는지, 엄마나 아빠께 이야기를 듣고 그림일기 제일 첫 장에 적으라고 하셨어요.”

요즘 학교에선 그런 숙제를 다 내주는구나. 그런데, 어차피 방학도 어제부터 했고... 굳이 그렇게 숙제를 빨리 할 필요는 없을 것 같은데.”

새 나라의 착한 어린이는 방학이라고 게으름피우면 안 돼요. 숙제를 빨리 다 하고 엄마아빠랑, 친구들이랑 열심히 놀고 싶어요.”

 

네 친구들은 보나마나 방학 끝나기 며칠 전이나, 방학 끝나고 나서 숙제를 할 텐데?

역시 다른 아이들과는 달리 치토세는 하는 말 한마디 한마디가 어른스럽고 기특하다.

 

그래. 그래야 우리 딸이지. 그 숙제 지금 할래?”

. 제가 태어나기 전에 무슨 일이 있었고, 제가 갓난아기일 땐 어떤 애였는지 궁금해요.”

얘기하자면 좀 길어지는데. 후훗...”

 

나는 잠시 눈을 감고 옛날 일을 떠올리기 시작했다.

 

. . .

 

이야기는 지금으로부터 약 8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 당시 나와 오빠는 지금처럼 주택이 아닌 작은 연립빌라에서 살고 있었다.

안방과 작은 방 2, 부엌과 연결된 현관, 책장만큼 작은 화장실, 두 사람이 겨우 들어갈 만큼 비좁은 욕실이 집의 전부였지만 처음 집을 산 우리 부부는 그런대로 만족감을 느꼈다.

또한 출산예정일이 얼마 남지 않아 한참 태교에 열중하고 있던 때이기도 했다.

 

아가야, 오늘 들려줄 노래는 하나자와 카나(쿠로네코 성우)의 하늘이란다.”

 

나는 앉아있던 흔들의자에서 일어나 옆집에 피해가 가지 않을 만큼의 음량으로 라디오를 틀었다.

 

시작의 아침은 언제나~느닷없이 찾아오는 법이지~

 

노래의 선율에 흠뻑 빠진 나는 라디오에서 나오는 노래를 흥겹게 따라 불렀다.

하늘이라는 제목의 이 노래는 키리노가 나에게 적극추천해준 노래다.

가수이름이 하나자와 카나라는데... 나는 이 사람이 누군지는 잘 몰랐지만, 키리노 말로는 나름대로 노래 쪽에서 유명한 사람이라고 한 것 같다.

-아야세는 하나자와 카나가 애니메이션 성우이며, 자신이 듣고 있는 노래가 애니메이션 테마곡이라는 건 모른다.-

노래 자체는 너무 시끄럽지도 않고, 또 그렇다고 너무 느슨하지도 않은데다 적당히 경쾌하고 부드럽기까지 하니, 확실히 태교로는 제격이다.

 

마음속의 문을 누군가가 노크한다면~힘껏 열어봐~

 

위이잉... 위이잉...

?”

 

라디오 위에 올려놨던 휴대전화가 진동했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휴대전화의 폴더를 열고 송신자를 확인했다.

어머니 전화였다.

 

여보세요? 어머니?”

그래, 나다. 요즘 별 일 없니?”

. 아무 일도 없습니다.”

남편은 잘해주고?”

그럼요, 얼마나 잘해주는데요. 일 때문에 바빠서 집에 있을 시간이 많지 않은 게 흠이긴 하지만, 일하면서도 틈틈이 전화해주고 그래요.”

그렇다니 다행이구나. 어쨌든, 전에도 누누이 말했지만 예정일도 얼마 안 남았고, 지금이 제일 중요한 시기라는 거 잘 알지? 자나 깨나 몸조심 하는 거 잊지 마라.”

참 걱정도 많으셔. 저도 이제 엄마에요. 그 정도는 굳이 말씀 안 하셔도 잘 아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네가 그렇다니 더는 걱정 안 하마. 어쨌든 무슨 일 있으면 꼭 전화하려무나. 알았지?”

, 알았어요. 그럼 이만 끊을게요.”

 

나와 어머니는 동시에 전화를 끊었다.

어머니는 내가 어렸을 때부터 유독 걱정과 근심이 많으셨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나를 걱정하는 어머니의 마음이 이해가 안 가는 건 아니다.

어렸을 땐 잘 몰랐지만, 내가 이렇게 직접 산모가 되어보니 나를 이렇게 키워주신 어머니의 마음을 조금은 알 것 같다.

 

위이잉... 위이잉...

또 전화? 이번엔 누구지?”

 

임신한 이후 참 많은 사람들한테서 전화가 자주 온다.

어머니, 아버지, 시아버님, 시어머님은 말할 것도 없고, 키리노에, 카나코에, 란에...

그 외 다른 친한 친구들한테도 자주 걸려온다.

나는 폴더를 열고 송신자를 확인했다.

이번엔 키리노다.

 

여보세요? 키리노니?”

! 아야세! 되게 오랜만이다. 잘 있어?”

 

키리노는 언제나 기운이 넘쳐서 탈이다.

 

오랜만이라니. 지난주에도 왔으면서 그래?”

, 그랬던가? 하하, 그건 그렇고, 요즘 뭐 특별한 일 없어?”

평화로워. 오빠가 너무 잘해줘서.”

혹시 그 녀석이 바람피우거나 하면 나한테 바로 전화해야 돼? 그러면 내가 금방 날아가서 싸대기를 확...”

키리노, 나 지금 태교 중인 거 모르니? 과격한 말은 삼가.”

, 하하하하! 미안, 미안. 쿄스케한테 안부 잘 전해주고, 몸조리 잘해. 그리고 아기 태어나면 나를 제일 먼저 불러야하는 거 알지?”

그래, 알았어. 알았으니까 너도 몸조리 잘해. 이만 끊는다?”

 

통화가 끝났다.

출산예정일이 가까워지면 질수록 지인들한테서 하루에 한 번 씩은 반드시 안부전화가 걸려온다.

어쩔 땐 짜증난다고 생각될 정도로 하루 종일 걸려올 때도 있지만, 다 나와 아기를 걱정해주는 마음 때문에 그러는 거니 성심성의를 다해 전화를 받고 대화를 해주지 않으면 안 된다.

그도 그럴 것이 나는 임신과 출산경험이 많은 주부가 아닌 초산(初産)주부기 때문에, 지인들이 걱정하는 것도 당연하다.

 

위이잉... 위이잉...

 

키리노와 통화한 지 5분도 채 안 돼서 또 전화가 걸려왔다.

 

, 이제 그만...”

 

전화한 사람들의 성의와 마음씀씀이 때문에 안 받을 수도 없고, 이럴 땐 정말 난처하다.

 

여보세요?”

 

나는 휴대전화 폴더를 열고 송신자를 확인한 뒤 기운 빠진 목소리로 말했다.

 

 

끊어졌다 하면 또 걸려오는 전화들과 사투하느라 시간 가는 줄을 몰랐다.

그렇게 전화를 하고 또 하다 보니, 어느새 창문을 통해 주황빛의 햇살이 스며들어왔다.

 

어머, 내 정신 좀 봐. 슬슬 오빠 올 시간인데.”

 

, 이런. 벌써 오후 4시가 넘었다. 이제 얼마 안 있으면 오빠가 퇴근할 시간인데.

전화 받느라고 완전히 망각하고 있었다.

나는 휴대전화를 충전기에 꽂아놓고 부엌으로 가 식사준비를 서둘렀다.

 

오늘 요리는 뭐가 좋을까?”

 

일주일 중 6일 동안 쉬지 않고 일하는 오빠를 위해선 장어구이만큼 좋은 건 없겠지.

장어구이는 비타민 A, 단백질, 지방 등 여러 영양소를 골고루 갖고 있는 보양식이다. 특히 더운 여름철에 먹으면 효능이 좋다나.

 

장어가 남은 게 있나?”

 

나는 냉장고를 뒤적이며 장어를 찾는데 신경을 집중했다.

그러나 냉장고와 냉동실 구석구석까지 전부 다 찾아봤지만 장어는 나오지 않았다.

그러고 보니 항상 힘내라고 아침저녁마다 장어구이를 해주던 걸 깜빡하고 있었다.

그렇게 매일같이 해줬는데 떨어지는 게 당연하지.

 

빨리 나가서 사와야겠네.”

 

나는 시장 볼 채비를 갖추고 길을 재촉하려 했다.

그러나 뱃속에 있는 아이에게 부담이 갈까봐 이전처럼 빨리 움직일 수가 없었다.

 

아가야, 미안.”

 

 

이날따라 동네 대형마트의 식료품 코너에 사람들이 왜 그렇게 몰렸는지 모르겠다.

평소 같았으면 식재료들을 차지하기 위해 거침없이 뛰어들었을 나지만, 홀몸이 아닌 몸 상태를 생각하니 차마 그럴 수가 없었다.

나는 결국 장바구니를 제대로 채우지도 못한 채 마트를 나오고 말았다.

 

하아... 완전 빈손이네. 오빠한테 미안해서 어쩌지?”

 

나는 땅바닥이 꺼지도록 한숨을 내쉬었다.

아무리 몸 상태가 그렇다지만, 적극적으로 주부들의 전쟁터에 뛰어들지 못한 나 자신이 너무 원망스러웠다.

그리고 언제나 내 요리를 맛있다고 칭찬해주는 오빠에게 너무 미안했다.

 

아니 너, 아야세 아냐?”

 

누군가가 나를 부르는 목소리가 뒤에서 들린다.

나는 목소리가 들려온 방향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내 바로 뒤에 여자가 한 명 서 있었다. 장바구니를 양 손에 들고 있는 걸 보니 이 사람도 주부인 것 같다.

허리까지 내려오는 길이의 약간 갈색 빛을 띄는 생머리, 타원형의 알이 끼어있는 안경.

어디서 많이 본 것 같은데, 혹시?

 

혹시, 마나미 언니? 마나미 언니 맞죠?”

그래, 나야. 기억나서 다행이다. 잘 지냈니?”

그럼요. 언니도 잘 지내셨어요?”

나야 늘 잘 지내지. 쿄우는 너한테 잘해주니?”

물론이죠. 너무 자상하게 대해주셔서 제가 몸 둘 바를 모르겠는걸요.”

 

결혼식에서 마지막으로 본 이후 연락을 주고받지 못했었는데, 이런 데서 다시 만날 줄이야. 참 세상은 넓으면서도 좁다.

1년이 넘는 세월이 지나 다시 만난 마나미 언니에게선 -머리를 기른 덕분인지- 이전보다 훨씬 더 성숙한 느낌이 풍겨져 나왔다.

반가운 사람을 만난 덕분에 잔뜩 풀이 죽어 있던 나는 금세 기운을 차릴 수 있었다.

 

어머, 그러고 보니 너 그 배는... 설마?”

 

마나미 언니가 내 배를 보고 눈을 크게 부릅뜨며 말했다.

 

. 벌써 만삭이에요. 어서 빨리 아이를 보고 싶어요. 이 아이는 저와 바보 오빠의 사랑의 결실이니까요.”

그래? 행복해보여서 다행이다.”

 

사랑의 결실이라는 내 말을 들은 마나미 언니는 내 배를 보고 있던 시선을 황혼이 지고 있는 방향으로 돌렸다.

어쩐지 언니의 반응이 시원치가 않다.

아무래도 빨리 화제를 전환하는 게 좋을 것 같다.

 

그나저나 언니도 마트에 장 보러 오신 거예요?”

 

나는 최대한 웃는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 ... 그래. 오늘은 다른 날보다 유난히 좀 북적였지?”

 

언니는 애써 태연한 척을 하며 내 질문에 한 템포 늦게 대답했다.

하긴, 마나미 언니도 오빠를 좋아했었으니까.

자신한테서 오빠를 빼앗아가 버린 연적을 눈앞에 두고 있으니, 아무리 착하고 마음씨 좋은 마나미 언니라도 마음이 편치 못한 것은 당연지사.

마나미 언니도 결국은 한 사람의 여자다.

 

너도 장 보러 온 것 같은데, 바구니가 꽤 가벼워보인다?”

 

바구니가... , 그렇지!

언니가 얘기하지 않았으면 큰일 날 뻔했다.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다.

빨리 집에 돌아가서 저녁 준비하지 않으면 오빠가... 그런데, 식재료가 없다!

이러다가 저녁을 그냥 맨밥만 먹게 되는 거 아닐까?

 

평소 같았으면 전장에 거침없이 뛰어들어서 식재료를 탈취했을 텐데... 보시다시피 몸 상태도 이렇고 또 아는 분들한테서 계속 전화가 오는 바람에 일찍 나오지도 못했거든요.”

 

나는 기운이 쭉 빠진 말투로 언니의 말에 답했다.

 

그럼 반찬거리도 제대로 못 샀겠네?”

. 오빠한테 미안해서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그런 얘기를 왜 이제야 하니? 좀 더 빨리 말했으면 좋았을 텐데.”

?”

 

나는 좀 더 빨리 말했으면 좋았을 거라는 언니의 말에 의구심이 들었다.

 

오늘 무슨 요리 하려고 했는데?”

, . 장어구이요.”

장어구이라. 마침 오늘 장어 많이 사 놓은 게 있는데, 한 마리 줄까?”

? 정말요? 그러셔도 괜찮아요?”

 

사막 한 가운데를 해매다 극적으로 만난 오아시스와 같은 언니의 발언이 완전히 기가 꺾여 있던 내 마음을 다시 북돋아주었다.

 

괜찮고말고. 어려울 땐 서로 도와야지. 안 그래?”

정말 고마워요, 언니.”

 

나와 언니는 그동안 못했던 이야기들을 하며 동네 골목을 주황빛으로 물들이고 있는 황혼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마나미 언니와 헤어진 나는 오빠가 귀가할 시간에 딱 맞춰 저녁식사를 준비해놓고 탁자 앞에 앉아 기다리고 있었다.

앉아 있는 내내 초조한 마음이 도저히 가시지를 않는다.

내가 무심코 벽에 걸린 시계를 바라보니, 시침은 오후 6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이제 슬슬 올 때가 됐는데...”

 

언제나 제 시간에 딱딱 맞춰 귀가하는 오빠지만, 가끔은 이 날처럼 늦을 때도 있다.

일 때문에 바쁜 사람이니 그러려니 하지만... 그래도 이렇게 늦을 때는 어쩐지 모르게 불안감이 생기기도 한다.

오빠가 돌아오길 기다리며 한참을 초조해하던 그때, 달그락 거리며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다녀왔습니다!”

 

현관에서 오빠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왔어요?”

 

나는 무거운 몸을 일으켜 현관 앞으로 나가 오빠를 맞이했다.

오빠는 내 모습이 보이자 손에 들고 있던 가방을 내려놓고 나를 부축했다.

 

그냥 앉아있지 왜 나왔어?”

아무리 만삭이라도 운동은 필요해요. 그리고 고생하다 왔는데 맞이해주는 사람이 없으면 섭섭하잖아요. 오늘 저녁은 오빠가 좋아하는 장어구이에요.”

뭣이라?! 장어? 역시 아야세는 여신님이야! 내 마음을 손바닥 보듯 꿰뚫어보잖아!”

 

저녁식사 메뉴가 장어구이라는 걸 안 오빠는 나를 있는 힘껏 껴안으며 어린아이 못지않은 기쁨을 표현했다.

 

아야야... 오빠, 힘이 너무 들어갔잖아요. 어쨌든, 뭐 하나 잊은 거 있지 않아요?”

? ?”

여기요, 여기.”

 

나는 손가락으로 배를 툭툭하고 쳤다.

 

, 맞아. 깜빡했네? 다녀왔습니다, 공주님.”

 

내 제스처를 금방 이해한 오빠는 배를 바라보며 뱃속의 아이에게 인사했다.

 

지은 지 좀 오래돼서, 빨리 안 먹으면 다 식어버릴 것 같으니까 일단 식사 먼저 하고 씻으세요.”

알았어.”

 

오빠는 방에 들어가 양복에서 평상복으로 환복한 뒤, 곧이어 싱크대에서 손을 씻고 탁자 앞에 앉았다.

오빠가 자리에 앉음과 동시에 식사가 시작되었다.

 

잘 먹겠습니다!”

 

오빠는 허공을 향해 큰 목소리로 인사하며 식기를 들었다.

 

뜨아아악! 장어구이의 육즙에서 뿜어져 나오는 상큼하고 격렬한 이 맛! 역시 어떤 식재료든 아야세의 손에 들어가기만 하면 산해진미가 되어 다시 태어나는구나!”

그렇게 좋아요?”

물론! 난 이 세상에서 아야세가 해준 식사가 제일 맛있더라.”

아부는 적당히 하는 거 아시죠, 오빠?”

자기도 속으론 기분 좋으면서. 크큭.”

 

하긴 맞는 말이다.

칭찬 듣고 기뻐하는 건 이 세상 모든 동물들이 다 마찬가지겠지.

 

오랜만에 이거 어때요?”

? ?”

 

나는 젓가락으로 장어구이를 집고 오빠에게 내밀었다.

 

오빠, ~ 하세요.”

~~”

 

오빠는 내 젓가락에 있는 장어구이를 단숨에 자신의 입으로 가져갔다.

 

맛있어요?”

내 손으로 찢어먹는 것보다 한 2천 배는 더 맛있어. 그럼 나도 오랜만에 해볼까? 아야세, ~~”

 

이번엔 오빠가 나에게 장어구이를 내밀었다.

 

~~”

 

나 역시 오빠 젓가락에 있는 장어구이를 단번에 내 입 속으로 넣었다.

 

갑자기 쑥스러워지는데요.”

자기가 먼저 시작해놓고 쑥스럽다고 하면 어떡하니? 크큭. 하긴, 한참 신혼일 때는 밥 먹을 때마다 이랬었는데. 그때가 그립다.”

왜요? 지금도 하려면 할 수 있잖아요.”

하긴. 그렇긴 하지. 그런데 말이야. 요즘은 네가 해준 식사가 너무 맛있어서 먹는데 열중하다보니 할 생각이 안 들더라고.”

그럼 신혼 때는 맛있지 않았다는 거군요?”

 

나를 바라보며 식사하고 있던 오빠가 식기들을 잡고 있는 양손을 벌벌 떨었다.

 

, 아냐! 그만큼 네 요리 실력이 이 전보다 한층 더 발전했단 뜻이야. 정말로!”

그런데 왜 손을 벌벌 떠세요?”

, 그야... 지금 너한테서 어쩐지 모르게 검은 오로라가 보이고 있거든.”

오로라라뇨? 이렇게 해맑은 저한테서 무슨 검은 오로라가 보인다는 거예요?”

 

나는 최대한 웃는 표정을 짓고 오빠에게 말했다.

그러면 그럴수록 오빠의 손은 떨리기만 했다.

 

, 아야세... 난 네가 웃는 표정을 정말 좋아하지만 지금은 되도록 무표정으로 있어주지 않을래?”

왜요? 웃는 게 좋다면서. 후훗...”

... 뭐라고 해야돼나... 가끔씩 네가 웃는 게 좀 무서울 때가... , 아무 것도 아냐. 어서 밥이나 먹자! 난 아야세랑 같이 밥 먹을 때가 세상에서 두 번째로 행복하더라!”

 

오빠는 애써 양손이 떨리는 것을 멈추고, 식기에 들어 있는 밥을 서둘러 입 안으로 밀어 넣기 시작했다.

잠깐, 행복하다고?

오빠의 행복하다는 말을 듣고 무언가가 뇌리를 스쳐지나갔다.

나는 태어나서 지금껏 누군가에게 행복하냐고 물어본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갑자기 궁금해졌다. 언제나 나와 결혼해서 행복하다고 하는 오빠는, 정말 진심으로 행복해서 그런 소리를 늘 입에 달고 사는 걸까?

 

오빠. 묻고 싶은 게 있어요.”

? 뭔데?”

지금... 행복해요?”

 

내 질문을 듣자마자, 젓가락을 바쁘게 움직이던 오빠의 손이 멈췄다.

곧이어 오빠는 식기들을 탁자 위에 내려놓고 진지함이 묻어나오는 표정을 지으며 나를 바라보기 시작했다.

 

그러는 너는, 지금 행복하니?”

 

오빠는 질문에 답을 내놓기는커녕, 도리어 내게 역으로 같은 질문을 했다.

 

그야 당연하죠!”

왜 당연한 건데?”

그건...”

 

먼저 질문한 내가 오히려 말문이 막혀버렸다.

행복한 게 당연하다는 생각은 늘 하지만, 왜 행복한 게 당연한 지에 관해서는 여태껏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왜 당연한 건지 모르겠지?”

...”

그래, 왜 그런 건지는 나도 잘 몰라. 나도 너처럼 행복한 게 당연하다는 생각은 늘 하고 있지만, 왜 행복한 게 당연한 지에 관해서는 여태껏 손톱만큼도 생각해본 적이 없거든. 그래도 딱 한마디로 잘라서 단언할 수는 있지. 행복하니까 행복한 게 당연한 거란 생각이 드는 거고, 행복하니까 다른 사람보고 지금 행복하냐는 질문을 할 수 있는 게 아닐까?”

 

행복하니까 행복한 게 당연한 거란 생각이 드는 거고,

행복하니까 다른 사람보고 지금 행복하냐는 질문을 할 수 있는 거라니.

역시 오빠다운 단순한 대답이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내 마음속에 강하게 와 닿는 것은 왜일까?

 

하지만, 네가 지금 여기서 다시 한 번 나한테 행복하냐고 질문하면 명확한 이유를 댈 수 있어.”

“...?”

행복하냐고? 그럼, 행복하지. 왜 행복하냐고? 내가 너를 이렇게 사랑하고 있으니까. 네가 나를 사랑해주고 있으니까.”

 

오빠가 나를 사랑하고 있고, 내가 오빠를 사랑해준다는 말을 들음과 동시에, 나는 온 몸이 뜨거워지는 것을 느꼈다.

 

, 난 이렇게 생각해.”

, 오빠! 부끄러운 발언은 금지사항이에요! 아이가 다 들으면 어떡할 거예요?!”

, 그렇지. ! 알겠습니다! 부끄러운 발언은 금지사항!”

 

나는 너무 부끄러운 나머지 나 자신도 모르게 큰소리를 쳐버렸다.

그래도 나와 결혼한 걸 후회하지 않는 오빠의 진심이 느껴졌으니 너그러이 봐줘야겠다.

아마 내가 오빠였어도 그렇게 얘기했을 거다. 오빠가 나를 사랑하는 것처럼, 나도 오빠를 세상 그 누구보다도 사랑하고 있으니 말이다.

, 이런 닭살 돋는 얘기를 하더라도 태교엔 별 지장 없겠지?

 

 

3일 후.

나는 언제나처럼 흔들이 의자에 앉아 출산예정일을 기다리며 라디오를 통해 잔잔한 음악을 듣고 있었다.

 

아가야, 어서 빨리 너를 보고 싶구나. 너도 하루빨리 엄마아빠랑 만나고 싶지?”

 

나는 아이가 씩씩하게 놀고 있을 배를 살며시 쓰다듬었다.

바로 그때.

 

... 아야... !!!”

 

설마 빨리 보고 싶다는 말에 아이가 반응한 건 아니겠지?

살면서 단 한 번도 느껴본 적이 없는 엄청난 고통이 나를 엄습해왔다.

이게 바로 내가 어릴 때부터 지금 이 순간까지 말로만 듣던 산모의 진통이라는 건가?

 

, 벌써... 나오려고...?”

 

머릿속이 새하얘지기 시작했다. 분명 이럴 때를 대비해서 언제나 지인들과 논의하며 대비책을 상의했었는데, 당장이라도 내 배를 찢어발길 것 같은 이 엄청난 고통 때문에 전부 다 잊어버렸다.

아무리 기억하려고 노력해도 기억나질 않는다.

 

일단... 오빠부터... ... 아아아!!!”

 

너무 아프다. 말로만 듣던 산모의 진통이라는 게 이 정도로 고통스러운 것일 줄은 꿈에도 생각 못했다.

어머니는 이런 고통을 참으시면서 나를 세상에 태어나게 해주신 건가?

그리고 시어머니도 오빠와 키리노를 낳기 위해 이런 고통을 두 번이나 참아내신 건가?

나는 이를 악물고 고통을 참으며 라디오 앞에 올려놓은 휴대전화를 들었다.

일단 오빠를 불러야 한다. 산부인과로 가는 것은 오빠가 서둘러 귀가한 직후다.

오빠 회사를 향해 전화 신호가 간다.

제발 빨리 좀 받아라... 제발... 오빠... 너무 아파서 지금 당장이라도 죽어버릴 것 같아요!!

 

여보세요? 아야세?”

 

오빠가 전화를 받았다.

어서 얘기하자. 얘기하지 않으면 나도 뱃속의 아이도 위험하다.

 

, 오빠... 지금... 나오려고... 해요... 빨리... 와 주세요...!”

? 나온다니, 설마 아이가?!”

빨리... ... 줘요... 너무 아...파요!”

알았어, 금방 갈 테니까 조금만 기다려!”

 

기다리라는 말과 동시에 오빠는 전화를 끊었다.

이제 오빠가 올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

하지만... 과연 내가 견딜 수 있을까?

사지가 절단 날 것 같은 이 고통을 말이다.

 

 

머릿속을 완전히 비운 채 고통을 참으며 잠시 흐트러진 정신을 바로잡고 보니, 나는 어느새 오빠와 함께 산부인과 병원으로 달려가고 있는 구급차 안에 있었다.

 

아야세, 조금만 참아! 넌 할 수 있어!”

 

오빠는 내 오른 손을 양손으로 꼭 쥐어 잡고 계속 나를 향해 격려의 목소리를 내고 있었다.

오빠 말고도 구급 대원들이 서로 대화를 주고받고 있는 것 같았지만, 내 귀에는 오빠 외 다른 목소리는 전혀 들리지 않았다.

 

힘내, 아야세! 이제 만나는 거야! 그렇게 보고 싶어 했던 우리 아이를!”

 

오빠 말이 맞다. 참아야 한다. 참지 않으면 안 되고, 참지 못해서도 안 된다.

우리 어머니도 시어머니도 이 고통을 견뎌내셨다. 나라고 못할 리 없다.

오빠와 내가 맺은 사랑의 결실이 꽃피는 순간을 놓쳐서는 안 된다.

 

온 힘을 다해 고통을 참으며 감고 있던 눈을 떠보니 나는 어느새 산부인과 병원 분만실에 있었다.

 

사모님, 조금만 참으세요. 이제 나옵니다!”

힘주세요!”

 

어서 빨리 아이를 보고 싶다.

아이를 안아들고 기뻐하는 오빠의 얼굴이 보고 싶다.

 

아가야...! 빨리... 너를... 보고 싶어! 아가야! 아아아!! 아아아아아!!!”

 

나는 내 몸이 낼 수 있는 모든 힘을 있는 힘껏 쥐었다.

 

아앙! 아앙! 아앙!”

 

갓난아기의 울음소리가 들려옴과 동시에 나의 고통도 말끔히 멈췄다.

 

어떻게... 됐나요? 우리 아이는...?”

 

나는 지친 몸을 축 늘어뜨린 채 옆에 있던 간호사에게 물었다.

 

축하드립니다, 무사히 출산하셨어요!”

아주 예쁜 여자아이에요. 어서 안아보세요, 사모님.”

 

간호사가 안고 있던 아기를 내 품으로 옮겨주었다.

이미 알고 있던 사실이지만, 정말 예쁜 여자아이다.

그것도... 흠잡을 곳 하나 없이 건강한 아이였다.

 

나는 아이를 안고 바퀴 달린 침대에 누운 채 병실로 옮겨졌다.

출산의 고통을 뛰어넘어 예쁜 아이를 낳고 나니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다.

오랫동안 진통과 싸웠던 덕분에 아직 몸은 풀리지 않았지만, 그래도 내 품에 안겨있는 아이의 얼굴을 보니 금방이라도 없어진 힘이 다시 솟아날 것 같다.

어서 빨리 지인들에게 이 소식을 전하고 싶다.

 

아야세!”

 

오빠가 기쁨의 미소를 지은 채 병실로 들어왔다.

 

오빠, 보세요! 우리 아이에요. 이렇게 건강하게 태어났어요!”

, 보고 있어. 정말 예쁜 애다. 얼굴이 너랑 완전히 판박이인데?”

이 순진해 보이는 눈매는 오빠 눈을 그대로 갖다 붙인 것 같아요.”

나보단 너를 훨씬 많이 닮았는데 뭘. 벌써부터 성장한 모습이 보고 싶어지는걸. 지금도 이렇게 예쁜데 크면 얼마나 예쁠까?”

 

나와 오빠는 위험한 순간을 잘 이겨낸 기쁨을 만끽했다.

나는 드디어 오랫동안 염원하며, 그 무엇보다도 바라고 또 바라던 엄마가 되었다.

나와 오빠가 맺은 사랑의 결실의 씨앗이 무사히 그 싹을 틔웠다.

너무 기쁘다. 이 세상 전부를 다 가진 것만큼 기쁘다.

 

이름은 뭐라고 지을까?”

... 뭐가 좋을까요?”

, 그래. 좋은 이름이 떠올랐어. 천년만년 행복하란 뜻에서, 치토세(千歲, ちとせ)라고 하면 어떨까?”

좋은 이름이네요. 알았어요. 아가야, 네 이름은 치토세란다. 앞으로도 무럭무럭 건강하게 자라야 한다?”

 

아이의 이름은 치토세로 지어졌다.

치토세는 마치 나와 오빠가 한 말을 알아듣기라도 한 듯, 얼굴에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몇 주 후.

 

치토세, 힘내!”

힘내라! 치토세!”

 

나와 오빠는 어느 정도 자란 치토세가 제자리에서 온 몸을 뒤집는 모습을 유심히 지켜보며 응원하고 있었다.

우리의 응원소리를 듣고 힘을 얻은 듯, 치토세가 제자리에서 멋지게 온 몸을 뒤집었다.

 

잘했어!”

치토세 잘했어!”

 

우리는 치토세를 향해 박수갈채를 보냈다.

별 것 아닌 일이긴 하지만, 어린 치토세가 다른 누군가의 힘을 빌리지 않고 자신의 힘으로 무언가를 해냈다는 것은 충분히 자축할 만한 일이다.

 

정말, 어떻게 이렇게 예쁘고 귀엽고 사랑스럽고 천사 같은 아이가 나올 수 있는 걸까요?”

네가 그만큼 예쁘니까 그렇지. 원래 유전이라는 게, 남자가 좀 못 나도 여자가 미인이면 애가 예쁘게 잘 태어나는 거야. 엄마 몸에서 태어나는 거니까, 당연히 엄마한테서 더 많은 유전자를 얻게 되지.”

너무 비행기 태우지 마세요. 괜히 부끄럽잖아요.”

사실인데 왜?”

 

이때 오빠와 나는 치토세가 막 태어난 이래 애정표현을 자주했다.

또한 치토세가 커가면서, 스스로의 힘으로 해내는 일 하나하나가 너무 기특하게 느껴졌다.

그리고...

바로 이때가 오빠도 나도 전혀 알지 못했던, 치토세의 나이에 맞지 않는 놀라운 행동력이 점점 빛을 발하기 시작했을 때라고 봐야겠지.

 

수개월이 더 지나갔다.

꽤 많은 시간이 흘렀으니 치토세는 네 발로 기어 다닐 만큼 많이 자랐다.

사건은 나와 오빠가 한참 잠을 청하고 있을 새벽에 일어났다.

 

! ! !

 

내 옆자리에서 이상한 소리가 들렸다.

소리가 신경에 거슬린 나는 얼떨결에 잠에서 깨어나 옆에 있는 오빠를 봤다.

오빠는 아무 문제없이 잘 자고 있었다.

이왕 일어났겠다, 나는 시간을 확인하고자 벽에 매달린 시계를 보았다.

 

아직 6시 밖에 안 됐네... 조금 더 잘까... 아니지. 6시니까 일어나야지.”

 

내가 일어나려고 몸을 추스르는 그 때.

옆자리에 있는 오빠 바로 위에 뭔가 검은 물체가 보였다.

 

! ! !

 

아까 들었던 뭔가를 두드리는 소리다.

오빠 위에 있는 검은 물체에서 소리가 난다.

대체 뭘까 궁금했던 나는 다시 일어나 방의 불을 켰다.

 

, 치토세?!”

 

그렇다. 치토세였다.

치토세가 오빠의 배 위에 올라가 양손으로 배를 두드리고 있었다.

곧이어 치토세가 두드리는 감촉이 느껴진 듯, 감겨있던 오빠의 눈이 떠졌다.

오빠는 자신의 배를 두드리고 있는 치토세를 확인하자 잠이 확 깬 듯, 두 눈을 또렷하게 떴다.

 

, 뭐야? 치토세? 아니 얘가 왜 여기 있어? 아기침대에 있어야 될 애가...”

 

따르르르릉...

오빠가 일어남과 동시에, 내 머리맡에 두고 잤던 자명종 시계가 울렸다.

 

아야세, 지금 몇 시야?”

“6시 정각인데요?”

 

나와 오빠는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며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설마, 시계에 맞춰놓은 시간에 맞춰 오빠를 깨운 건... 아니겠지?

그나저나 아기침대의 높이는 아기들이 넘기엔 꽤 높은 걸로 아는데, 치토세는 어떻게 침대에서 내려온 걸까?

 

설마... 아니겠죠?”

그냥 잠이 빨리 깨서 심심하니까 깨운 거겠지. 그래도 이왕 일어났으니까 슬슬 회사 갈 채비나 해야겠다.”

 

오빠는 치토세를 다시 아기침대에 눕혀놓고 욕실로 들어가 세면을 시작했다.

나 또한 자리에서 일어나 바닥에 깔려 있던 이불을 개고 장롱에 잘 포개어 넣은 뒤 식사준비를 서둘렀다.

 

그날 저녁.

나와 오빠는 아침에 있었던 일이 너무 신경 쓰였다.

우리 두 사람은 그렇게 탁자 앞에 서로를 마주보고 앉은 채 아침에 있었던 일에 관해 골똘히 생각하고 있었다.

 

아기침대의 높이는 꽤 높은 걸로 아는데, 치토세 쟤는 저길 어떻게 내려와서 나를 깨운 걸까? 그것도 자명종 시간에 맞춰서 정확하게 말이야.”

모르겠어요. 모든 경우의 수를 두고 생각해봐도 도무지 답이 나오지 않아요. 겨우 몇 개월 된 아기가 어떻게 그럴 수가 있을까요?”

, 나도 옛날에 나 자신도 모르게 이른 아침에 저절로 눈이 떠질 때가 종종 있긴 했지만... 그것도 아주 가끔 있는 일인데 말이지.”

저도 이른 아침에 저절로 눈이 떠지는 일은 종종 있었지만, 그렇게 정확한 시간에 맞춘 적은 없었어요. 치토세는 그 시간에 어떻게 일어난 걸까요? 그냥 우연인가?”

아우!! 모르겠다. 그냥 자자. 생각하는 것만 해도 피곤해 죽겠어. 며칠 지켜보자. 그러다보면 절로 알겠지 뭐.”

 

심증이 있어도 물증이 없으면 범인은 밝혀지지 않는다.

참 별난 일이다. 마치 기다렸다는 듯 오빠를 6시 정각에 정확히 깨우다니.

하루 종일 복잡한 생각을 하느라 지친 우리 부부는 곧장 잠을 청하기로 했다.

우연이겠지, 하는 생각을 갖고 말이다.

 

그리하여 다음날 새벽.

 

! ! !

 

또 옆에 있는 오빠한테서 이불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온다.

설마... 하는 심정에 눈을 뜨고 오빠가 있는 쪽을 봐보니...! 역시나.

치토세는 단순한 우연일 거라 생각한 나와 오빠의 예상을 보란 듯이 뒤집었다.

 

따르르르릉!

 

치토세가 오빠를 두드림과 동시에 자명종 시계도 울렸다.

그 와 동시에 오빠의 감겨있던 두 눈도 떠졌다.

 

, 치토세?! 이것 참 특이한 일이네? 자명종 시계보다 더 정확하잖아?”

말도 안 돼... 이러면 우연이 아닌 게 되지 않나요?”

그러게 말이야. 하하하... 치토세, 네가 옆에 있으면 아빤 절대 회사 지각할 일 없겠구나? 하하하...”

 

오빠는 하나의 얼굴로 놀라움과 기쁨의 감정을 동시에 표현했다.

 

다음 날도, 또 다음 날도, 또 그 다음 날도 치토세는 자명종 시계보다 더 정확하게 오빠를 아침 6시에 깨웠다.

그 날 이후 우리 집에선 더 이상 자명종 시계를 볼 수 없었다.

자명종 시계보다 더 정확한 치토세가 있으니 말이다.

치토세는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단 하루도 빼먹지 않고 아침마다 오빠를 깨웠다.

처음엔 황당하게 여겼던 일이지만, 어느 정도 익숙해지고 나서는 치토세가 기특하단 생각이 들었다.

 

-그나저나 겨우 걸음마를 시작한 애가 어떻게 그 높은 아기침대에서 내려왔던 걸까? 그건 7년이 지난 현재도 풀리지 않는 최대의 수수께끼다.-

 

그로부터 2년 후.

앞으로 치토세가 왕성하게 뛰어놀 것을 생각한 우리 부부는 연립빌라에서 주택으로 이사했다.

 

, 좋은 집이네요?”

그렇지?”

 

이삿짐센터 사람들이 짐을 전부 내려놓자, 우리 가족은 곧 현관을 넘어 집안으로 들어갔다.

우리 가족이 새로 이사한 주택은 파란색 지붕이 유난히 돋보이는 2층 주택이었다.

2층에는 전망 좋은 베란다가, 1층에는 작은 정원을 만들 수 있을 만한 넓이의 잔디마당이 있었다.

집 외벽은 전부 밝은 노란색으로 칠해져 있어 따사로운 느낌이 들었다.

 

치토세, 여기가 새 우리 집이야. 어때? 멋있지?”

! 멋있어요!”

 

아직 3살이 좀 안 됐는데, 치토세는 벌써부터 나와 오빠의 말을 알아듣고 말을 할 수 있을 만큼 성장했다.

 

치토세 방은 1층으로 하고, 우리는 2층으로 올라갈까?”

그렇게 해요.”

치토세, 엄마아빠 없이도 밤에 혼자서 잘 수 있지?”

! 잘 수 있어요!”

 

3살 어린 아이의 대답치곤 정말 씩씩한 대답이다.

하지만 안방을 2층으로 잡고 치토세 방을 1층으로 잡은 건...

치토세가 모르는 오빠만의 음모(?)였다.

 

오빠, 정말 괜찮겠어요?”

너도 궁금하잖아. 한 번 시험해보자. 방이 떨어져있어도 깨우러 오는 지.”

그렇긴 하지만... 2층으로 올라오다가 다치기라도 하면 어떡해요?”

막 걸음마 시작했을 때도 그 높은 아기침대에서 멀쩡히 잘 내려왔잖아. 걱정 마, 괜찮을 거야.”

 

정말 괜찮을까?

, 두고 보면 알겠지.

 

이사 한 다음날 새벽.

 

아빠, 일어나세요! 일어나세요!”

 

내 옆자리에서 치토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목소리에 반응한 내가 눈을 떠서 옆자리를 바라보니, 치토세가 오빠를 흔들어 깨우고 있었다.

과연 아빠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는구나.

어떻게 단 하루도 안 빼놓고, 그것도 정확한 시간에 딱딱 맞춰 아빠를 깨울 생각을 할까? 생각하면 할수록 의문이다.

일어나라고 말까지 하면서 깨우는데, 죽지 않은 이상 안 일어날 수가 있을까?

 

그래그래! 아빠가 졌다! 일어날게!”

 

치토세가 깨우는 데 견디다 못한 오빠는 이불을 박차고 일어났다.

 

치토세, 아빠 잠 좀 자자!”

안 돼요! 새 나라의 착한 어린이... 아니, 착한 아저씨는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나야 한다고 선생님이 그러셨단 말이에요!”

아이고... 너는 아침잠도 없니? 어떻게 하루도 안 빼놓고 참... 에휴... 내가졌다 졌어.”

 

오빠는 아침잠 자는 것을 포기한 듯, 땅이 꺼지도록 한숨을 크게 내쉬었다.

후훗... 어쩐지 오빠가 가엾게 느껴지기도 했지만, 나쁜 뜻에서 나오는 행동이 아니니까 야단칠 수도 없는 노릇이다.

치토세 덕분에 오빠가 회사에 지각하는 일도 없고, 나도 늦잠 자는 일이 없으니 말이다.

 

. . .

 

제가 정말 그랬어요?”

 

치토세가 두 눈을 휘둥그레 뜬 채 내게 물었다.

 

그래. 넌 잘 기억 안 나겠지만, 네가 아빠를 깨우기 시작한 건 갓난아기 때부터 있었던 일이야. 엄마도 처음엔 엄청 황당했지만, 좀 시간이 흐른 후엔 네가 얼마나 기특하게 느껴졌는지 몰라.”

그럼, 저 앞으로도 아침마다 열심히 아빠 깨워드릴래요!”

네가 그래주면 엄마야 늘 편하지. , 그래. 깨워드릴 때마다, 좋은 아침이에요~ 하고 말해보렴. 그럼 아빠도 더 기분 좋게 일어나실 수 있을 거야.”

, 알았어요. 좋은 아침이에요!”

 

치토세는 최대한 얼굴에 미소를 지으며 큰 목소리로 외쳤다.

그때.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다녀왔습니다!”

 

현관에서 오빠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시계를 보니 아직 오후 2.

이상하네? 이 시간에 퇴근할 오빠가 아닌데?

나는 곧 현관으로 나가 오빠를 맞이했다.

 

오늘은 별나게 빨리 왔네요?”

내일이 주말이라 그런가, 사원들이 일을 손에 못 잡는다고, 실장님이 일찍 퇴근시키셨어.”

예전에도 그랬지만 실장님은 정말 넉살이 좋으신 것 같아요. 언제 한 번 다시 찾아뵈어야겠어요.”

아빠! 다녀오셨어요?”

 

내가 현관에 마중나가 있을 때까지 멍하니 거실에 있던 치토세는 오빠가 현관에서 거실로 자리를 옮기자마자 냅다 달려와 오빠의 품에 안겼다.

 

그래, 다녀왔다.”

아빠, 있잖아요. 앞으로도 제가 언제나 아침마다 일찍 깨워드릴게요. 그러니까 힘내서 열심히 일하셔야 돼요?”

그럼, 물론이지. 이젠 네가 깨워주지 않으면 아침에 일어나기가 싫지 뭐니?”

아빠 힘내시라는 의미에서 드리는 치토세의 선물이에요!~

 

치토세는 오빠의 왼쪽 뺨에 가볍게 입맞춤을 했다.

 

하하하, 그래그래. 고맙다. 아빠 앞으로 더 힘낼게.”

아빠 파이팅!”

 

치토세는 귀여운 목소리로 오빠에게 응원의 목소리를 보냈다.

나는 부녀의 아름답고 정다운 모습을 옆에서 조용히 지켜봤다.

 

언젠가 이런 말을 들은 적이 있었다.

인간은 행복의 조각을 찾으면서 사는 동물이라고.

곳곳에 흩어진 행복의 조각 하나하나를 찾으며 행복을 쌓아나가는 동물이라고.

인간이 찾을 수 있는 행복의 조각 숫자는 끝을 알 수가 없다고.

앞으로도 우리 가족이 찾을 행복의 조각들은 한도 끝도 없이 많겠지?

행복의 조각을 찾으며 살 수 있는 이 평온한 일상이 언제까지나 쭉 이어졌으면 좋겠다고, 나는 지금도 소망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