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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터블 후일담 창작 단편 12. 기다리는 노파

히아신스v 2024. 1. 20. 13:32

이번 팬픽은 이전 화와 마찬가지로 가장 쿄스케가 출장으로 한 달간 집을 비운 사이에 있었던 일들 중 하나를 다루게 됩니다. 시점은 변경 없이 아야세의 시점으로 진행됩니다.

원작과 비교해 어색하거나 조금 다른 설정이 나오더라도 팬픽이니까 그러려니 하고 재밌게 읽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차갑고 매서운 바람이 온 몸을 수축시키는 어느 겨울날의 아침.

나와 치토세는 살을 에는 것 같은 강추위에도 불구하고 동네를 돌며 아침산책을 하고 있었다.

 

, 춥다. 치토세, 안 춥니?”

전 괜찮아요. 새 나라의 건강한 어린이는 이 정도 추위에 약해지면 안 돼요. 조금 추워도 열심히 운동해서 땀을 빼면 금방 따듯해지잖아요.”

안 춥다니 좋겠구나?”

 

마음과 몸이 완전히 딴판이구나, 치토세.

지금 네 얼굴은 추워 죽겠다고 뺨을 새빨갛게 물들이며 구조신호를 보내고 있단다.

치토세는 두 발로 걸음마를 제대로 하기 시작한 그때부터 단 하루도 빼놓지 않고 현재까지 오빠와 동네산보를 해왔다.

물론 지금은 오빠가 옆에 없으니 내가 같이 산보를 다녀주고 있다.

 

보세요, 엄마. 레온도 아침 일찍 운동해서 기분 좋대요.”

 

언제나 평범한 나날을 보내던 우리 가족에게 엄청난 변화가 생겼다.

일반 가정집에서 키우기엔 좀 커다란 애완동물이 생겼다는 거다.

지금 옆에 있는 표범 레온이 바로 그 애완동물이다.

 

넌 그런 걸 어떻게 아니?”

레온이 그렇게 말하고 있으니까요.”

 

얼핏 보면 그냥 아무렇게나 내뱉는 말 같지만, 사실 치토세는 말을 못하는 레온의 대변인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그 속마음을 잘 읽는다.

동물의 마음도 다 읽을 줄 알고, 이럴 땐 정말 얘가 보통 사람이 맞는지 의심이 들기도 한다.

 

크아아암~!”

 

레온은 치토세가 머리를 쓰다듬는 감촉을 즐기며 길게 하품을 했다.

이 녀석은 며칠 전 우리 집에 불쑥 찾아와 한 가족이 되었다.

사건은 온 동네가 어둠에 잠겨있던 새벽에 일어났다.

그 날 새벽, 잠이 오지 않아 차라도 한 잔 하려고 일어나니, 아래층에서 우리가 있는 2층을 향해 누군가의 발자국 소리가 들려왔다.

혹시나 도둑이 아닐까 의심했던 나는 그 길로 곤히 자고 있던 치토세를 깨워 같이 발자국 소리가 들려온 곳으로 내려갔다.

집 안에 우리 말고 다른 누군가가 있음을 확신한 나는 소리가 난 방향을 향해 국자를 휘두르며 달려들었지만... 상대는 국자 같은 게 통할 상대가 아니었다.

동물원을 탈출해 도주 중이라고 TV방송을 통해 보도됐던 수컷 표범 한 마리가 날카로운 송곳니를 드러낸 채 군침을 흘리며 나와 치토세를 노려보고 있었던 거다.

이 표범이 바로 지금의 레온이다.

이대로 있다간 잡아먹힐 지도 모른다, 라고 직감하며 벌벌 떨고 있던 그때. 치토세가 겁도 없이 녀석의 바로 눈앞까지 다가가더니

 

이리 와, 착하지?”

 

라며 마치 강아지를 부리듯 녀석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러자 녀석이 잔뜩 찡그리고 있던 미간을 활짝 펴고 마치 애완고양이처럼 제 집인 양 그 자리에 푹 눌러앉아 치토세가 자신을 쓰다듬는 감촉을 즐기는 게 아닌가.

그 날 이후 레온은 치토세의 애완동물이 되었다.

이 광경을 뒤에서 잠자코 지켜보던 나는 정말 황당하기 그지없었다.

물론 치토세가 날 때부터 순수하고, 오지랖이 넓어 대인관계도 좋은데다 동물을 좋아하는 마음이 지극한 아이이긴 했지만... 설마 표범 같은 사나운 맹수를 아무렇지도 않게 자기 친구로 만들 줄은 꿈에도 상상하지 못했다.

이런 영화 같은 일이 다른 사람도 아니고 바로 내 눈앞에서 벌어질 줄도 몰랐고 말이다.

 

아이, , 레온, 간지러워.”

 

레온은 치토세의 왼쪽 뺨을 혓바닥으로 핥았다.

이 녀석은 내 앞에선 표범이지만 치토세 앞에선 그냥 덩치만 큰 고양이다.

 

레온. 치토세가 간지럽다고... 꺄악!”

크어어엉!!”

 

그만하라고 하려는 찰나에 레온이 나를 향해 미간을 찌푸리며 울부짖었다.

설마, 자길 방해하지 말라고 한 건가?

 

레온, 엄마한테 그러면 안 된다고 했잖아.”

크르르르...”

 

레온은 치토세가 자신을 타이르자 곧장 나를 향해 잔뜩 찌푸리고 있던 미간을 폈다.

이 녀석은 치토세 말만 따르나 보다.

 

엄마한테 죄송하다고 사과드려. 죄송합니다. 다시는 안 그럴게요.”

 

치토세는 나를 향해 고개를 숙이며 레온 대신 사과했다.

그러자 레온도 치토세를 따라 제자리에 엎드려 나를 향해 고개를 숙였다.

 

뭐 겨우 이런 일 가지고 사과를 하고 그러니. 그렇게 찬 바닥에 오래 붙어있으면 감기 걸리겠다. 어서 일어나렴.”

 

이런 일로 기분이 나빠질 만큼 나는 속 좁은 사람이 아니다.

 

어머? 여긴 어디지?”

 

이런, 길도 제대로 안 보고 걷다보니 이상한 곳으로 와버렸다.

신경 쓰지 못한 새 나와 치토세는 지금껏 단 한 번도 와본 적 없는 골목에 들어와 있었다.

이 골목은 텔레비전에서 다큐멘터리를 통해 간혹 보던, 70 ~ 80년대의 마을 풍경을 그대로 옮겨놓은 것처럼 역사의 흔적을 고스란히 간직한 구식 주택들이 즐비한 동네였다.

 

우리 동네 근처에 이런 골목이 있었던가? 지금까지 한 번도 못 본 것 같은데. 치토세, 넌 혹시 여기 어딘 지 아니?”

저도 오늘 처음 와 봐요.”

 

나이 먹고 길을 다 잃을 줄이야.

그나저나 여기 지리를 모르는데 어떻게 나가야 하나?

나는 현재 위치가 어디인지 알아볼 수 있을만한 표지판 같은 것이 없나 이리저리 고개를 돌려 둘러봤지만...

그런 게 있었으면 이렇게 두리번거리지도 않았겠지.

 

젊은이. 무슨 일인데 그렇게 제자리에서 서성이고 있나?”

 

안절부절 못하고 있는 나의 바로 뒤에서 연륜이 깊게 묻어나는 할머니의 가늘고 까칠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목소리가 들려온 방향으로 고개를 돌려보니 성성한 백발과 세월의 흔적을 보여주는 얼굴주름을 가진 할머니 한 분이 서계셨다.

 

, 할머니. 안녕하세요? 혹시 이 동네 주민이신가요?”

그래. 여기 살지. 그러는 젊은이는 왜 그렇게 안절부절 못하고 있어? 길이라도 잃어버린 거야?”

. 우연히 들어왔다가 그렇게 됐네요. 어디로 나가면 될까요?”

이 동네에서는 어디든 뚫린 길만 따라가도 중앙공원이 나올 텐데? 젊은 사람이 벌써부터 방향감각이 없으면 어떡해?”

 

이 동네는 태어나서 처음 와 보는 동네인데 모르는 게 당연하죠.

 

, . 어쨌든 알려주셔서 감사합니다, 할머니.”

고맙긴 뭘. 그나저나 이런 이른 아침부터 뭐하고 있었던 겐가?”

딸이랑 같이 아침운동하고 있었죠.”

호오, 딸이라면 저기 저 아이 말인가?”

?”

 

그러고 보니 치토세와 레온이... 어디 갔지?

나의 시선이 할머니가 가리킨 방향으로 쏠렸다.

레온은 주택 근처 벽에 우뚝 서 있는 전신주를 마치 나무를 타는 것처럼 올라가고 있었다.

 

레온, 힘내! 조금만 더 올라가면 꼭대기야!”

 

치토세는 그런 레온을 보며 응원을 보내고 있었다.

 

아니 얘들이! 그건 나무가 아니라 전신주야! 위험하다고! 레온도 그만하고 빨리 내려와! 그러다 감전될라!”

괜찮아요, 엄마. 이 전신주엔 전기 안 흐른다고 레온이 그랬어요. 그리고 나무 타고 싶다고도 했고요.”

그게 무슨 소리야?”

 

물론 표범이 나무를 타는 맹수인 건 맞지만...

아무리 근처에 나무가 없어도 그렇지 전신주에 올라가면 어쩌자는 거야?

 

어쨌든 위험하니까 빨리 내려오라 그래!”

괜찮아, 그냥 둬.”

?”

 

레온을 말리려던 나를 할머니가 중간에 끼어 막으셨다.

 

저 아이 말대로야. 저 전신주 안 쓰인지 10년은 됐다네. 전기 같은 건 흐르지 않을 테니 애완고양이 걱정은 안 해도 돼.”

저기 할머니, 저건 고양이가 아니라... 표범이에요.”

 

어쨌든 위험하진 않다니 다행이다.

 

그래? 아무리 봐도 고양이구만 뭘.”

세상에 저렇게 큰 고양이가 어디 있어요?”

 

잠깐만. 어떻게 보면 고양이라고 해도 맞는 말이긴 하다.

표범은 고양이과에 속하니까 고양이라고 해도 되는 거 아닌가?

하지만 그러면 표범이란 이름의 의미가 없잖니.

 

그나저나 이렇게 만난 것도 인연인데 젊은이 이름이나 좀 알자고.”

. 제 이름은 아야세에요. 저기 제 딸은 치토세고요.”

그래? 난 키요라고 해. 이렇게 만나서 반갑구먼?”

저도 반가워요. , 그렇지. 치토세, 이리와 봐!”

 

나는 동네 주민들에게 피해가 가지 않을 만큼의 목소리로 치토세를 불렀다.

치토세는 자신의 이름이 불리자 곧장 레온에게 전신주에서 내려오라고 지시한 뒤 쏜살같이 내 옆으로 달려왔다.

레온도 바람처럼 전신주에서 내려와 치토세 옆으로 달려왔다.

 

할머니께 인사드리렴.”

안녕하세요, 할머니. 레온도 인사해.”

 

치토세와 레온은 할머니 앞에 대고 정중히 고개 숙여 인사했다.

 

아니 너는...”

 

할머니의 시선이 치토세를 향해 고정된 채 꿈쩍하지 않았다.

치토세 얼굴에 뭐라도 묻었나?

 

할머니, 할머니.”

, ? ?”

 

아까까진 한 번도 안 더듬으시고 올곧게 말씀 잘 하시더니.

할머니는 내가 자신을 부르자 애써 침착함을 유지하며 대답하셨다.

 

어디 편찮으신 곳 있으세요?”

, 아니. 아무 것도 아냐.”

 

어쩐지 할머니의 태도가 좀 이상하다.

 

그건 그렇고, 참 예의바른 아이구나? 게다가 동물의 마음도 다 읽을 줄 알고. 딸을 정말 참하게 잘 키웠네?”

 

마치 할머니가 자신의 당황스러움을 감추고자 일부러 대화주제를 치토세로 돌리는 것 같이 느껴지는 건 왜일까.

그래도 괜한 오지랖 때문에 갈등을 빚긴 싫으니까... 그냥 할머니가 유도하는 대로 하자.

 

과찬이세요.”

나도 이런 손주 하나 있으면 당장 죽어도 여한이 없을 텐데 말이야. , 내 자식 녀석들은 집 나가고 어디서 뭘 하고 있는 지 연락 한 번 안하고. 자기들 보고 싶어 하는 부모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 지...”

? 그럼 지금 혼자 사세요?”

그래. 벌써 혼자 산 지 30년이 다 되가네. 혼자 살다보니 자네나 자네 딸처럼 젊은 사람만 보면 어찌나 반가운지.”

 

할머니의 양쪽 눈썹이 기운이 빠진 것을 증명하듯 아래를 향해 축 늘어졌다.

의료기술의 발달로 인해 우리나라는 고령화 사회로 변모해가고 있다.

그에 따라 가족 없이 혼자 사는 독거노인이 부쩍 늘어났다.

독거노인 문제는 이전부터 이미 뉴스 등 언론에서도 많이 다뤄졌고, 지금도 여전히 다뤄지고 있는 문제지만, 시간이 흐르고 또 흘러도 좀처럼 해결될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30년 동안 혼자 사셨으면 많이 외로우시겠어요?”

외로워도 어쩌겠나. 참아야지. 어차피 살날도 얼마 안 남았는데.”

아이 참, 할머니. 괜히 그런 말씀하시다가 큰일 나면 어쩌시려고 그러세요? 그리고 자녀분들이 워낙 바쁘게 사느라 할머니를 뵐 시간이 없어서 그러는 걸 거예요.”

하긴, 그렇겠지?”

 

할머니가 씁쓸한 미소를 지으시며 말씀하셨다.

내가 지금은 이렇게 젊고, 치토세도 많이 어리지만, 언젠가 나도 치토세도 지금의 할머니와 같은 처지가 될 것 같다고 생각하니 도저히 모른 척 하고 넘어갈 수가 없다.

또한 나는 우리 동네에서 가장 오지랖이 넓기로 소문난 남자 코우사카 쿄스케의 아내 코우사카 아야세다.

곤경에 처한 사람을 모른 척하는 일은 집안의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는다.

더군다나 이런 오지랖은 괜한 오지랖도 아니고 말이지.

 

할머니. 비록 친 자식은 아니지만 저랑 치토세가 있잖아요. 이제부터 저희가 꾸준히 댁에 들려드릴 테니까 기운 내세요.”

그래도... 그러면 내가 너희한테 폐를 많이 끼치게 될 텐데...”

아이, 민폐라뇨! 민폐 끼칠까봐 걱정되는 건 오히려 저희라고요. 그리고 저희도 포근하고 다정한 할머니가 생겨서 좋은 걸요 뭘. 그렇지, 치토세?”

! 저도 할머니가 좋아요!”

 

치토세가 활짝 웃으며 씩씩한 목소리로 말했다.

나는 치토세를 보던 시선을 곧장 할머니에게로 돌렸다.

씁쓸한 표정을 짓던 할머니의 양쪽 눈썹이 둥근 언덕을 그리고 있었다.

 

그래? 그렇다면 부탁 좀 할까? 나야 내 말상대만 해주면 그저 좋지.”

저희야말로 잘 부탁드려요. 제 딸도 아직 철없는 어린애지만 할머니의 외로움을 달래주는 건 잘 할 거예요.”

아이고, 이거 어여쁜 손주들이 생겨서 기분이 좋구먼?”

그렇게 활짝 웃으시니까 한 30년은 젊어 보이세요. 젊으셨을 땐 꽤 미인이셨을 것 같아요,”

그럼! 나도 왕년엔 한 미모 했었지. 그땐 남자들이 나 좋다고 줄을 서며 따라다녔다니까? 그러는 자네도 미모가 보통이 아니구먼? 자네 남편도 주변 사람들 눈치 보느라 신경이 많이 쓰이겠어? 부인이 이렇게 예뻐서 말이야.”

 

조금 전까지 씁쓸한 표정을 짓고 계시던 할머니의 얼굴이 마치 태양처럼 환해졌다.

이렇게 환한 표정을 지으시니 젊으셨을 땐 어떤 분이셨을지 조금은 상상이 간다.

 

꼬르르륵...

 

어디선가 배 곪는 소리가 들리며 활기찬 분위기에 초를 쳤다.

그런데, 어째 배 곪는 소리가 좀 크다?

 

엄마. 레온이 배고프대요. 저도 배고파요.”

 

범인은 레온이었군.

 

맞다. 그러고 보니 아직 아침도 안 먹었구나? 이제 그만 집에 갈까?”

잠깐만, 이왕 여기까지 온 거 우리 집에 가서 먹는 게 어때? 바로 저 앞이거든.”

? 하지만 그러면 괜히 폐를 끼치게 돼서...”

괜찮아, 괜찮아. 밥은 여럿이서 함께 먹어야 맛있잖아. 뭔가 곤란한 일이 있을 땐 이웃끼리 서로 도와야지. 안 그래?”

, ... 정 그러시다면...”

 

원래 권유는 세 번 받고 한 번 수락하는 거라고 하지만...

어르신의 호의를 무시하는 건 젊은 사람의 도리가 아니니 두 번 권유 받고 한 번 수락하자.

그나저나 할머니, 뭔가 중요한 사실을 하나 잊고 계신 것 같으시네요.

지금 제가 가장 걱정하고 있는 일은 저와 치토세가 폐를 끼치는 게 아니라,

치토세 옆에 있는 커다란 고양이의 식사를 할머니가 감당하셔야 한다는 거라고요.

 

그런데 얘야. 이 고양이는 뭘 먹니? 크기를 보아하니 생선 한 마리... 정도로는 양이 안 차겠지?”

 

할머니가 치토세에게 질문하셨다.

그야 표범이 먹는 건... , 우리나라엔 예로부터 표범이 살지 않으니 어르신들은 표범에 대해서 잘 모르시겠구나.

 

레온은요, 고기는 뭐든지 잘 먹어요! 그리고 우유도 좋아해요.”

그래? 난 여태껏 고양이는 생선만 먹는 줄 알았는데 고기도 먹는 모양이구나?”

 

그거야 육식성이니까 당연하죠.

 

배고파도 조금만 참으려무나. 이 할머니가 곧 맛있는 밥을 주마.”

 

할머니가 레온의 머리에 손을 올려놓으며 살며시 쓰다듬으셨다.

, 안돼요! 할머니! 걔는 치토세말고 다른 사람한테는...!

 

크르르르... 크아아암~!”

 

무조건 험상궂은 표정을 짓고 짖어대는 녀석인데...

할머니가 자기 마음에 든 모양인 듯, 레온은 제자리에 올곧게 서서 할머니가 자신을 쓰다듬는 감촉을 즐겼다.

 

그래, 그래. 착하지?”

레온은 무지 착한 애에요.”

 

나는 자기한테 손도 못 대게 하면서... 너 정말 사람 차별하니?

 

 

우리는 할머니의 뒤를 따라 그녀의 집으로 향했다.

그나저나, 이 동네는 정말 보면 볼수록 낡은 동네다. 요즘 같은 시대에 이런 과거의 상처와 흔적을 가진 마을이 그대로 남아있을 줄은.

인기척이 전혀 느껴지지 않는 주택들, 조명 부분이 깨진 가로등과 전선이 끊어진 채 방치되고 있는 전신주들을 계속 보아하니...

마치 개발 사업이 실패해서 그대로 가차 없이 내팽개쳐진 마을 같은 느낌이 난다.

그렇게 보이는 것도 당연한 게, 뭔가 공사를 위해서 수없이 부수고 땅을 판 흔적은 여기저기 많이 있었지만, 막상 제 형태를 온전하게 갖추고 있는 시설물들은 눈을 씻고 찾아봐도 찾기가 힘들었다.

뭔가 이렇게 된 사연이 있지 않을까?

동네에 담긴 사연이 궁금해진 나는 이곳에서 오랜 세월을 보내신 할머니께 여쭤보기로 했다.

 

, 할머니. 이 동네에 혹시... 예전에 개발 사업이나 혁신 도시 사업 같은 게 있었나요?”

 

내 질문을 들으신 듯, 할머니의 걸음이 제자리에서 뚝 하고 멈췄다.

 

갑자기 그런 건 왜 물어?”

, ... 저기, 그냥요. 동네가 좀... 여기저기 부서진 데도 많고, 어째 다른 곳보다 좀 지저분 하달까. 요란해보인 달까 하여튼 그런 느낌이 나서요.”

 

할머니는 천천히 뒤를 돌아보시며 나와 치토세를 물끄러미 바라봤다.

 

자네가 그런 걸 묻는 것도 어찌 보면 당연해. 그래, 그 말대로 요즘 세상에 개발 안 된 동네가 어디 있겠나? 우리 동네도 한 때는 혁신 도시가 어쩌니 그런 개발 사업을 한다고 우락부락한 장정들이 우르르 몰려와서는, 온 동네를 이리저리 헤집고 다니면서 때리고 부수는 일을 밤낮없이 반복했었어. 결국은 이렇게 나 몰라라 하고 팽개쳐버릴 거면서... 그 덕분에 여긴 무슨 귀신 나오는 동네처럼 으스스한 곳이 되어버렸지.”

 

할머니는 내 질문에 답을 하시며 땅이 푹 꺼질 만큼 깊은 한숨을 내쉬셨다.

 

귀신 나오는 동네... 허허. 그 말이 참 여기랑 잘 어울리는 것 같구먼. 그나마 번지수라도 남아 있는 게 다행이지, 누구라도 귀신 나오는 동네라고 생각할 만도 해. 젊은 사람들은 여기가 혁신 도시 사업이 실패해서 도시로서의 가치가 없다느니 어쩌느니, 이런 다 쓰러져가는 동네에서 살고 싶지 않다느니 하며 다 다른 마을로 떠나버리고... 지금 여기엔 나처럼 죽을 날만 기다리는 꼬부랑 영감 할망구들밖엔 남아있지 않아.”

할머니...”

그렇게 아무런 꿈도 희망도 남아 있지 않은데도, 여기 사는 모든 영감 할망구들은... 다들 기다리고 있어. 두 번 다시 돌아올 리 없는 자식들과... 오래 전에 헤어진 연인이, 자신을 만나러 돌아와 줄 거라는 헛된 희망을 품고 말이지.”

 

할머니는 하늘을 올려다보며 쓸쓸함이 가득 묻어나는 표정을 지은 채 말씀하셨다.

할머니의 양쪽 눈썹이 아래로 축 쳐져 있다.

이런, 내가 괜한 질문을 한 모양이다.

 

, 할머니. 죄송해요. 괜히 마음 아프시게 해서...”

마음 아프긴 뭘. 다 사실인 걸 어쩌겠어? 인간이 어디 단 한 번이라도 마음 안 아파보고 살 수 있나? 마음에 흉터 하나 없는 인간은 이 세상에 단 하나도 없어.”

 

할머니가 나를 향해 측은한 미소를 지으시며 말씀하셨다.

겉은 이러셔도 속은 웃을 수 있는 상태가 아니시겠지.

 

이제 다 왔구먼. , 어서 들어들 와.”

 

이런 저런 대화를 하다 보니 눈 깜짝할 새 목적지에 도착했다.

목재로 만든 창틀을 화선지로 채운 미닫이문에, 세월이 흐름에 따라 풍화된 흔적이 한 눈에 보이는 기와지붕으로 이루어진 1층 저택.

할머니 댁은 학교 다닐 때 국사책을 통해 간혹 보았던 19세기의 집과 그 생김새가 상당부분 흡사했다.

 

우와... 이런 전통 가옥을 실제로 보게 될 줄은...”

 

학교 다닐 때 책에서나 가끔씩 보던 전통 가옥의 풍경이 내 눈앞에 펼쳐져 있다.

 

우리 집이 그렇게 신기해?”

그럼요. 요즘 세상에 이런 전통가옥이 남아있는 동네는 별로 흔하지 않거든요.”

 

오빠와 신혼여행 갔을 때 봤던 전통가옥은 예외로 치자.

할머니 댁은 밖에서 보면 누가 보더라도 꽤 오래된 가옥이라고 생각하겠지만,

막상 안으로 들어와서 보니 내부는 요즘 주택들과 별반 다를 게 없어 보였다.

나와 치토세는 할머니 뒤를 따라 신발을 벗고 집 바닥으로 올라갔다.

 

레온, 넌 발 깨끗이 털고 들어와야지.”

놔둬라. 어차피 나가면 또 더러워질 텐데.”

 

우리는 할머니를 따라 복도를 지나 집 거실로 들어왔다.

방석도 있고, 탁자에 고타츠도 잘 씌워져있고. 어쩐지 내 상상이랑은 많이 다른데?

 

방석 깔고 편히 앉아있으렴. 그런데 내 입맛이 너희랑 맞으려나?”

너무 신경 쓰지 않으셔도 돼요.”

 

할머니는 우리를 거실에 앉혀놓은 뒤 건너편 부엌으로 가셨다.

 

할머니는 큰 쟁반에 생닭고기를 올린 뒤 레온 앞에 내려놓으셨다.

 

나비야, 맛있게 먹으려무나.”

 

대부분의 어르신들은 항상 고양이보고 -할머니는 레온이 고양이인 줄 아신다.- 나비라고들 부르신다.

왜 고양이보고 나비야 라고 하는 지는 아직도 그 이유를 모르겠다.

어쨌든 할머니가 탁자 앞에 앉으시자 좀 늦은 아침식사가 시작되었다.

대부분의 어르신들이 그렇겠지만, 탁자 위엔 콩 요리나 야채볶음 같은 요리들이 주를 이루고 있었다.

 

차린 건 별로 없지만, 많이들 먹어.”

아뇨. 이 정도면 황송할 노릇이죠. 잘 먹겠습니다.”

 

다른 사람들 눈엔 별 것 아닌 식탁으로 보일 수도 있겠지만,

적어도 내 눈엔 그렇게 보이지 않는다.

제 아무리 진수성찬이라도 먹는 사람을 생각하는 정성이 들어가 있지 않으면 그저 겉만 번지르르한 장식품에 지나지 않는다.

비록 소소한 식탁이긴 해도, 내 눈 앞에 있는 음식들 하나하나엔 나와 치토세를 생각하는 할머니의 정성이 담겨있음을 감지할 수 있다.

 

치토세는 뭐든지 잘 먹는구나?”

물론이죠. 새 나라의 착한 어린이는 편식을 하면 안 돼요. 뭐든지 잘 먹어야 키도 쑥쑥 크고 머리도 좋아진댔어요.”

어린 게 참 기특하기도 하지.”

 

치토세 얜 어느새 할머니랑 이렇게까지 친해진 걸까?

할머니도 치토세가 귀여우신 듯, 밝은 미소를 지으시며 활짝 웃으셨다.

 

아이 참, 할머니. 저도 이제 다 컸어요. 7살이면 어른이란 말이에요.”

허허허. 어쩜 이렇게 말 한마디, 한마디를 똑 부러지게 잘 하는지.”

 

할머니는 치토세의 머리를 살며시 쓰다듬어주셨다.

평소엔 오빠 말고 다른 사람이 자신의 머리를 쓰다듬는 것을 어린아이 취급하는 것 같다며 싫어하는 치토세지만, 이번만큼은 어쩐 일인지 할머니가 자신의 머리를 쓰다듬어주는 감촉을 즐겼다.

 

평소엔 아무 맛도 안 나던 밥이 이렇게 너희랑 같이 마주보고 앉아서 먹으니까 참 맛있구나.”

저희도 동감이에요.”

이젠... 이럴 수 있는 시간도 얼마 남지 않았겠지...”

 

? 갑자기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거지?

 

아이 참, 할머니. 즐거운 식사시간에 그렇게 불길한 말씀을 하시면 어떡해요?”

불길하긴 뭐가, 인석아.”

건강하게 오래오래 사셔야죠. 할머니는 아직도 젊은 사람 못지않게 정정하시니까 저희 치토세가 대학 가는 모습도 보실 수 있으실 거예요.”

허허허허허! 그럼. 난 아직도 팔팔해. 올해로 여든 아홉이다만 아직도 젊었을 때의 패기가 넘친다고. 당연히 치토세가 대학 가는 모습을 봐야지. , 그래야지.”

 

, 여든 아홉?! 이 정도 연세시면 내 증조할머니 쯤 되시겠다.

치토세한테는 고조할머니겠지?

그런데 연세를 아흔 가까이 잡수신 할머니치곤 빠진 이도 별로 없어 보이시고, 얼굴에 주름도 그다지 안 잡혀 보이신다.

처음 키요 할머니를 뵈었을 땐 예순 쯤 되시겠거니 생각했는데...

정말 엄청난 동안이시네?

 

정말 대단하세요. 할머니가 여든 아홉 살이나 잡수신 줄은 꿈에도 몰랐어요. 연세에 비하면 엄청 동안이시네요?”

그래? 거울 볼 땐 그렇게 안 보이던데. 너야말로 처녀들 못지않게 예뻐서 처음 봤을 땐 젊은 노처녀인 줄 알았어.”

아이, 쑥스럽게 참...”

 

잠시 후.

제 시간에 못 맞춘 게 흠이지만, 나름대로 활기찬 아침식사가 끝났다.

나와 치토세는 할머니를 도와 자리를 정리한 뒤 집을 나왔다.

할머니도 우리를 배웅하고자 현관 앞까지 따라 나오셨다.

 

할머니, 나중에 또 올 테니까 그때까지 안녕히 계세요.”

조심해서 들어가.”

할머니, 안녕히 계세요. 레온도 인사해. 안녕히 계세요.”

 

레온은 치토세의 지시를 듣고 제자리에 엎드려 할머니를 향해 고개를 숙였다.

 

그래, 나비야. 잘 가고 나중에 또 오너라.”

 

할머니는 엎드려 있는 레온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아 살며시 머리를 쓰다듬으셨다.

작별인사가 끝나고, 우리는 왔던 길을 다시 되짚어 가기 시작했다.

길을 가던 내가 무심코 뒤를 돌아보니, 할머니는 우리의 뒷모습을 향해 오른손을 흔들고 계셨다.

나와 치토세도 우리를 향해 손을 흔드시는 할머니를 보며 손을 흔들었다.

많이 기쁘셨던 모양이다.

30년간 혼자 식사하시면서. 혼자 생활하시면서. 혼자 쓸쓸한 분위기를 물씬 풍기는 동네를 걸으시며 얼마나 외로우셨을까.

오빠와 나, 치토세, 하다못해 레온의 나이까지 다 합쳐도 키요 할머니 한 분보다 어리다.

89년이라는 인생을 사시며 온갖 산전수전을 다 겪으셨겠지.

89년이라는 긴 인생을 사시며 온갖 아픔을 다 경험하셨겠지.

나는 상상조차 할 수 없을 만큼, 상처의 흉터들을 셀 수도 없이 많이 가지고 계시겠지.

그렇게 오랜 세월을 살아오시며 많은 아픔을 경험하셨을 게 분명한 할머니였지만,

적어도... 나와 치토세에게 식사를 대접하며 따듯하게 대해주신 할머니의 모습은 많은 상처를 가진 환자의 모습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 날 이후 나와 치토세는 매일아침마다 할머니 댁을 들러 함께 아침운동도 하고, 식사도 같이 하고, 여러 일상적인 대화를 주고받는 등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나도 다정한 할머니가 생긴 것 같아 기쁘고, 치토세도 키요 할머니가 좋다며 일어날 때마다 빨리 뵈러 가자고 보채기까지 했다.

아마 혼자 사시는 할머니도 우리와 같은 심정이시겠지?

 

그렇게 행복한 시간은 흐르고 흘러 일주일이 더 지난 어느 날 아침.

 

할머니가 드실만한 게 없나?”

 

나는 거실 소파에 앉아 요리책과 잡지책 등을 이리저리 넘겨보며 할머니가 좋아하실만한 요리를 찾고 있었다.

일단 나트륨이 높은 짠 음식은 제외. 그리고 육류 같은 질긴 것도 피해야 한다.

 

엄마, 뭐하세요?”

 

거실 한 편에서 레온과 놀던 치토세가 내게 다가와서 물었다.

 

키요 할머니께 뭔가 요리를 좀 해서 보내드리려고 하는데, 뭐가 좋을지 몰라서 고민하고 있지.”

... , 맞다. 전에 쿠로네코 아줌마가 그러셨는데요. 할머니께는 미음(米飮)이라는 게 제일 좋대요.”

미음? 죽 말이야?”

 

그 사람, 단순한 중2병 환자인 줄만 알았더니 은근히 괜찮은 지식도 많네.

하긴 그 말도 맞다. 대부분의 어르신들은 젊은 층에 비하면 소화력이 약해서 질긴 음식은 소화를 해내지 못한다.

미음은 보통 밥보다 부드러워 소화력이 약한 어르신들이 드셔도 위에 많은 부담을 주지 않는다. 그래서 예로부터 환자나 어린 아이들의 이유식으로 먹여왔다.

어쩐지 패배감이 좀 들긴 하지만 생각 자체는 좋으니까 미음으로 하자.

미음의 조리법은 대강 이렇다.

1시간 정도 불린 쌀을 믹서기에 넣고 물 100ml를 넣은 후 곱게 갈아준다.

물의 양은 불린 쌀 부피의 10배 정도면 적합.

그 후 냄비에 갈아 둔 쌀과 나머지 분량의 물을 다 넣고 밑이 눌지 않도록 신경 쓰며 저으며 끓인다.

 

1시간 후, 나는 미음을 선반에 옮겨 넣고 밖으로 새지 않게 단단히 닫은 뒤 위생봉지 안에 넣고 단단히 묶었다.

 

할머니 댁에 잘 찾아갈 수 있지?”

걱정 마세요! 저는 뭐든지 잘해요.”

 

나는 위생봉지 안에 넣은 미음 선반을 평소 치토세가 학교 갈 때 쓰는 가방에 넣었다.

 

그래, 할머니께 인사 잘하고 미음도 잘 전해드리렴.”

! 그럼 다녀오겠습니다!”

 

치토세는 가방을 매고 총총걸음으로 현관문을 넘어 나갔다.

나는 치토세가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현관 앞에서 지켜봤다.

혹여나 치토세가 할머니께 폐라도 끼치면 어쩌나 걱정이 좀 되긴 하지만...

그래도 치토세는 나보다 더 어른스러운 아이니까 알아서 잘하겠지.

 

 

시간은 급류처럼 흘러 어느 새 석양이 파란하늘을 노랗게 물들인 오후가 되었다.

시계를 보니 벌써 오후 5시다. 이미 올 시간이 지났는데... 어떻게 된 건지 키요 할머니 댁에 간 치토세가 집에 돌아오지 않는다.

혹시 무슨 일이라도 생겼나? 그럼 당장 할머니 댁에 전화를...

, 맞다. 아직 전화번호도 모르지.

 

얘가 어디서 뭐하고 있지? 제 시간에 딱딱 맞춰 들어오는 애가 이번엔 웬일이람?”

 

시간약속을 안 지키는 사람은 못난이라며 입버릇처럼 말하던 치토세건만, 참 별 일이다.

 

찾으러 가야겠지. 이럴 땐... 그래, 레온이 있으면 도움이 될 거야.”

 

물론 이럴 땐 애완견이 도움이 되겠지만,

우리 집엔 개 대신 표범이 있다.

표범이 개처럼 모든 냄새를 잘 맡는다는 말은 들어본 적이 없지만, 그래도 맹수니까 피 냄새라면 쉽게 찾을 수 있을 거다.

 

레온, 레온. 좀 일어나볼래?”

 

나는 거실 왼편에서 늘어져 자고 있는 레온을 흔들어 깨웠다.

 

크어어엉!!”

꺄악!”

 

내가 자신을 흔드는 것에 반응한 레온이 나를 향해 미간을 있는 대로 찌푸리며 제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자는 걸 방해해서 화가 났나?

 

, 자는 걸 방해해서 미안한데, 치토세가 제 시간이 되어도 집에 안 들어와서 말이야. 엄마랑 같이 찾으러 가자. ?”

크르르르...”

 

그저 치토세라면 껌뻑 죽는구나.

나와 레온은 그 길로 집을 나와 치토세를 찾기 시작했다.

항상 치토세 옆에 붙어있던 레온이라면 치토세의 피 냄새 정도는 금방 찾을 수 있겠지.

나는 레온에게 길 안내를 맡긴 채 그 뒤를 따랐다.

많은 골목길을 지나 주택들이 즐비한 민가를 넘고, 마을 내 중앙공원을 넘어서 계속 가니...

 

여긴...?”

 

어디긴 어디야. 키요 할머니가 사시는 동네지.

어쨌든 레온에게 길 안내를 맡기길 잘한 것 같다.

누가 애완동물 아니랄까봐 주인의 피 냄새를 금방 찾아내는구나.

 

수고했어, 레온. 여기서부턴 내가 알아서 할게.”

 

이 동네에서 치토세가 갈만한 곳은 할머니 댁 밖에 없지.

나와 레온은 곧장 할머니 댁으로 방향을 돌렸다.

할머니 댁에 도달하자, 레온이 현관 미닫이문을 향해 자세를 낮춘 뒤 으르렁거리기 시작했다.

예상대로 치토세는 여기 있는 게 분명하다.

 

할머니! 키요 할머니! 계세요? 할머니! 치토세! 안에 있니?”

 

초인종이 없으니 문을 두드려야겠네.

나는 현관의 미닫이문을 가볍게 두드리며 할머니를 불렀다.

하지만 몇 번을 두드리고 불러 봐도 안에선 아무 대답이 없었다.

 

이상하네? 아무도 없나? 레온이 치토세의 피 냄새를 모를 리가 없는데...”

크르르르...”

 

레온이 계속 할머니 댁의 현관문을 보며 으르렁거렸다.

레온의 이런 반응을 보아하니 치토세는 여기 있는 게 확실하다.

 

한 번 들어가 봐야겠어.”

 

주인허락 없이 하는 무단 침입이라도 이럴 때는 해도 된다.

일단 바로 앞에 있는 미닫이문부터 열어볼까?

이 동네가 아무리 조용한 동네라도 문단속쯤은 철저히 하시겠지...

 

드르르륵!

 

...라고 생각한 내가 바보였나?

잠겨있을 줄 알았던 문이 이렇게 허망하게 열려버릴 줄은.

어쨌든 나와 레온은 열린 문을 넘어 집안으로 진입했다.

집안에는 마치 아무도 없는 것처럼, 햇빛이 집 안을 노랗게 물들이며 황혼에 먹혀 사라져 가는데도 불구하고 형광등 하나 켜져 있지 않았다.

어째 오빠와 연애할 때 극장에서 종종 보던 공포영화 분위기가 난다.

안 그래도 무서운데, 내가 공포영화 주인공과 같은 일을 겪는 당사자가 됐다고 생각하니 더 무섭다.

나는 그렇게 잔뜩 긴장한 채 한 발짝 한 발짝 조심스럽게 떼며 거실로 향했다.

 

할머니?”

 

나는 벽에 몸을 바짝 붙인 채 거실 안쪽을 들여다보았다.

 

, 치토세?!”

 

찾았다. 역시 여기 있었다.

치토세는 방석을 베고 거실에 누워 곤히 자고 있었다.

그런 치토세 옆에 레온이 바짝 다가가 혓바닥으로 왼쪽 뺨을 핥았다.

곧이어 뺨을 핥는 감촉을 느낀 듯, 감겨 있던 치토세의 두 눈이 떠졌다.

 

~~ 잘 잤다. , 레온? 언제 왔어? 엄마도 오셨어요?”

 

치토세는 잠을 푹 잔 사람처럼 기지개를 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얘가 정말, 걱정하게 해놓고 기껏 한다는 말이 언제 왔어야?

 

이게 어떻게 된 거야? 할머니는 어디 계시고 너 혼자 있니?”

? 이상하다? 좀 전까진 분명 같이 계셨는데... 어디 가셨지?”

할머니 어디 계시는지 몰라?”

. 아까까진 여기 계셨는데... 갑자기 잠이 와서요.”

 

참 이상한 일이다.

어린애를 집에 혼자 두고 밖에 나가셨을 리는 없는데...

대체 어딜 가신 걸까?

 

후후훗...”

 

? 웃음소리? 집 안쪽에서 들렸다.

게다가 이 목소리의 주인은 키요 할머니다.

 

뭐야, 안에 계셨네. 그런데...”

 

왜 내가 밖에서 자신을 부르는데도 정중히 무시하고 안 나와 보신 걸까.

뭔가 있는 건가?

 

레온, 치토세 잘 지키고 있어. 엄만 잠깐 가볼 곳이 있거든. 치토세 너도 여기 꼼짝 말고 있어. 알았지?”

, 알았어요.”

 

나는 침을 꼴깍하고 삼킨 채 거실을 나와 할머니의 목소리가 들려온 곳으로 향했다.

자세히 보진 않았지만, 이 집은 겉으로만 봐도 그렇게 넓은 집은 아니다.

그런데 이렇게 긴장되고 무서울 땐 왜 이렇게 넓어 보이는 걸까?

인간은 공포에 질리면 공간지각능력이 제 기능을 발휘할 수 없을 만큼 수축된다던데... 이 좁은 집이 이렇게 넓게 보이는 건 내가 두려움에 떨고 있기 때문인가?

! 집안 좁은 복도를 조금 걷다보니 정면에 빛이 새어나오는 방이 눈에 띈다!

나는 빛이 새어나오는 쪽으로 한 발 한 발 조심스럽게 다가갔다.

 

정말 행복했다.”

 

방에서 할머니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확실히 이 방 안에 계시는 게 맞다.

 

이제 더는 기다릴 필요가 없겠지.”

 

기다려? 무엇을 기다린다는 걸까?

나는 빛이 새어나오는 문틈을 향해 방 안을 살짝 엿보기 시작했다.

침대 하나만 덩그러니 놓여있는 휑한 방에 키요 할머니와... 또 다른 한 사람이 침대에 누워 있는 모습이 보인다.

 

사야. 잠깐만 기다리려무나.”

 

사야? , 침대에 누워있는 사람 말이구나?

! 할머니가 문 앞으로 오신다. 빨리 도망치지 않으면...!

 

들어 오거라, 아야세.”

 

도망칠 틈도 없이 문이 열려버렸다.

그나저나 내가 밖에서 엿보고 있었다는 걸 할머니는 어떻게 아신 걸까?

나는 할머니가 문을 여시자 애써 태연한 표정을 지으며 방으로 들어갔다.

 

, 죄송해요. 할머니. 엿볼 생각은 아니었는데...”

미안해할 거 없어. 치토세가 집에 안 와서 걱정 많이 했지? 걔가 나랑 같이 놀다가 잠들었는데, 잠자는 모습이 어찌나 귀엽던지. 또 너무 깊게 잠들어서 깨우기가 좀 미안하더라고.”

 

뭔가 비밀스러운 장면을 들켜서 불쾌하실 텐데.

할머니의 얼굴표정은 의외로 온화해보였다.

 

그럼 전화라도 주시지... , 맞다. 저희 집 전화번호 모르시죠?”

혹여나 네가 안 데리러 오면 그냥 여기서 재우려고 했어.”

그런데, 뭐하고 계셨어요? 혹시 제가 방해한 거 아닌가요?”

방해는 무슨. 그냥 얘기 좀 하고 있었어. 내 증손녀 딸이랑. 그래, 이왕 이렇게 왔으니까 너한테도 소개해주마. 얜 사야다.”

. 안녕하세... ?!”

 

나는 침대에 누워 있는 사람을 향해 인사를 하려다 제자리에서 움찔했다.

 

허허허. 놀랄 만도 하지. 사야는... 오래 전에 잠들었어. 영원히.”

 

오래 전에 영원히 잠들었다는 그 말은...

죽은 사람에게 쓰는 표현이다.

나와 할머니는 침대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침대에 누워 있는 사야라는 사람의 몸은 두 눈을 꼭 감은 채 숨조차 쉬지 않고 있었다.

사야는 중학생 정도로 보이는 체구에, 요즘 중 ~ 고등학생들이 주로 하는 검은 단발머리를 하고 있었다.

사망한 지 꽤 오랜 시간이 지난 듯, 피부색이 약간 밝은 갈색을 띠고 있었다.

 

사야는 태어날 때부터 희귀한 불치병을 앓고 있었어. 17살도 되기 전에 죽게 된다 했던가. 그래서 자기 부모한테도 버려지고, 여러 친척집을 전전하고 배회하다가 마지막엔 내 집으로 왔지. 그렇게 언제 죽을지 모르는 할망구랑, 또 언제 죽을지 모르는 불치병 환자가 같이 서로를 의지하며 살게 된 거야.”

그랬군요.”

당장이라도 세상과 작별할 수 있는 시한부 생명인데도 불구하고, 어찌나 해맑고 순수하던지... 그때까지만 해도 남은 인생 자체를 무기력하게 보내던 나에게, 사야는 진정 활력소 같은 아이였어. 병 하나 때문에 그 많은 사람들한테 버림받았는데도... 사야의 얼굴에선 웃음이 단 한 번도 떠나간 적이 없었지. 짧은 시간이었지만, 사야랑 함께 사는 동안은 어찌나 행복했는지 모른단다. 89년이라는 그 긴 인생이... 사야랑 함께 산 1년에 비하면 너무 부질없고 허망하게 느껴지더구나.”

 

할머니는 이미 차가워질 대로 차가워져 있는 사야의 머리를 곱게 쓰다듬으셨다.

 

사야가 아침마다 날 깨울 때. 내가 아침마다 사야를 깨울 때. 사야는 일어날 때마다 항상, 환한 웃음을 짓고 나를 바라보며 안녕히 주무셨어요, 라고 인사를 해줬어. 그럴 때만큼은 이 세상을 내가 다 가진 것처럼 기분이 좋았었지... 사야가 이 침대에 누워서 임종을 맞이할 때... 이미 썩을 대로 썩은 내 목숨이라도 주고 싶었었는데... 그때만큼 마음속으로 부처님에게 제발 사야를 살려달라고 애원하고 또 애원했던 적이 없었던 것 같구나. 결국 부처님은 내 부탁을 들어주시지 않고 사야를 저 세상으로 데려가 버렸어... 하지만, 생명은 수레바퀴처럼 돌고 도는 것이다. 라고, 부처님이 그리 가르쳐주셨지. 그래서 언젠가... 사야가 생사세계를 돌고 돌다가 이전처럼 자길 깨우면 해맑은 미소를 지으며 다시 일어나 안녕히 주무셨어요, 라고 내게 인사해주지 않을까. 하는 믿음을 가지게 되었지.”

 

불교에는 윤회전생(輪廻轉生)이란 말이 있다.

수레바퀴가 끊임없이 구르는 것처럼, 인간이 번뇌와 과거의 업보에 의하여 삼계육도(三界六道). 3가지 세상과 6가지 덕목의 생사세계를 그치지 않고 돌고 도는 것이라고.

한 생명이 죽으면 또 다른 생명이 새로 태어나고, 그 생명이 또 죽으면 그와 다른 생명이 새로 태어나기를 영원히 반복한다는 뜻이다.

 

너와 치토세를 보니까... 생전에 살아 있을 때의 사야 생각이 진하게 묻어나오더구나. 저 세상에 있어야 할 사야가 다시 멀쩡히 살아 돌아온 것 같았어.”

할머니는... 기다리고 계셨던 거군요. 언젠가, 손녀가 다시 자리에서 기지개를 켜고 일어나며 자신에게 아침 인사를 해주는 그 날을...”

그래, 내가 언젠가 이런 말을 했었지? 아무런 꿈도 희망도 남아 있지 않은데도, 이 동네에 사는 모든 영감 할망구들은 기다리고 있다고. 두 번 다시 돌아올 리 없는 자식들... 헤어져서 두 번 다시 돌아올 리 없는 연인... 그들이 언젠가 한 번은... 다시 한 번 자신을 만나러 와줄 거라는 헛된 희망을 품고 말이다. 그 말대로 나도 기다리고 있었던 거다. 두 번 다시 돌아올 리 없는 소중한 손녀딸이... 다시 내게로 돌아오는 그 날을... 헛된 희망을 품고...”

 

할머니의 얼굴표정에서 씁쓸함이 묻어나왔다.

이럴 땐... 어떻게 위로를 해드려야 할까?

 

할머니. 세상에는... 간절히 바라고 기원해서 이뤄지지 못할 일은 아무 것도 없어요. 할머니가 사야를 생각하는 그 마음을 부처님도 잘 아실 거예요. 그래서 할머니와 저희를 이렇게 만나게 해주신 건 아닐까요? 이 인연을... 소중히 하라고 하시면서요.”

부처님... 내가 그렇게 믿고 또 믿고 받들어 모시던 부처님은... 정말 냉정하신 분이었어. 이젠... 사야가 다시 일어나기를 기다리는 일 조차... 못할 것 같구나.”

아니에요. 그렇지 않아요. 사야는 이제 없지만, 그 대신 저희가 있잖아요. 저희가 사야 몫까지 할머니를...”

크윽!! 콜록콜록!”

 

할머니가 마치 사례 들린 사람처럼 손으로 입을 막고 기침을 하셨다.

입을 막고 있는 손가락 사이에서 혈흔이 새어나왔다.

 

, 할머니! 갑자기 왜 그러세요? 어디 편찮으신 거예요? 할머니!”

 

나는 쓰러지는 할머니를 재빨리 부축했다.

 

어디 편찮긴... 뭐가? 내가 누누이 말했잖느냐... ... 죽을 날만 기다리는 할망구라고... 죽을 때가 된 게야...”

아니에요, 그렇지 않아요! 희망을 버리시면 안 돼요. 사실 수 있어요! 제발 힘내세요! 이렇게 돌아가시면 안 돼요!”

크으윽... 허허허허... 사야가 보이는 구나... 나보고 함께 가자고... 손을 흔들고 있어...”

불길한 말씀 좀 그만하세요! 할머니는 아직 정정하시잖아요! 건강하시잖아요! 치토세가 대학 가는 모습을 꼭 보고 싶다고 하셨잖아요!!”

 

나는 힘없이 축 쳐진 할머니의 오른손을 꼭 쥐어 잡았다.

 

세상일은 말이야... 간절히 바라고 기원한다고 해서... 다 이뤄지는 건... 아니야... 이렇게 헛된 희망만 남을 뿐이지... 허허허... 너와... 그리고 치토세한테는... 미안하게 됐구나. 그 어린 것이 내 이런 모습을 보면... 충격이 클 텐데 말이야...”

아니에요, 걱정 마세요. 치토세는 강한 아이에요. 겨우 이 정도로 슬픔에 빠지는 아이는 아니에요. 할머니도 강하시잖아요! 아무도 지켜봐주지 않아도, 아무도 관심 가져주지 않아도 사야와 함께 꿋꿋하게 사셨잖아요! 사실 수 있어요. 그러니까 제발 포기하지 마세요! 할머니!”

 

할머니를 부축하고 있는 내 양팔에 미약하게나마 전해져오고 있던 심장의 고동이 멈췄다.

할머니의 양쪽 눈이 굳게 감겨져있다.

 

“...할머니?”

 

아무런 대답도 돌아오지 않는다.

더 이상 호흡의 감촉도 느껴지지 않는다.

 

엄마.”

치토세?”

 

거실에 있어야 할 치토세가 왜 내 옆에 있는 걸까?

하긴, 그런 게 당연하지. 내 목소리가 크긴 컸던 모양이다.

 

할머니. 여기 계셨어요? 할머니, 할머니. 일어나보세요, 할머니.”

 

치토세가 할머니를 흔들어 깨웠다.

절대로 반응하실 리가 없는데.

치토세한테는 말하지 않는 게 좋겠지.

 

치토세... 그만해. 할머니 주무시잖아. 주무시는데 깨우면 화 많이 내실 거야...”

, 알았어요. 할머니, 안녕히 주무세요.”

 

치토세는 영원히 잠든 할머니를 향해 정중히 고개 숙여 인사했다.

 

할머니. 만나셨나요? 하나 뿐인 소중한 손녀를요.”

 

내가 방을 살짝 엿보면서 우연히 들었던... 할머니가 하신 그 말씀.

이젠 더는 기다릴 필요가 없겠지.

사야, 조금만 기다리려무나.

할머니는 자신이 아무리 기다리고 또 기다려도, 사야는 두 번 다시 돌아오지 않을 거란 사실을 이미 알고 계셨다.

그리고 자신의 운명도 알고 계셨던 거겠지.

나는 할머니를 제자리에 눕혀드리고 사야의 얼굴 위에 몸까지 덮여있던 이불을 살며시 덮었다.

 

키요 할머니는 그렇게...

내가 옆에서 지켜보는 가운데 조용히... 자신의 하나 뿐인 소중한 증손녀 딸과 함께...

두 번 다시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너가셨다.

 

 

그 날 이후, 일주일이 지난 어느 날의 아침.

 

딩동!

 

누군가 조용한 우리 집의 초인종을 누르며 나를 찾기 시작했다.

 

, 나가요.”

 

거실 소파에 멍하니 앉아 있던 나는 초인종 소리를 듣고 곧장 현관문 앞으로 가서 문을 열었다.

 

누구세요?”

코우사카 부인이십니까?”

 

문 앞에 짧은 스포츠머리에 훤칠한 키, 구겨짐 하나 없이 말끔한 검은 양복차림을 한 남자가 서 있었다.

 

, 그런데요?”

키요 할머니의 유언장을 전달하러 왔습니다.”

? 키요 할머니의 유언장? 그게 무슨... 일단 들어오세요.”

 

유언장을 전달하러 왔다? 그게 무슨 말일까?

나는 남성을 거실로 이끌었다.

 

앉으세요.”

.”

유언장이라니... 할머니께서 유언장을 남겨놓으셨나요?”

그렇습니다.”

하지만 그런 건 직계가족한테 전달해야 하는 거 아닌가요? 왜 아무 상관도 없는 저한테...”

일단 읽어보시면 압니다.”

 

남성이 품에서 편지봉투를 꺼내 내 앞에 내밀었다.

나는 봉투를 열고 할머니가 남기셨다는 유언장을 꺼내보았다.

 

 

아야세. 이 편지가 너한테 전달될 때쯤이면, 난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겠지.

일단, 이 편지를 보더라도 너무 흥분들 하지는 말거라.

별 건 아니지만, 너와 치토세한테 자그마한 선물이라도 하나 해주고 싶어서 이렇게 편지를 썼단다.

너와 치토세는 내게 진정으로 가족이었어.

너희를 만난 건 부처님이 나를 저세상으로 데려가기 전에 마지막으로 내려주신 자비였던 지도 몰라.

내가 너희들의 할머니였고, 너희가 내 손주들이었던 것처럼...

다음 세상엔 꼭 내가 너희들의 손주로 태어나고 싶구나.

생명은 수레바퀴처럼 돌고 도는 거니까 말이다.

30년간 바느질과 품팔이를 해서 모은 얼마 안 되는 돈을 모두 너와 치토세에게 맡기겠다.

, 행복해야 한다. 저 세상에 가서도 너희의 행복과 무운을 빌고 있으마.

잘 있거라. 안녕.

 

 

할머니의 유언장이 확실했다.

나와... 치토세한테 남기신 유언장이 확실했다.

감정이 북받쳐 올라오기 시작한다. 양쪽 눈시울이 뜨거워진다.

대체 어느 새... 이런 걸 다 쓰신 걸까?

 

할머니... 왜 저 같은 사람한테... 아까운 유산을...”

할머니께서 돌아가시고 집안 정리를 하다 정확히 이틀 후에 발견한 유언장입니다. 아야세 씨와 그 딸인 치토세 양에게 30년 동안 모아오신 100만 엔(한 화 약 1,182만원)을 상속하라고 하셨죠. 어쨌든, 이렇게 슬픈 일을 경험하게 만들어 정말 죄송합니다.”

?”

 

남성이 내 앞에 대고 고개 숙여 사죄의 뜻을 표했다.

아니, 나한테 무슨 잘못을 했다고...

 

사실 전, 할머니의 손자 되는 사람입니다. 지금은 홋카이도에서 살고 있죠. 너무 바쁜 일상 때문에 할머니의 존재를 완전히 잊으며 살고 있었는데... 어느 날, 갑자기 할머니의 임종소식을 듣고 하던 일도 팽개치고 급히 고향으로 달려왔습니다. 그리고 할머니의 유해를 거둬주신 분이 있다는 말을 듣고 수소문하다가 이렇게 찾아오게 된 겁니다.”

그랬군요.”

정말 감사합니다. 이런 불효막심한 손자 놈 대신 할머니의 임종을 지켜봐주셔서 정말 감사드립니다.”

 

남성은 자리에서 일어나 내 앞에서 무릎 꿇고 절했다.

나는 허겁지겁 눈을 적시던 눈물을 닦고 남성을 만류했다.

 

, 이러지 마세요! 제가 뭘 잘했다고... 그리고 당신은 아무 잘못도 없어요!”

잘못이 없긴요. 세상에 단 한 분뿐인 친할머니의 임종을 지켜보지 못했다는 잘못이 있지 않습니까? 그런 불효막심한 손자 대신 할머니의 임종을 지켜봐주신 분 앞에서 제가 어떻게 당당히 고개를 들고 서 있을 수가 있겠습니까? 절 받으세요. 감사드립니다.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내 앞에서 절하는 이 남자의 의지를 막을 수 있었다면 진작 막을 수 있었겠지만...

남성의 의지는 그만큼 굳건했다.

진심을 다해 자신의 죄를 사죄하겠다고 하니, 더 이상 만류하면 오히려 내가 나쁜 사람이 되겠지.

 

그 날 정오. 나는 치토세와 함께 할머니의 무덤에 가기로 했다.

키요 할머니의 집은 할머니가 돌아가시고 난 후 완전히 철거되었다.

그 대신, 할머니와 손녀 딸 사야가 함께 묻힌 작은 무덤하나가, 없어진 집의 자리를 대신하게 되었다.

마을 한복판에 있는 무덤인데도 불구하고 다른 주택들과 전혀 위화감이 들지 않는다.

 

할머니, 저예요. 치토세도 같이 할머니를 뵈러 왔어요.”

 

치토세와 레온은 아무 말 없이 할머니의 무덤 앞에 대고 고개를 숙였다.

 

하늘나라에서 소중한 손녀딸과 다시 만나셨겠죠? 분명 그럴 거예요. 부처님도 할머니가 사야를 생각하는 마음이 얼마나 간절한지 잘 알고 계실 테니까요. 할머니가 말씀하셨던 것처럼, 저와 치토세가 할머니와 사야 몫까지 열심히 살게요. 그러니까 아무 걱정 마세요. 생전에 짊어지고 계셨던 모든 무거운 짐들을 다 내려놓으시고 사야와 함께 행복하시길 빌게요. 비록 짧았지만... 할머니와 보냈던 시간들은 정말 행복했어요. 할머니가 저희에게 해주신 모든 소중한 말씀들 한 마디 한 마디, 마음속에 깊이 새기며 열심히 살게요. 그러니까, 하늘나라에서도 계속 저희를 지켜봐주셔야 해요?”

 

나는 무덤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아 양손을 모아 합장을 하며 할머니와 사야의 명복을 빌었다.

치토세도 나를 따라 무릎을 꿇고 앉아 합장을 했다.

 

나도 언젠가, 치토세도 언젠가... 키요 할머니처럼 세상과 작별을 해야 할 그 날을 반드시 맞이하게 된다.

세상 모든 생물들은 언젠가 죽음을 맞이한다.

시간을 보내면 보낼수록 죽음이라는 문턱과 점점 가까워진다.

하지만, 후회 없는 삶을 살아왔다면 죽음이라는 문턱에 가까워지더라도 무서울 건 없겠지.

키요 할머니는 눈을 감으시는 그 순간에도 밝은 표정을 짓고 계셨다.

죽는 순간에도 밝은 표정을 짓고 있었다는 건, 그 사람이 후회 없는 삶을 살았다는 증거다.

나는 오빠와 결혼한 걸 후회하지 않는다.

나는 치토세와 만난 걸 후회하지 않는다.

나는 여태껏 내가 보낸 삶과, 이제부터 보내야 할 삶들도 후회되지 않는다.

나라고 하는 이 한 사람을 옆에서 지켜봐주고 응원해주는 사람들이 있다면... 나도 언젠가 임종을 맞이하는 그 날, 웃으면서 떠날 수 있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