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im:Øriginal

포터블 후일담 창작 단편 13. 30분의 피날레 본문

comics-novels/내여귀

포터블 후일담 창작 단편 13. 30분의 피날레

히아신스v 2024. 1. 20. 13:33

이번 팬픽은 이전 화들과 마찬가지로, 가장 쿄스케가 출장으로 한 달 간 집을 비운 사이에 있었던 에피소드를 다룬 팬픽입니다. 시점은 아야세의 시점으로 진행되다가 막바지에 이르러 쿄스케의 시점으로 바뀝니다.

원작과 비교해 다른 설정이 나오거나 조금 어색하더라도 팬픽이니까 그러려니 하고 재미있게 읽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햇살이 눈구름을 뚫으며 땅에 쌓인 눈덩이들을 비추고 있는 어느 날.

나와 치토세는 따스한 햇살이 비치는 때를 이용해 밀린 빨래를 하고 있었다.

 

레온, 이 이불 좀 엄마아빠 방으로 옮겨줘.”

 

치토세가 안방 이불을 제자리에 개어 레온에게 건넸다.

그러자 레온은 입으로 이불을 물어 안방으로 향했다.

레온이 우리 집에 온 이후로 항상 보는 모습이긴 하지만, 볼 때마다 정말 대단하게 느껴진다.

 

저렇게 무거운 걸 쉽게 들다니. 역시 표범은 표범인가?”

 

표범은 턱 힘이 강하다는 걸 어디선가 들은 것도 같다.

그것도 맞는 말이다. 항상 나무 위에서 끼니를 해결하니까, 사냥감을 나무 위로 옮기려면 턱 힘이 강해야하겠지.

레온은 치토세 옆에 항상 바짝 붙어 다닌다.

밥 먹을 때나, 놀 때나, 낮잠 잘 때나, 아침 산책할 때나, 치토세가 공부할 때나.

가끔씩 내가 치토세에게 심부름을 시킬 때 빼곤 도통 떨어지는 걸 본 적이 없다.

그만큼 서로를 향한 애정이 굳건하다는 거겠지?

레온은 금세 이불을 방으로 옮겨놓고 다시 베란다로 돌아왔다.

 

, 레온. 이것도 부탁해. 이건 치토세 거야.”

 

나는 치토세 방의 이불을 개어 레온에게 건넸다.

 

크어어엉!!”

꺄악!”

 

레온은 내가 자신의 눈앞에 이불을 내밀자 불만이라도 생긴 듯, 나를 향해 잔뜩 인상을 찌푸리고 이빨을 드러내며 으르렁거렸다.

나는 뭐 이런 간단한 부탁도 하지 말라는 거니?

 

레온! 엄마께 그러면 안 된다고 몇 번을 말해. 때찌!”

 

치토세가 레온의 머리에 딱밤을 때렸다.

그러자 레온은 언제 그랬냐는 듯 이빨을 집어넣고 이불을 물어 치토세의 방으로 향했다.

치토세한테 완전히 복종한다면, 전에도 이와 비슷한 일로 몇 번 혼났으니까 안 짖을 텐데.

이 녀석 설마 이렇게 혼나는 걸 즐기고 있는 건 아니겠지?

, 정말 복잡하고 또 복잡하다. 다른 사람의 마음도 잘 모르는데 동물의 마음을 어찌 알랴.

 

엄마, 죄송해요. 원래 착한 애인데, 왜 엄마한테만 그러는 지 모르겠어요.”

네가 사과할 건 없어. 그냥 엄마가 자기 마음에 안 들어서 그러는 거겠지 뭐. 그래도 물거나 덮치지는 않으니까 괜찮아.”

앞으로 그러지 말라고 주의를 더 줘야겠어요.”

괜찮대도. 그냥 놔두렴.”

 

적어도 밥 줄 때만큼은 얌전하니까 그만하면 감지덕지한 거지.

사실 지금도 혹여나 레온이 나를 뒤에서 갑자기 덮치거나 물지는 않을까 조금 불안하기는 하다.

 

♩♬♪~

? 누구지?”

 

휴대전화 벨소리가 들린다.

나는 곧장 들고 있던 옷가지들을 빨랫줄에 다시 걸어놓고 치마주머니에 넣어놨던 휴대전화를 꺼냈다.

 

엄마, 누구에요? 혹시 아빠면 저도 바꿔주셔야 해요?”

그래, 알았어. 어디보자.”

 

송신자를 확인하자.

? 키리노? 키리노의 전화다.

얘가 계절이 바뀌는 동안 연락 한 번 안 주더니 갑자기 웬일일까?

나는 폴더를 열고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키리노니?”

, 나야! 그동안 잘 있었지? 미안해. 패션쇼 출품 의상 때문에 너무 바빠서 도저히 전화할 틈이 없더라고.”

 

키리노는 모델을 은퇴하고 패션디자이너로 자리를 옮겼다.

그래서 나와 오빠도 가끔씩 키리노가 일하는 회사의 제품. 예를 들면 넥타이나 블라우스 같은 걸 선물 받기도 한다.

회사에 대해선 별로 들은 얘기가 없어 자세히는 모르지만, 키리노가 디자이너로 일하고 있는 회사는 전 세계적으로 유명한 브랜드 중 하나라고 한 것 같다.

 

바쁘니까 별 수 없지. 어쨌든 우리 잘 있었어. 너도 목소리를 듣자하니 건강한 것 같은데?”

나야 언제나 날고뛰고 팔팔하잖아? 오빠랑 치이는 잘 있어?”

치토세는 너무 건강해서 탈이야. 그리고 오빠는 지방출장 가서 지금은 집에 없어.”

“...?!”

 

키리노가 소스라치게 놀라며 외쳤다.

그나저나 목청 한 번 되게 크다. 고막에 바람구멍 나는 줄 알았네.

 

, 왜 그렇게 놀라고 그래?”

왜긴! 이번에 휴가 나가서 오랜만에 오빠하고 치이랑 같이 게임이나 실컷 하려고 했는데 집에 없다니. , 이러면 그 긴 휴가 기간 동안 뭘 해야 하나?”

 

바쁘게 산다는 애가 게임할 시간도 있나보구나.

 

뭐하긴. 어머님 아버님께 문안인사도 올리고, 오랫동안 못 만난 친구들도 만나고 할 일은 많잖아.”

역시 아야세는 예나 지금이나 바른 생활 소녀라니까. 어쨌든, 오빠도 없다고 하고, 다른 친구들도 다 바빠서 못 만난다니까 이번엔 치이랑 팍팍 놀아줘야겠다.”

벌써 전화 다 해봤구나? 그런데 지금 우리 집에 말이지...”

? 집에 무슨 일 있어?”

, 아니. 아무 것도 아니야. 와서 편히 있다 가라고.”

고마워. 아마 내일 아침이면 너희 집에 도착할 거야. 그럼 그때 보자.”

, 내일 봐.”

 

나와 키리노는 동시에 전화를 끊었다.

전화가 끊김과 동시에 레온도 베란다로 돌아왔다.

전화하면서 집에 표범이 있다고 얘기할까, 말까 망설였지만... 어차피 직접 보기 전까지는 안 믿을 게 불 보듯 뻔하니 관두자.

오빠는 전화로 내가 얘기를 해서 레온을 알지만, 키리노는 아직 레온의 존재를 모르고 있다.

 

엄마, 키리노 고모에요?”

, 고모가 내일 집에 오셔서 치토세랑 같이 놀아주신대.”

우와! 정말요? 그럼 고모께 레온을 소개시켜드려야지!”

저기 치토세. 사실 지금부터 그 얘기를 하려고 했는데, 레온은 고모한테 안 보여드리는 게 낫지 않을까?”

 

오랜만에 놀러 오는 애한테 괜히 공포감을 심어줄 순 없지.

제아무리 겁 없고 강심장인 키리노라도 표범을 바로 눈앞에서 보면 평정심을 유지하기 어려울 거다.

 

아니에요, 엄마. 괜찮아요. 레온은 아주 착한 애에요. 그렇지? 너도 키리노 고모랑 빨리 만나고 싶지?”

크르르르.”

 

레온은 마치 치토세의 질문에 대답하는 것처럼 고개를 위아래로 끄덕였다.

 

물지나 않으면 천만다행이게? 아무리 키리노라도 레온을 보면... 꺄악!!”

크어어엉!!”

 

내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레온이 날 향해 이빨을 드러내며 큰 소리로 짖었다.

설마 자기 흉본다는 걸 알아듣고?

 

엄마가 계속 그러시니까 레온이 화났잖아요. 너무 걱정 마세요. 레온은 안 그럴 거예요. 그렇지?”

크르르르.”

 

레온은 치토세가 미소를 짓고 자신을 바라보자 언제 표정을 찡그렸냐는 듯 금세 찡그린 얼굴표정을 펴고 드러내고 있던 이빨을 쏙 집어넣었다.

내 앞에선 표범인 녀석이 치토세 앞에선 고양이, 아니 새끼고양이가 되어버린다.

전생에 나랑 무슨 악연이라도 있었나?

언제나 보는 풍경이긴 하지만 치토세는 정말 묘한 아이다.

레온의 속마음이 어떤지 어떻게 아냐고 물어보면 항상 레온이 그렇게 말했다고만 한다.

처음에는 치토세가 그냥 생각 없이 아무 말이나 내뱉는다고 생각했었지만, 시일을 두고 지켜보니 그렇진 않았다.

레온의 행동거지에 대한 치토세의 뜻풀이는 마치 짜고 치는 화투처럼 100% 일치했다.

혹시 직계 친척이나 조상님 중 누군가한테 동물의 마음을 읽는 능력을 격세유전(隔世遺傳)이라도 받은 걸까 하고 잠깐 의심도 해봤지만, 오빠 쪽의 친척들과 우리 집의 친척들 전부 다 싸잡아놓고 곰곰이 생각해봐도 결론은 마찬가지. 족보를 뒤지고 또 뒤져봐도 동물의 마음을 읽을 수 있는 조상님이 계셨다는 기록은 남아 있지도 않다.

최종적으로 내가 내린 결론은, 치토세는 태어날 때부터 그런 특별한 능력을 타고 났다는 거다.

 

아이, 레온! 간지러워, 그만! 정말 못 말린다니까?”

 

레온은 치토세의 뺨을 혓바닥으로 핥으며 애정표현을 했다.

치토세도 그런 레온의 애정표현에 응하여 머리를 살며시 쓰다듬어 주었다.

 

얘들아, 거기까지 하고 빨래나 마저 걷자. 이제 곧 식사할 시간이잖니.”

알았어요. 레온, 이제 안 도와줘도 되니까 거실에 내려가 있어. 알았지?”

 

레온은 치토세의 지시를 듣고 베란다를 나가 아래층을 향해 계단을 내려갔다.

나나 치토세가 하는 말도 곧잘 알아듣고, 말만 못하지 이 정도면 완전 사람이나 다름없다.

 

, 이만하면 됐다. 이제 내려가서 밥 먹자.”

.”

 

나와 치토세는 걷은 옷가지들을 빨래 바구니에 넣은 뒤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우리는 점심식사 후 거실 소파에 앉아 여유롭게 차를 음미했다.

 

역시 밥 먹고 난 뒤에 마시는 녹차는 정말 좋은 것 같아요.”

그럼, 물론이지.”

 

식 후 차를 마시는 풍습은 저 큰 대륙, 중국에서 건너온 풍습이다.

중국에는 항상 식사 후 차를 마시는 풍습 덕분에 비만체형을 가진 사람이나 성인병을 앓는 사람이 극히 드물다고 한다.

차에 들어있는 알칼리성 물질이 식사로 인해 생긴 몸의 산성 물질을 중화해준다나.

그래서 살이 찌지 않고 그대로 유지되거나 심지어는 빠지기까지도 한다고.

 

레온도 차 한 번 마셔볼래?”

표범이 무슨 차를 마시겠니.”

? 마시고 싶어? 알았어. 조금만 기다려.”

아니 치토세, 뭐하려고?”

 

치토세는 내 말을 정중히 무시한 채 총총걸음으로 부엌에 갔다.

그리고는 차를 담은 납작한 그릇을 가지고 나와 레온 앞에 내밀었다.

 

한 번 마셔봐. 몸에 좋은 거야.”

크르르르.”

 

레온은 망설임 하나 없이 혓바닥을 내밀어 차를 마시기 시작했다.

동물이 짓는 표정은 인간처럼 노골적으로 드러나지 않아서 붙잡아놓고 연구하지 않으면 제대로 알기 어려운데, 차를 마시고 있는 레온의 표정은 나라도 알아볼 수 있을 만큼 기분이 좋아보였다.

 

어때? 맛있지?”

 

레온은 치토세의 질문에 차를 마시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너 진짜 레온이랑 마음이 통하나보구나?”

그럼요. 저는 뭐든 지 잘하니까요.”

이런 건 못해도 되는데. 후훗...”

 

내 딸이지만 못하는 게 하나도 없으니 참 자랑스럽다.

 

♪♬♩~

 

주머니에 넣어놨던 휴대전화의 벨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양손으로 들고 있던 찻잔을 내려놓고 송신자를 확인했다.

 

, 오빠?”

 

나는 반가운 마음을 애써 숨기고 폴더를 열고 전화를 받았다.

전화한 사람이 오빠인 걸 알면 파더콤인 치토세가 바꿔달라고 옆에서 난리법석을 떨 테니 말이다.

 

여보세요? 아야세?”

, 저예요. 지금 전화해도 돼요?”

물론. 요즘 전화 안 해서 많이 섭섭했지? 미안해. 일이 좀 바빠서 말이야. 이제 얼마 안 있으면 집에 갈 테니까, 돌아가면 여태껏 못했던 데이트나 실컷 할까?”

전화에 대고 그렇게 부끄러운 말을 하면 저도 부끄러운 말을 하고 싶어지잖아요.”

난 부끄럼 타는 아야세도 좋아하는데? 크큭.”

 

목소리를 듣자하니 건강하게 들린다.

별 탈 없이 돌아와 줬으면 정말 좋겠다.

 

엄마, 아빠 전화에요? ? 맞죠? 바꿔주세요, 아빠랑 통화하고 싶어요!”

 

안 들키게 하려고 했는데 대화내용 때문에 들켜버렸다.

정말이지, 치토세는 다른 사람 전화는 몰라도 오빠가 걸어오는 전화만큼은 귀신 같이 눈치 챈다.

 

잠깐만, 좀 있다 바꿔줄게. ? 아니에요. 치토세가 바꿔달라고 해서요.”

엄마, 바꿔주세요. 저도 아빠랑 통화하고 싶어요! ?”

그래그래, 엄마가 졌다. .”

 

나는 못이기는 척 치토세에게 휴대전화를 건넸다.

그러자 치토세는 마치 물건을 빼앗듯이 휴대전화를 가져가며 오빠와 통화를 시작했다.

 

여보세요? 아빠, 저예요. 그럼요! 제가 누구에요? 아빠 딸이잖아요. 괜찮아요. 기다릴 수 있어요.”

 

오빠랑 통화하는 치토세의 표정은 그야말로 이 세상을 다 가진 사람의 기쁜 표정이었다.

나와 단 둘이 있을 땐 말할 것도 없고, 레온이랑 놀 때도 이 세상을 다 가진 사람의 기쁜 표정을 짓는 일은 결코 없었는데... 그렇게 아빠가 좋니?

 

! ! 아빠 돌아오시면 환영 뽀뽀 해드릴게요! 엄마요? , 알았어요. 엄마.”

 

치토세가 내 앞으로 휴대전화를 내밀었다.

그런데, 이 세상을 다 가진 사람의 기쁜 표정은 어디 가고 왜 다시 무표정을 짓는 거니?

설마 전화 바꿔주는 것 때문에?

 

여보세요? 오빠?”

, 아야세. 치토세도 건강하게 잘 있는 것 같으니까 별로 걱정할 필요는 없겠네. 어쨌든 앞으론 이렇게 멀리 타지로 갈 일도 별로 없을 거야. 있어봤자 하루 이틀일 거고. 그동안 외롭게 만들어서 미안하다.”

별 문제되지도 않는 것 가지고 왜 사과를 하고 그러세요? 치토세도 있고, 레온도 있으니까 그렇게 외롭진 않아요. 어쨌든 남은 기간 동안 몸 성히 잘 있다 오세요.”

~! 아야세가 해주는 밥을 못 먹은 지 너무 오래돼서 그런가, 뱃속에서 위가 자꾸 아야세가 해주는 밥을 달라고 난리야.”

돌아오면 실컷 해드릴 테니까 조금만 참으세요.”

최대한 열심히 참아볼게. ? 벌써 근무시간 다 됐네? 이제 일하러 가야겠다. 나중에 돌아갈 때 보자. 아야세, 사랑해.”

저도 사랑해요, 오빠.”

 

나와 오빠는 동시에 전화를 끊었다.

오빠한테서 사랑한다는 말을 듣는 게 얼마만인지 모르겠다.

별 것 아닌 일 가지고 이렇게까지 기쁘다니. 역시 오빠랑 결혼하길 잘했다.

 

엄마, 얼굴 빨개지셨어요.”

어머, 그래? 빨개질 만 했으니까 그렇겠지. 너도 결혼하면 알게 돼.”

제 얼굴은 안 빨개요? 저는 엄마보다 훨씬 더~ 하늘만큼 땅만큼 아빠를 사랑하는데.”

절대 빨개질 리가 없지요, 공주님. 머리에 얹혀있는 피부터 먼저 말리세요. 아셨죠?”

아이, 엄마! 제 머리 어디에 피가 묻어있다고 그러세요? 아무리 봐도 깨끗하잖아요.”

 

치토세가 날 바라보며 양쪽 뺨을 부풀렸다.

가끔은 얄미울 때도 있는 치토세지만 이럴 땐 정말 귀엽고, 또 사랑스럽다.

그나저나, 내일 키리노가 우리 집에 온다고 했었지 참.

 

 

하루가 지나가고 다음날 아침. 키리노가 집에 오기로 한 날.

나와 치토세는 거실에 앉아 키리노가 오길 기다리고 있었다.

 

딩동~!

 

손님이 찾아왔음을 알리는 초인종 소리가 울렸다.

 

제가 나가볼게요!”

 

소파에 멍한 표정을 지은 채 앉아있던 치토세는 초인종 소리가 들리자마자 쏜살같이 현관문 앞으로 뛰어갔다.

곧이어 현관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치이! 그동안 잘 있었... 꺄아아악!!!”

크어어엉!!”

 

키리노의 짧고 날카로운 외마디 비명과 레온의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 키리노! 괜찮아?”

 

키리노의 비명소리를 듣고 현관문 앞에 달려가 보니, 키리노는 제 자리에 그대로 털썩 주저앉아 치토세를 껴안고 레온과 평행선으로 대치하며 벌벌 떨고 있었다.

 

, 아야세? 이게 어떻게 된 거야? 이런 일반 가정집에 어떻게 표범이...!”

미안해. 원래는 네가 많이 놀랄까봐 얘기 안 하려고 했는데, 치토세가 너한테 꼭 소개시켜주고 싶다고 해서.”

, 치이가?”

 

키리노는 눈을 휘둥그레 뜨며 껴안고 있는 치토세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 고모. 얘 이름은 레온이에요. 우리 집 애완동물이에요.”

, 애완동물? 이 표범이?”

크어어어엉!!”

 

계속 짖어대는 걸 보니 레온은 키리노가 별로 반갑지 않은 것 같다.

늘 얼굴보고 사는 나도 마음에 안 든다고 짖어대는데 키리노라고 오죽하랴.

 

레온! 고모께 그러면 안 돼!”

, 치이... 그런다고 표범이 말을... 어라?”

 

하지만 그런 레온을 유일하게 무릎 꿇릴 수 있는 존재가 있다.

바로 치토세다.

레온은 치토세의 말을 듣자마자 곧장 드러내고 있던 이빨과 발톱을 집어넣었다.

 

우와... 치이 대단하다? 어떻게 말 한마디로 표범을 구슬릴 수가 있지?”

그런 게 아니에요, 고모. 레온이 얼마나 착한 애인데요. 고모가 처음 보는 사람이라서 경계한 것뿐이에요.”

 

처음 보는 사람이라서 경계하는 것뿐이라고?

그럼 이 엄마는 맨날 처음 봐서 그렇게 경계하는 거니?

 

레온, 고모께 인사드려. 안녕하세요.”

 

치토세가 키리노 앞에서 고개를 숙이고 인사하자, 레온도 그 뒤를 따라 자리에 엎드려 키리노를 향해 고개를 숙였다.

 

, 그래. 안녕? 난 치토세 고모 키리노야. , 그나저나 역시 치이는 대단해. 말도 안 통하는 동물과 마음이 통하다니. 그럼 나도 레온이랑 친해질 겸 머리라도 쓰다듬어 볼까?”

 

키리노는 마치 수전증에 걸린 사람처럼 벌벌 떨며 레온의 머리 위에 자신의 오른 손을 올려놓았다.

안 그러는 게 좋을 텐데?

 

크어어엉!!”

꺄아아악!!”

 

그럼 그렇지.

레온은 키리노가 자신의 머리 위에 손을 올려놓자마자 표정을 찡그리며 울부짖었다.

 

미안해, 키리노. 안 그러는 게 좋을 거라고 방금 말 하려고 했는데... 걔는 치토세 말만 들어. 치토세 말고 다른 사람은 잘 안 따라.”

, 그래? 하하하... 치이만 따른다고? 그거 아쉽게 됐네. 하하하...”

 

키리노는 하나의 얼굴로 황당한 표정과 겁에 질린 표정을 동시에 표현하며 말했다.

 

고모, 죄송해요. 레온! 고모한테 그러면 안 된다고 했잖아.”

꺄아아아! 타잔 소녀라니 치이 너무 귀엽다!!”

 

키리노는 앙칼지게 소리 지르며 있는 힘껏 치토세를 껴안았다.

좀 전까지만 해도 레온 때문에 겁에 질려있던 키리노의 표정은 다시 웃음기 가득한 환한 얼굴로 바뀌었다.

 

, 고모! 숨 막혀요! 놔주세요!”

5분만 더 이러고 있으면 안 돼? 네가 너무너무 귀여워서!”

“5분 있다가 죽겠어요!”

 

계속 안고 있으려 하는 키리노와 빠져나가려고 아등바등하는 치토세의 모습이 어찌나 귀여운지. 나는 흐뭇한 표정을 지은 채 두 사람을 조용히 지켜만 보았다.

 

잠시 후, 우리는 장소를 현관에서 거실로 옮겼다.

 

, 이거 선물.”

 

키리노는 거실 탁자 위에 오면서 사온 물건들을 천천히 풀어놓기 시작했다.

나와 치토세는 키리노가 들고 왔던 쇼핑백에서 물건을 하나하나 꺼내는 모습을 유심히 지켜보았다.

먹거리에 반찬거리에 가끔씩 나와 오빠에게 선물하던 옷가지에... 이 많은 걸 혼자 다 들고 오다니, 역시 키리노다.

 

그냥 와도 되는데 뭐 이런 것까지 다 사오고 그랬어?”

공짜로 묵으면 미안하니까 그렇지. , 그리고 이건 치이 선물이야!”

 

키리노는 멍하니 물건들을 바라보고 있던 치토세를 향해 검은 빛이 감도는 물건을 꺼내들었다.

검은 색깔에, 직사각형에, 요즘 컴퓨터 모니터와 비슷한 크기의 이 물건은...

이거 설마?

 

키리노, 이건... 설마?”

! 플레이스테이션4! 치이랑 오랜만에 만나는 거, 큰 맘 먹고 장만한 거야.”

 

, 플레이스테이션4?

나처럼 게임에 흥미가 없는 사람이라고 해도 플레이스테이션이라는 이름은 살면서 한두 번쯤은 들어봤을 거다.

그 정도로 오랜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가정용 게임기다.

이거 한 대로 여러 게임을 할 수 있는 대신, 한 대 장만하는데 드는 돈이 장난 아니라고 하던데... 이걸 아무렇지도 않게 살 정도로 키리노에겐 금전적인 여유가 있다는 말인가?

 

, 이거 얼마 주고 산거야?”

이거? 4만 엔(한화 약 45만원).”

, 4만엔?!”

 

하마터면 심장이 멎는 줄 알았다. 무슨 게임기 한 대가 그렇게 비싸지?

그 정도면 우리 집 식비 4일 치는 나오겠네.

전에 키리노가 치토세의 학교 참관수업 때 가져왔던 250만 엔(한 화 약 2,800만원)짜리 비디오카메라에 비하면 별 거 아니긴 하겠지만, 그래도 4만 엔이라면 보통 큰돈이 아닌데... 갑자기 키리노한테 미안한 생각이 들었다.

 

이거 너무 미안한데. 정말 이렇게 막 줘도 되는 거야?”

괜찮아, 괜찮아. 이 정도 지출로 비명 지를 지갑은 아니라고. 그리고 내가 좋아서 선물하는 거야. , 치이. 이건 이제부터 네 거야.”

우와! 갖고 싶었는데. 고모 감사합니다!”

후훗. 그리고 이건 플레이스테이션으로 할 수 있는 게임. 철권 태그 토너먼트2 언리미티드!”

 

4만 엔짜리 게임기에 모자라서 게임팩까지...

이만한 지출을 했는데도 비명 지를 지갑이 아니라니, 대체 수입이 얼마라서?

 

치이가 전에 검은 거랑 게임해서 이긴 걸 보고, 생각나서 그거랑 비슷한 격투 게임으로 하나 골라 사왔지. 그것도 처음 잡았는데 그렇게 잘한 걸 보니까 이것도 그렇지 않겠는가 싶어서.”

 

지난여름에 있었던 그 일을 얘기하는 건가?

물론 그때 치토세가 엄청난 게임실력을 보여준 건 사실이지만, 그냥 우연일 수도 있지 않을까?

-키리노와 아야세는 치토세가 철권 게임대회에서 우승했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다.-

 

치이, 고모랑 이거 한 번 해볼래? 고모도 시간 날 때마다 틈틈이 연습해서 한 실력 하거든.”

! 저 하고 싶어요!”

그럼 지금 당장 연결해볼까?”

 

키리노는 플레이스테이션 포장박스 내에 들어있는 설명서를 천천히 읽으며 거실 텔레비전과 연결했다.

플레이스테이션과 텔레비전이 연결되자, 그 안에 가져온 게임 CD를 넣었다.

플레이스테이션에 인식된 게임이 텔레비전 화면에 비춰졌다.

우리들은 곧장 텔레비전과 마주보고 소파에 앉았다.

우와. 요즘 게임들은 이렇게 화려하구나? 마치 영화를 보는 것 같았다.

내가 멍하니 보고 있는 사이, 화면이 데모화면에서 캐릭터 선택 화면으로 바뀌었다.

 

태그모드는 아직 연습을 많이 못했으니까, 그냥 솔로모드로 하자. 고모의 주 캐릭터는 바로 릴리 로슈포르야.”

 

키리노가 선택한 캐릭터는 허리까지 내려가는 매력적인 금발머리에 희고 화려한 옷차림의 귀티가 풍기는 여자 캐릭터였다.

 

저는... 이거!”

 

치토세가 선택한 캐릭터는 붉은 왼쪽 눈에 뒤로 모아서 올린 것 같은 검은 머리를 가진 건장한 체구의 남성 캐릭터였다.

 

, 카즈야를? 풍신류는 오랜 시간 연습하지 않으면 아무나 쉽게 못 쓰는데. 치이가 그렇게 나온다 이거지? 좋아. 릴리의 화려한 공중콤보 쇼를 보여주겠어!”

 

키리노의 외침과 함께 화면이 바뀌었다.

벚꽃 잎이 바람에 휘날리며 떨어지고 있는 어느 학교의 운동장을 배경으로 두 사람이 선택한 캐릭터들이 서로를 마주보고 당장이라도 싸울 것 같은 자세를 잡고 있었다.

그나저나, 이 게임 되게 잘 만들었다. 게임에 관심이 없는 나라도 관심이 갈 정도다.

캐릭터와 배경이 마치 실존하는 인물과 장소처럼 섬세하고 진짜처럼 보인다.

심지어 벚꽃 잎 하나하나가 바닥에 떨어지는 그 모습이 어찌나 자세히 표현되어 있는 지, 지켜보는 나에게 절로 감탄사를 유발하게 한다.

게임 개시 선언과 함께 대결이 시작되었다.

시작과 동시에 두 캐릭터는 잠시 거리를 벌리며 제자리에서 빠른 스텝을 밟았다.

 

처음 하는 애가 스텝이 제법인데? 이거 재밌는 게임이 되겠어?”

 

게임 시간이 5초 정도 흐르자, 키리노의 릴리가 치토세의 카즈야를 향해 발차기 공격 -에델바이스- 을 날렸다. 그러나 치토세는 발차기 공격을 옆으로 살짝 움직이며 가볍게 피하더니, 이내 릴리를 향해 강력한 어퍼컷 -풍신권- 2번 날렸다.

어퍼컷을 맞은 릴리는 공중에 뜬 상태에서 카즈야가 날리는 공격들을 무방비 상태로 계속 맞다가 구석까지 몰렸다.

 

완벽한 초풍에 실수 하나 없는 말끔한 공중콤보까지! 이 고모는 지금 감탄하고 있어. 하지만 겨우 그 정도로 쉽게 져줄 내가 아니지!”

 

구석에서 겨우 벗어난 키리노의 릴리는 치토세의 카즈야를 향해 틈이 날 때마다 원투 펀치와 덤블링 공격 -백 플립- 을 넣으며 재기의 기회를 노렸다.

그러나 치토세의 카즈야는 그렇게 쉽게 기회를 주지 않았다. 릴리가 넣는 공격들은 대부분 타이밍을 잘 맞췄다고 느껴질 정도로 날카로웠으나, 카즈야의 방어도 이에 견줄 수 있을 정도로 만만치 않았다.

이어 릴리가 하는 공격을 고개를 숙여서 피한 카즈야는 곧이어 릴리의 복부를 강하게 후려쳤다. -기원권- 복부를 정통으로 맞은 릴리는 마치 제자리에 선 상태로 기절한 듯 움직임이 없어져버렸다. 이에 기회를 살린 치토세의 카즈야가 조금 전에도 했던 강력한 어퍼컷을 2번 날리며 릴리를 공중으로 띄웠다. -일명 기원초. 기원권을 카운터로 맞춘 후 초풍으로 상대방을 띄워 콤보를 넣는 고난이도 테크닉-

카즈야는 공중으로 띄운 릴리를 실컷 때리다가 제자리에서 한 바퀴 회전하여 발차기를 한 뒤 왼손으로 릴리의 복부를 가격했다. -나락선풍-

이 공격을 모두 맞은 릴리는 제자리에 맥없이 쓰러졌다.

K.O. 치토세가 이겼다.

 

우와... 기원초는 프로들도 넣기 힘든 콤보인데... 역시 치이는 게임의 천재인가 봐. 프로들도 어려워하는 콤보를 아무렇지도 않게 쓰잖아.”

그냥 막 누르니까 써지던데요?”

그러니까 네가 대단하다는 거야. 그 말대로 막 눌러선 안 되는 걸 쓰고 싶을 때 마음대로 쓸 수 있잖아.”

 

키리노가 무슨 말을 하는 지는 전혀 모르겠지만, 그래도 쉽게 풀이해보면 치토세가 대단하다는 말이겠지?

 

좋아, 2라운드야. 이번엔 고모도 그렇게 쉽게 안 져 줄 거야.”

알았어요.”

 

곧이어 펼쳐진 2라운드.

치토세의 거친 공세에 신중해진 키리노는 릴리를 뒤로 후퇴시키며 틈틈이 간을 보며 기회를 노리는 듯 했다.

이에 치토세는 카즈야를 전진시키며 공중으로 띄우고자 여러 번 어퍼컷을 날렸지만, 좀 전의 공격에 바짝 긴장한 키리노는 좀처럼 맞아주지 않았다.

오랜 대치 끝에 릴리의 백 덤블링 공격이 제대로 명중하며 카즈야가 공중에 떴다.

이어서 릴리의 콤보 돌입. 릴리는 콤보를 다 맞추고 카즈야가 다시 일어나자마자 제자리에서 몸을 낮춘 뒤 하늘을 향해 발차기를 날렸다. -매터호른 캐논-

역시 이를 피하지 못하고 맞은 카즈야가 벽에 몰렸다.

카즈야의 체력이 얼마 없다. 이대로 시간을 끌거나 결정타를 날리면 릴리가 이긴다.

가운데 앉아서 얌전히 지켜보던 나도 릴리의 승리를 점치던 바로 그 순간.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뜨아아악! 말도 안 돼!!”

 

키리노가 입을 쫙 벌리며 큰소리로 외쳤다.

그러는 게 당연하지. 치토세의 카즈야가 날린 회심의 강력 어퍼컷 공격이 릴리에게 무려 3방이나 명중되며 콤보가 들어갔으니 말이다.

곧이어 카즈야는 제자리에서 한 바퀴 회전하더니, 반격하려고 일어난 릴리에게 강력한 어퍼컷을 날렸다. -귀신멸렬-

어퍼컷을 정통으로 맞은 릴리는 제자리에 푹 드러누워 버렸다.

K.O. 치토세의 역전승이었다.

 

, 이럴 수가... 어떻게 초풍을 제자리에서 그것도 여자 캐릭터를 상대로 3번 연속 쓰지? 나도 한 번 하는 게 고작인데... 에잇! 이대로 끝낼 순 없지! 치이, 한 번 더하자!”

알았어요. 저도 재밌으니까 좀 더 할래요.”

좀 전엔 고모가 방심해서 그랬던 거야. 이번엔 진심으로 해주겠어! 치이, 너 캐릭터 바꿀 거니? 고모는 안 바꿔.”

이번엔... 이걸로 할게요!”

 

치토세가 다음에 선택한 캐릭터는 머리에 두 개의 뿔이 달려 있고, 등에 검은 날개가 돋아있었다. -데빌 진-

 

옛날에 쿠로네코 아줌마랑 저랑 이 게임 같이 했었는데, 그때 아줌마가 이걸로 하시더라고요. 저도 한 번 해볼래요.”

그 검은 거의 주 캐릭터가 데빌 진이란 말이지? 맨날 자기 자신보고 타락천사가 어쩌고 하더니만, 이렇게 보니까 이미지가 잘 맞기도 하네. 좋아, 덤벼!”

 

그저 게임 하나 같이하고 있을 뿐인데, 두 사람의 표정이 너무나도 행복해보였다.

나도 기회가 생기면 이 게임을 조금 배워볼까?

 

 

태양이 서쪽 하늘을 향해 사라져가며 붉은 노을빛을 만드는 오후.

 

으아아... 쟤를 어떻게 이겨! 완전 사기야 사기! 오랜 시간을 연습해온 내가 한 번도 못 이기다니...”

 

치토세를 상대로 단 한 번도 이기지 못한 키리노는 소파 위에 형태로 드러누워 버렸다.

집안일도 잘해, 공부도 잘해, 오빠 닮아서 오지랖도 넓지, 순수하고 순진하지, 다정하지, 심지어는 게임도 잘해. 파더콤이라는 걸 제외하면 치토세한테선 단점이라는 걸 찾을 수가 없다.

 

그냥 게임이잖아. 네가 너그럽게 봐 줘.”

헤헤... 하긴 그래. 역시 치이는 대단해.”

 

키리노와 오랜 시간 게임하다 지친 모양인지, 치토세는 거실 왼편에서 레온의 허리를 베개 삼아 곤히 잠들어있었다.

 

♩♬♪~

 

어디선가 음악소리가 들려온다.

음질을 듣자하니 휴대전화 벨소리인 것 같은데. 일단 내 휴대전화 벨소리는 아니다.

 

, 내 거다.”

 

키리노는 소파에서 일어나며 주머니에서 휴대전화를 꺼내 받았다.

 

여보세요?”

 

키리노가 전화를 받고 있는 사이에, 슬슬 시간도 됐겠다, 저녁식사나 준비해볼까. 했는데...

 

? 뭐라고요? 그게 정말이에요?!”

 

키리노는 소스라치게 놀란 말투로 외치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 소리가 너무 커서 부엌에 있던 나는 깜짝 놀라며 거실을 바라보았다.

 

아니, 갑자기 스케줄에 펑크가 나면 어쩌란 말이에요?! 뭐라고요? 장염? 나 참... 한창 바쁠 때 웬 장염? 그래요, 알았어요.”

 

키리노는 미간을 잔뜩 찌푸린 채 휴대전화를 끊었다.

무슨 안 좋은 일이라도 있는 건가?

 

키리노. 왜 그래? 무슨 일이야?”

하아... 잡지에 낼 사진을 찍던 모녀 모델이 갑자기 장염 증세를 보이며 쓰러져서 병원에 실려 갔대. 어쩌지? 기껏 휴가 나와서 스트레스나 풀려고 했더니, 스트레스가 더 쌓이게 생겼어.”

다른 사람으로 대체할 수도 있는 거 아냐? 너무 그렇게 심각하게 걱정할 필요는 없을 것 같은데.”

너도 모델 해 봤으니까 알잖아. 모델 캐스팅 하는 데 하루 이틀이 걸리는 게 아니라는 걸. 그리고 잡지에 사진 내는 날이 바로 내일이라고, 내일. 하필이면 이럴 때 이런 일이 생기다니... , 왜 잘 나가다가 항상 끝에 가서 이러는 거야!”

 

키리노는 제자리에 앉아 고개를 푹 숙인 채 양손으로 머리를 세게 쥐어 잡았다.

 

키리노...”

 

절실한 친구가 고뇌하는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어야만 하는 지금의 내 현실이 너무 원망스럽다.

내가 뭔가 도울 수 있는 일이 없을까? 혹여나 내가 대신...

하아... 전업주부가 무슨 모델을 한다고. 모델 은퇴한지 10년이 넘어서 감도 다 잃었을 거고, 오빠와 결혼생활하면서 치토세도 키우느라 피부 관리도 틈틈이 못했는데. 내가 지금 무슨 생각을...

 

, 그렇지! 아야세! 맞아. 아야세랑 치이가 있었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냐고 나 자신에게 되물으려는 찰나, 키리노가 제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외쳤다.

 

아야세, 이번 한 번만 나 도와주면 안 될까? ? 부탁이야. 진짜 급하거든. 내일이 마감이라서 오늘 밤 10시 안에 찍지 않으면 큰일 나.”

저기... 하지만 난...”

괜찮아, 괜찮아! 넌 지금도 거리 한복판에서 길거리 캐스팅 될 정도로 충분히 예뻐! 별로 어려운 건 아니고, 치이랑 같이 우리 회사가 디자인한 옷을 입고 사진만 찍어주면 되는 거야.”

아니, 아무리 급해도 그렇지 나 같은 평범한 주부를 써도 되는 거야?”

사진 찍는데 신분 같은 게 무슨 상관이라고. 괜찮으니까 빨리 가자. ?”

 

나를 바라보며 간절히 부탁하는 키리노의 두 눈이 어두운 밤하늘 위에서 빛나는 별처럼 반짝거렸다.

내가 애써 시선을 피하고자 고개를 이리저리 움직여도, 키리노의 별빛을 뿜는 두 눈은 그것을 놓치지 않고 끈질기게 따라왔다.

 

, 알았어. 그만해. 그 눈빛을 보고 있으면 도와줄 수밖에 없게 되잖아.”

정말?! 우와, 고마워!! 덕분에 살았어! 역시 아야세 넌 세상에 하나 밖에 없는 절친이야!”

 

키리노는 기쁜 표정을 지으며 나를 있는 힘껏 껴안았다.

 

, 키리노! 숨 막혀! 그만 좀 놔줘!”

 

정말 키리노는 다른 사람 껴안는 걸 너무 좋아한다.

그런데, 힘이 들어가도 너무 들어간 것 같다. 힘 조절을 못하는 건 예나 지금이나 똑같구나.

나도 이렇게 숨이 막힐 지경인데 키리노와 만날 때마다 억지로 껴안기는 치토세는 오죽할까.

 

 

키리노의 간절한 부탁을 이겨내지 못한 나는 딱 하루만 일일모델이 되어주기로 했다.

우리가 콜택시를 타고 1시간가량 걸려서 겨우 도착한 장소는 도심 한 가운데에 위치한 제법 규모가 큰 사진관이었다.

키리노는 택시에서 내리자마자 황급히 사진관의 문을 박차고 들어갔다.

나도 급한 키리노와 맞춰 서둘러 들어가려고 했지만...

아까까지 자고 있던 치토세가 내 발목을 잡는다!

 

사장님! 모델 대령입니다!”

, 코우사카 씨! 필요할 때 와 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일일모델이 되어주실 분들은 어디 계시나요?”

, 저기요!”

 

, 이런. 잠이 덜 깬 치토세를 깨우며 추스르느라 민망한 꼴을 보여 버렸다.

 

오늘 일일모델 해주실 분이시죠? 바쁘실 텐데 선뜻 나서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이야, 미모가 보통이 아니신데요? 이 정도면 그라비아 잡지 모델로 나가셔도 손색이 없으시겠습니다. 게다가 어머님도 이렇게 미인이신데 따님도 한 미모 하네요?”

, 아뇨! 별 말씀을요! 과찬이세요.”

 

사진관 사장님이 나와 치토세를 번갈아 바라보며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나는 애써 침착함을 유지한 채 치토세를 흔들어 깨우며 억지웃음을 지어보였다.

 

사진관은 군데군데 주름이 진 얼굴에 콧수염을 길러 한 눈에 봐도 중후해 보이는 인상을 가진 남성 사장님과, 키리노와 비슷한 빛깔의 갈색 단발머리를 가진 비교적 젊어 보이는 여성분 단 둘이 운영하는 듯싶었다.

나와 치토세는 패션 잡지에 내보낼 사진에 나올 옷으로 갈아입고 카메라 앞에 섰다.

그런데 이 옷, 어째 너무 희고 헐렁한 게... 꼭 텔레비전 드라마에 자주 나오는, 한여름의 바닷가에서 청순한 여성들이 주로 입는 드레스와 비슷한 느낌이 든다.

하얀 드레스에 맞춰 제작된 지푸라기 모자에, 푸른 바다와 마주보고 있는 모래사장을 배경으로 그려 넣은 벽지를 보아하니, 컨셉이 해변인 모양이다.

 

긴장 푸시고, 자연스럽게 자세를 잡아주시면 됩니다. 어머님께서는 제자리에 앉으시고 따님은 어머니 무릎에 누워 자는 시늉을 해주세요.”

치이, 엄마 무릎에 누워서 자는 시늉 하면 돼. 알았지?”

, 알았어요...”

 

치토세는 아직도 잠이 덜 깼는지, 손으로 입을 막고 하품을 하며 대답했다.

그리고 무릎을 꿇고 앉은 내 무릎에 머리를 베고 누웠다.

 

포즈 좋고, 찍습니다!”

찰칵!

 

카메라 플래시가 터졌다.

오랜만에 느끼는 카메라 플래시의 감촉은 어쩐지 모르게 반가웠다.

 

다음엔 어머님이 따님과 같이 손잡고 해변을 거니는 자세를 찍어보죠. 자리에서 일어나주실래요?”

 

나는 사장님의 말을 따라 자리에서 일어났다.

하지만...

 

치토세. 그만 자고 좀 일어나.”

 

얘가 왜 이렇게 잠의 수렁에 빠져 헤어 나오지를 못하는지 원.

치토세는 내가 자리에서 일어나는 것엔 아랑곳하지도 않고 계속 제자리에 누워 잠을 청했다.

 

죄송합니다. 저희 애가 많이 피곤한가 봐요.”

 

나는 잠든 치토세를 깨우며 사장님께 정중히 사과했다.

 

아뇨, 괜찮습니다. 그럼 포즈를 좀 바꿔보죠. 잠든 아이를 업고 해변을 거니는 여인의 컨셉으로 해 볼까요?”

.”

 

나는 곤히 잠들어 있는 치토세를 등에 업고 오른발을 앞으로 내밀며 걷는 자세를 잡았다.

 

, 자세 좋은데요? 혹시 모델 하신 경력이 있으신가요?”

10년 전까진 했었죠. 결혼하고 관두긴 했지만요.”

어쩐지. 평범한 가정주부치곤 자세를 잘 잡으신다 싶었죠. , 따님 쪽을 바라보며 살짝 웃어주시겠어요? 그냥 무표정으로 걷는 것보단 그게 더 나을 것 같네요.”

.”

 

나는 치토세를 업은 채 뒤를 바라보며 살짝 미소를 지었다.

 

찰칵!

좋습니다! 그대로 좀만 더 계세요. 한 장 더 찍습니다!”

 

찰칵!

으으... ~ 눈 부셔.”

 

뒤에서 치토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카메라 플래시에 반응해 잠이 깬 모양이다.

 

잘 잤니?”

. 그런데 제가 왜 엄마 등에 업혀있어요?”

 

치토세가 오른 손으로 눈을 비비며 질문했다.

 

네가 계속 안 일어나고 자니까 그렇지. 이제 조금만 더 하면 되니까 자지 말고 계속 일어나있어. 알았지?”

, 알았어요.”

따님도 이제 일어난 것 같군요? 그럼 아까 컨셉으로 다시 찍죠. 손을 맞붙잡고 해변을 거니는 모녀입니다.”

 

치토세는 사장님이 하신 말씀을 듣자마자 마치 미끄럼틀을 타는 것처럼 등에서 내려와 내 왼편에 섰다.

나도 지시에 따라 치토세의 오른손을 잡고 걷는 자세를 취했다.

 

찰칵!

좋습니다. 한 장 더!”

 

찰칵!

 

사진을 찍고, 자세를 바꾸고, 또 사진을 찍고, 또 자세를 바꾸는 일은 그렇게 30분 간 계속 이어졌다.

 

 

사진촬영이 모두 끝나고 쉬는 시간.

우리는 사진관 내 휴게실의 탁자 앞에 옹기종기 모여 앉아 차를 마셨다.

 

, 역시 아야세야. 몇 년이 흘러도 모델 기질은 변하지 않는구나?”

변하진 않긴 뭘. 옛날처럼 원하는 대로 자세가 잘 안 잡혀서 좀 힘들었어.”

코우사카 씨 친구 분 중에 이런 미인이 계셔서 저희도 행운이었습니다. 덕분에 예정대로 잡지에 내보낼 사진을 왕창 뽑아낼 수 있겠네요. 다시 한 번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사장님이 나와 내 옆에 앉아 있는 치토세를 향해 정중히 고개 숙이며 인사했다.

 

아니에요. 그냥 키리노가 도와달라고 해서 좀 도와준 것뿐인 걸요.”

, 맞다. 사장님. 제가 깜빡 잊고 말 안 했는데, 여기 아야세는 제 친구기도 하지만, 친척이기도 해요. 저희 오빠 와이프거든요. 옆에 있는 아이는 그 딸이자 제 조카고요.”

, 그렇습니까?”

아이, 키리노. 그런 얘기를 뭐 하러 해?”

국가기밀 터는 것도 아닌데 뭘 그래? 이왕 여기까지 왔으니까 인맥이라도 쌓아놓으면 좋잖아. 안 그래?”

그야 그렇지만...”

 

이런데다가 우리 집 신상을 얘기하면 앞으로의 생활이 평범하지 않을 것 같단 말이지.

 

저희도 오늘 어머님을 만나 다행이었습니다. 좀 외람된 말이긴 한데... 뭐 자주 부탁드리지는 않겠지만요. 오늘 같은 일이 다시 생기지 말라는 법은 없으니, 나중에 필요할 때 일일모델 좀 부탁드려도 될까요?”

 

여기 오기 전부터 이런 부탁이 나올까봐 걱정했는데... 나의 감은 항상 이런 데서 정확히 적중한다.

 

... . 저희라도 괜찮으시다면...”

정말 감사합니다. 그리고 따님 말인데요. 어머님을 닮아서 미모도 출중하고, 사진기와 정면으로 마주봐도 긴장 한 번 안 하는 게 딱 모델감인데, 이참에 아역모델로 데뷔시켜보시는 게 어떤가요?”

? 모델이요?”

 

사장님의 제안에 나는 내 옆자리에 있는 치토세를 물끄러미 바라보며 골똘히 생각했다.

치토세는 어른들이 자신에 대해 얘기하고 있다는 걸 꿈에도 모른 채,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나를 보며 이를 드러내고 환한 미소를 지었다.

물론 치토세가 아역모델이 되면 집의 금전적 사정이 좀 더 나아지겠지만...

그런데 이런 건 치토세 본인에게 먼저 물어본 뒤 그 다음에 나한테 물어봐야 하는 거 아닌가?

 

글쎄요. 갑자기 그런 얘기를 하시니 좀 당황스럽네요.”

아마 따님이라면 금방 세계적인 스타로 성장할 수 있을 거예요. 따님에게도 장래가 확실히 보장되는 거고, 어머님 아버님도 스타의 부모로서 세계적인 입지를 다지실 수 있으실 겁니다. 좋은 기회가 아닌 가 사려 됩니다만. 어머님의 생각은 어떠십니까?”

 

확실히 치토세가 모델이 되면 지금의 키리노처럼 그 장래가 보장되는 건 맞다.

나도 오빠도 스타의 어머니로서 세계적인 입지를 다질 수 있는 것도 정설이다.

지금 살고 있는 평범한 삶보다 더 화려한 삶을 살게 되겠지.

하지만 인간은 자신의 미래를 개척할 수 있는 재주가 있다.

그저 운명과 본능에 몸과 마음을 다 맡긴 채 살아가는 짐승과는 다르다.

인간이 자신의 삶을 스스로 개척하지 않고 사는 것은, 자신이 인간으로서의 기능을 하지 못한다는 것을 온 세상에 공표하는 것과 같다.

나는 아직 어린 치토세가 자신의 삶을 스스로 개척할 기회도 갖지 못하고 성장하는 모습을 보고 싶지는 않다.

난 여태껏 살면서 치토세에게 장래에 무엇이 되고 싶은지, 꿈이 무엇인지에 관해선 별로 물어본 적이 없다.

어린 치토세에게 감당하기 어려운 무거운 짐을 지우고 싶지 않기 때문이었다.

어린 나이에 데뷔한 스타들의 이야기도 살면서 많이 들어왔다.

그들의 어린 시절 이야기는 그야말로 텔레비전에서 자주 방영하는 다큐멘터리 그 자체였다.

금전적인 문제로 인한 부모 간의 불화, 양육권을 건 다툼, 항상 주위의 시선을 신경 쓰며 자신을 속이는 삶에 얽매여 살아야만 하는 어린 스타들.

마음속으로는 울면서 겉으로는 웃어야만 하는 가녀린 스타들.

이렇듯 어린 시절에 데뷔해서 순탄한 삶을 보낸 스타는 거의 없었다.

 

“...별로 좋은 기회는 아닌 것 같은데요.”

? 좋은 기회가 아니라뇨? 그게 무슨...”

 

사장님 입장에서는 좋은 기회일 수도 있겠지.

하지만 치토세를 키우는 내 입장에서 생각해보면 썩 좋은 기회가 아니다.

치토세를 위해서라면... 자신의 인생은 자신 스스로 개척할 기회를 주는 것이 부모가 해줄 수 있는 최고의 선물이 아닐까?

 

부모라고 해서 자식의 인생을 마음대로 정할 수 있는 건 아니에요. 인생은 결국 자신 스스로 원하는 길을 찾아가는 것이니까요. 하지만, 자식이 잘못된 길로 빠지지 않고 올바른 길로 갈 수 있도록 안내해주는 건 부모가 해야 할 일이죠. 전 치토세가 주위의 시선을 신경 쓰며 자기 자신을 속여야 하는 삶을 살게 하고 싶지는 않아요.”

 

치토세가 갈 길은 치토세 스스로가 정하지 않으면 안 된다.

치토세 앞에 닥쳐오는 운명은 치토세 스스로가 싸워서 이겨내지 않으면 안 된다.

부모인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그런 치토세를 옆에서 점잖게 지켜봐주는 것 뿐.

 

치토세한테도 분명 자신만의 꿈이 있을 거예요. 앞으로 하고 싶은 일도 많겠죠. 그런 치토세의 의사를 무시하고 마음대로 장래를 정해버리는 건 부모가 할 도리가 아닌 것 같아요. 전 치토세가 가진 장래의 꿈과 희망을 존중해주고 싶어요. 치토세가 가진 무한한 잠재력을 응원해주고 싶어요. 부모로서... 엄마로서. 치토세가, 누군가가 정해준 것이 아닌... 진정 자신의 행복과 이상을 찾아 언제나처럼... 코우사카 치토세라는 그 이름에 부끄럽지 않은 삶을 살아갔으면 좋겠어요... , 더 쉽게 말하면... 치토세는 아직 어리니까 벌써부터 삶의 아픔을 경험하게 하고 싶진 않네요. 사장님의 그 제안, 마음은 고맙지만 받아들일 수가 없을 것 같아요. 죄송합니다.”

 

어린 나이에 아픈 상처를 받은 아이들이 성장하면서 보통 아이들보다 더 어른스럽게 성장하는 건 흔한 일이다.

하지만... 상처를 받으면 반드시 흉터가 남는 법.

상처 받지 않고 자랐어도 충분히 어른스러운 치토세에게 상처보다 더 아프고 고통스러운 흉터를 갖게 하는 일은 부모로서 절대 용납할 수 없다.

나는 사장님 앞에 대고 정중히 고개 숙여 사과했다.

 

하아... 정말 아까운 인재를 놓친 것 같네요. 그렇지만, 어머님의 뜻이 정 그러하시다면 할 수 없죠. 괜한 소리를 해서 정말 죄송합니다.”

 

사장님 역시 내 앞에 대고 정중히 고개 숙여 사과했다.

괜히 활기차고 좋던 분위기를 나의 횡설수설 몇 마디로 어색하게 만든 것 같아 어쩐지 무안해졌다.

 

사장님, 아야세. 여기 좀 봐 봐요. 치이 또 잔다. 크큭...”

 

키리노가 킥킥거리며 말했다.

그와 동시에 그 자리에 있던 모든 사람들의 시선이 치토세를 향해 쏠렸다.

어느새 치토세는 제자리에 앉은 채 두 눈을 꼭 감고 깊이 잠들어 있었다.

 

오늘 정말 많이 피곤했나봐. 평소엔 이렇게 많이 자는 애가 아닌데.”

, 그렇지! 아야세. 이 사진 찍어서 오빠한테 보내주는 게 어때?”

그거 좋은 생각인데? 그러자. 사장님, 저희 치토세 사진 좀 찍어주실 수 있나요?”

그럼 물론이죠. 깨지 않도록 최대한 조용히 찍어드릴게요.”

 

사장님은 플래시가 터지는 카메라 대신, 디지털 카메라를 사용해 곤히 잠들어 있는 치토세를 촬영했다.

나와 키리노는 흐뭇한 표정을 지으며 잠자는 숲 속의 공주처럼 편히 자고 있는 치토세를 조용히 지켜보았다.

 

. . .

 

... 뼈 빠지게 일하고 들어와 방 벽에 걸려있는 시계를 보아하니 저녁 7시가 넘었다.

한 달 동안 일주일 중 주 6일을 쉬지 않고 일한 덕분이라 그런 지 온 몸이 찌뿌드드하고 뻐근하다.

 

뜨아아아아~! 오늘도 하루가 끝났구나!”

 

나는 천장을 향해 양손의 깍지를 끼고 개운하고 시원하게 기지개를 켰다.

겨울이라 해가 짧아서 그런지, 창밖의 하늘은 어둡고 짙은 남색으로 물들어있었다.

 

빨리 씻고 한 숨 푹~~ 자 볼... ?”

 

♪♬~

 

주머니 속에 넣어둔 휴대전화에서 메일이 왔음을 알리는 벨소리가 들려왔다.

 

이럴 때 또 누구야?”

 

보람찬 하루 일을 끝마치고서 이제 여유롭게 발 닦고 잠이나 자려고 한 나를 방해하는 이 메일을 송신한 사람이 과연 누구일까?

만약 스팸메일이면 그동안 주변 사람들 눈치코치 살피느라 아끼고 또 아껴놨던 욕설들을 바가지로 날려줄 테다!

잠깐. 아야세한테서 온 걸 수도 있는데... 일단 감정을 추스르자.

나는 기대 반 짜증 반의 마음을 품고 메일의 송신자를 확인했다.

 

뭐야, 키리노잖아?”

 

스팸메일은 아니라 이성을 잃을 걱정은 없었지만, 혹여나 아야세가 메일을 보냈을까 하고 은근히 기대했었는데... 내 기대감은 돌팔매질을 맞고 깨지는 유리처럼 처참히 부서져버렸다.

이 녀석 또 브라콤 발언으로 도배된 메일을 보낸 건 아니겠지?

나는 반신반의하며 메일을 열어 내용을 확인했다.

하하... 살다보면 참 별 일도 다 있네. 맨날 브라콤 발언으로 잔뜩 도배된 메일만 보내면서 이번엔 어쩐 일로 내 눈을 다 호강시켜주는구나.

키리노가 보낸 메일에는 아야세가 치토세와 함께 흰 드레스를 입고 손을 맞잡고 바닷가를 거니는 모습을 담은 사진들과, 치토세가 곤히 잠든 모습을 담은 사진이 담겨져 있었다.

 

오늘 아야세랑 치이가 일일모델을 해주면서 찍은 사진들이야.

이 일을 하던 모델들이 갑자기 스케줄에 펑크를 내는 바람에 곤란하던 걸 아야세랑 치이가 도와줘서 무사히 끝낼 수가 있었어.

원래 잡지에 낼 사진들인데 오빠한테 먼저 보내주자는 의견이 나와서 몇 장 보내봤어.

어때? 아야세 진짜 예쁘지? 치이도 완전 귀엽지?

하긴, 오빠가 이걸 어떻게 부정하겠어. 나라도 부정 못해.

그리고 아야세가 그랬는데, 이 사진들 보고도 바람피울 생각하면 죽여 버릴 거래.^^

 

나의 여신과 천사가 태양보다도 밝고 해맑은 미소를 지으며 찍어 보내준 이 사진들을 보고 그 누가 바람피울 생각을 하랴. 그럴 일은 하늘이 두 쪽 나는 한이 있어도 없을 테니까 걱정 하덜덜 말아라.

일 때문에 온 몸이 아프고 피곤한 나를 위해 자그마한 활력소를 보내준 키리노한테 자그마한 감사 인사라도 해볼까.

 

너라는 녀석도 가끔은 내 눈을 호강시켜줄 때가 있구나.

사진 잘 받아봤다. 고마워.

안 그래도 일 때문에 많이 힘들었는데, 아야세랑 치토세의 사진을 보니 빠졌던 힘이 다시 쑥쑥 솟아나는 것 같다.

두 사람한테 사랑한다고 전해줘.

 

내 스스로 문자를 보내놓고 이렇게 손발이 오글거리는 건 왜일까?

, 오글거려도 크게 상관은 없으려나? 그만큼 내가 아야세와 치토세를 사랑하고 있다는 증거니까 말이지.

이제 한 달도 거의 다 지나갔고, 집에 돌아갈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

오랫동안 집을 비워서 내 마음도 썩 편치가 못하다.

여자 둘만 남겨놓고 이렇게 타지로 왔는데 어느 집안의 가장인들 안 그러랴.

하지만 사진을 통해서 자신들이 잘 있다는 걸 알려주는 걸 보니, 마음속의 무거운 짐과 걱정들을 조금은 덜 수도 있을 것 같다.

그동안 내가 없어서 외로웠을 아야세와 치토세를 위해서라도, 돌아가면 아침마다 모닝키스를 해줘야겠다.

인간 자명종이나 다름없는 치토세보다 더 일찍 일어날 수 있다면 말이지.